On Air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부검 결과 자체는 추락사가 맞아. 그런데 추락한 직후에 목격자가 119에 신고했단 말이야. 목격자 증언으로 이훈주 씨 추락 지점에 누가 같이 있었대. 그리고 이송한 대원 말로 당시에 이훈주 씨가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구두 차림이었다고 나와 있어. 회사에서는 등산하다 추락했다고 가족들한테 연락했다는데, 부인은 평소에 이훈주 씨가 등산을 전혀 안 한다고 얘기했었다는 거야.”
정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민혜에게 물었다.
“그래서 부검 요청했나 보네. 같이 있었던 사람에 대한 증언도 있어요?”
“멀리서 본 거라 정확하지가 않아. 170 좀 넘는 키에 중년 남자로 보였대. 같이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훈주 씨가 추락하는 거 보고 목격자가 신고한 뒤에 보니까 사라졌더라는 거지. 교수님이 증언 보고 정황상 타살 아닐까 의심이 돼서 경찰 기록까지 다 요청해서 보신 것 같더라고.”
“조창식 키가 딱 그 정도긴 할 텐데…… 오래된 일이고 조창식이 죽었으니 알 수가 없겠네. 일단 알겠어요.”
민혜가 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 피디, 김정환 교수님한테 가져온 현장 사진하고 자료 좀 보내 줘요. 지금 빨리.”
“아, 네.”
윤이 대답하자 민혜가 다시 회의실 문을 닫았다. 윤이 메일을 보내는 사이, 이마를 감싸고 있던 정언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기르는 개보다도 쉽게 사람을 죽이는 이들의 뒤를 밟는다는 건 심적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매번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마다 여지없이 그 바람을 배신하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 대가를 치를까 상상해 보는 것은 늘 막막했다.
잠시 말이 없던 정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언이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노트북을 닫은 윤이 정언을 불렀다.
“선배.”
정언은 돌아보지 않은 채 왜,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윤이 말했다.
“최악의 상황 같은 건 생각하지 마세요.”
손잡이를 움켜쥔 손안으로 서늘하게 습기가 배었다. 윤을 보지 않기 위해 정언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절대 선배가 그런 일 혼자 감수하게 안 할 거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순간 자신을 감싸 안았을 때 전해지던 윤의 체온이 환각처럼 되살아났다.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안도감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하지만 그런 불안 속에 더 이상 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어야 했다.
그리고 정언은 그 순간 깨달았다. 그 위험이 기꺼이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윤을 다치게 하기 싫어서라는 걸.
이 자리에서 윤을 잃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라는 걸.
23.
재희가 돌아온 건 막 자정을 넘겼을 때였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사무실로 들어선 재희는 사무실 안을 훑어보았다. 정언은 이른 아침부터 장거리 운전이 피곤했는지 숙직실에서 한 시간만 눈을 붙이고 오겠다고 내려간 뒤였다.
윤은 그사이 허주경 사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모두 읽은 뒤 민혜가 받은 CCTV 화면을 돌려 보던 참이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윤과 눈을 마주친 재희가 물었다.
“서 피디 어디 갔어?”
“잠깐 눈 붙이고 온다고 숙직실 내려갔습니다.”
“아, 그래? 그럼 김 피디가 이거 먼저 봐.”
대답을 들은 재희는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종이 뭉치를 윤에게 휙 던졌다. 놀란 윤이 얼른 그것을 받아 안았다.
“이게 뭔데요?”
“허주경 사장이 썼다는 접대 장부야.”
윤은 저도 모르게 커진 눈으로 재희를 쳐다보았다.
“변호사한테 장부 주고 못 돌려받았다면서요?”
“응. 그런데 큰딸이 당시 허 사장이 제출했던 증거 전부 복사해서 가지고 있었어. 딸이 법대생이라고 했잖아. 현직 선배들한테 재판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조언 얻었던 모양이야. 혹시라도 나중에 아버지가 항소 결심하면 쓰려고 했대. 시간, 장소, 금액 전부 다 나와 있어. 분량도 상당하고. 터지면 파장 클 거야.”
“이걸 방송에서 전부 다 공개하실 겁니까?”
“이미 볼륨 커서 그렇게는 안 돼. 만약에 검찰 수사 들어가면 그쪽에 제공할 수는 있겠지. 지금 사본 하나 더 만들어서 전한동 부장님하고 공유했어. 일단 이거 박규형 씨 장부하고 비교하고 중복되는 명단 집어내자고. 특히 한선당 소속 지자체장, 국토위 의원들 확실하게 확인해. 분명히 겹치는 놈들 나올 거니까. CCTV 영상 명단하고도 다 맞춰 보고. 이거 계좌 추적하면 이 새끼들 확실하게 목 따 버릴 수 있는데.”
창틀에 걸터앉은 재희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장부를 두어 장 넘겨보던 윤이 재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공윤승 변호사 만나 보셨어요?”
윤의 물음에 재희가 픽 웃었다.
“만났지. 주차장에서 죽치고 있으니 별수 있어? 차 타려는 거 붙잡고 잠깐 얘기 좀 하자는데 죽어도 할 말 없다고 경호원 불러서 도망치더라고. 하긴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나랑. 몇 시간 대기 타면서 아주 수상해 보이는 그림 하나 땄으니까 된 거지. 조창식 건은 어떻게 된 거야? 용의자 나왔어?”
“아뇨, 이틀 전에 발견했다니까 지금 수사 중인 것 같습니다. 김정환 교수님 말로 부검은 오전이라고 하고요. 현장 사진 보내 달라고 하셔서 전부 보내 드렸어요.”
윤의 대답을 들은 재희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담당이 노이섭 형사라며? 말 통하는 사람인데, 대쪽 같고. 서 피디는 뭐래?”
“강 피디님하고 팀장님 구면이라고 얘기하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면 우리 쪽 정보 제공하면 어떻겠냐고 하던데요.”
“우리 쪽 정보?”
“선배는 손경일 쪽에서 손썼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요.”
재희가 아, 하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 경찰 수사 들어가면 우리 쪽에서도 도움 받을 거 많으니까. 위에서 어느 정도로 프레셔 올지 모르겠지만 일단 노 팀장 자체는 괜찮은 사람이야. 서 피디한테 연락처 줬지?”
“네.”
“아침에 바로 연락해 보라고 해. 다른 건?”
“최정미 씨라고, 윤대석 씨가 다닌 병원 간호사하고 저녁에 통화했습니다. 간호사가 경찰에도 당시 정황 얘기했다는데, 검찰에 수사 기록 넘어갈 때 전혀 반영이 안 된 것 같아요.”
미간을 찌푸린 재희가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일부러 삭제한 건가? 중요한 내용이야?”
“그런 것 같은데요. 오래 다녔고 동네 병원이라 최정미 씨도 개인적으로 좀 알았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윤대석 씨가 디펜히드라민 성분에 원래 부작용이 심해서 차트에 항상 따로 주의사항 표시가 돼 있었대요. 그래서 그때 디펜히드라민 제제 처방이 나간 거 보고 자기가 김회영 원장한테 물어봤답니다.”
“부작용이 심한 약을 일부러 처방했다?”
“네. 신경이 쓰여서 정말 괜찮냐고 몇 번을 물어봤는데 원장이 굉장히 짜증을 내면서 괜찮다고 말했는데 왜 그러냐, 신약이라 같은 성분이라도 부작용이 덜하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간호사가 잘 알겠냐, 의사가 잘 알겠냐 하면서 화를 내서 더 물어보질 못했대요. 처음 조사 나왔을 때 경찰한테 이 얘기를 했다는데 진형은 검사님도 들은 바가 없다고 하고, 저희가 받은 기록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 있던 창틀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켰다.
“서 피디랑 송 작가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 검찰에 기록 없으면 경찰에서 안 넘겼다는 건데, 담당 수사관 이름 찾아봐. 일단 커피 한 잔 해야겠다. 김 피디도 마실래?”
윤은 대답 대신 책상 위에 이미 놓인 테이크아웃 컵을 들어 보였다. 씩 웃은 재희가 커피머신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그 뒷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윤은 핸드폰 진동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민혜에게 온 메시지였다.
― 방금 청명토목 퇴사했다는 제보자한테 메일 왔는데 전달했으니 확인해요. 수고 메시지를 읽기 무섭게 윤은 바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제목 없음’으로 포워딩된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현재 서온건설이 진행 중인 경기도 임대주택 건축 현장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서온건설이 입찰 시 제출한 설계도서에는 내진 설계와 최근 출시되는 국산 프리미엄 철근을 사용하기로 약속해 공사를 수주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내진 설계도 빠진 데다 인장 강도와 중량이 부족한 중국산 철근을 사용해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현장 내 야적장 출입 관리가 부실해 철근을 빼돌리는 일도 잦고, 안전 수칙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첨부된 서류는 청명토목에서 나온 것이 확실했다. 서류에 적힌 철근 발주처는 서온건설이었다.
윤은 즉시 그 메일을 재희에게 포워딩하고는 커피를 마시는 재희를 돌아보았다.
“피디님, 송 작가님이 제보자한테 받은 메일 포워딩했는데 지금 확인해 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재희가 눈으로 알겠다는 신호를 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남은 커피를 물처럼 마신 재희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컵을 내려놓은 재희가 고개를 들며 윤에게 물었다.
“서 피디 내려간 지 얼마나 됐어?”
“아직 이십 분 좀 안 된 것 같은데요.”
“지금 진송신도시 현장 가 봐야 되겠는데.”
“지금요? 왜요?”
놀란 윤이 되묻자 재희가 펜 끝으로 자기 모니터를 툭툭 쳤다.
“야적장 관리 부실하다는 내용 있잖아. 야적장이 자재 쌓아 놓는 데인 건 알지?”
“아, 네.”
“이거 모든 현장이 다 이럴 확률이 높아, 지금. 출입 관리 제대로 안 된다는 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린데, 그러면 밑져야 본전이지. 서 피디한테 전화 좀 해 봐.”
“그럼 저하고 가시죠.”
재희가 정언을 데리고 가려고 하는 건가 생각한 순간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재희가 멈칫하며 윤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