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김 피디하고? 괜찮겠어?”
반신반의하는 듯한 말투였다. 정언을 부사수로 두고 일했다는 재희에게 자신이 영 미덥지 못한 건 당연했다. 윤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말을 뱉은 즉시 가슴이 철렁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잠깐 쉬러 간 정언을 다시 깨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재희와 단둘이라면 더더욱. 물론 그 속을 알 리 없는 재희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더니 윤에게 물었다.
“야간 촬영 해 본 적 없지?”
“네.”
“저기, 제일 위에 있는 게 적외선 캠이야. 그거 가지고 따라와. 조명 못 쓰니까.”
재희가 비품장 가장 위쪽에 놓인 카메라 가방을 가리키고는 차 키를 집어 들며 사무실을 나섰다. 바로 카메라를 챙긴 윤은 재희를 따라 뛰어나갔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마자 재희가 자기 차에 먼저 시동을 걸었다.
“피디님, 제가…….”
당황한 윤이 자기 차를 돌아보자 재희가 조수석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후배한테 기사 시키는 취미 없으니까 빨리 타.”
그 말에 퍼뜩 처음 취재를 나갔던 날의 정언이 떠올랐다. 윤은 그제야 정언이 그날 왜 자신에게 굳이 운전을 시키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이런 순간에도 정언에게서 재희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윤이 서둘러 조수석에 앉아 문을 닫기 무섭게 재희가 차를 출발시켰다.
하루 종일 밖에서 취재를 했으면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다시 한밤중 촬영을 나간다는 건 상상조차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체력 좋은 사람이라도 반년이면 나가떨어질 것 같은 스케줄이었다. 속으로 혀를 내두른 윤은 운전을 하는 재희의 옆모습을 흘끔 보았다.
단정한 만큼 빈틈없는 얼굴은 어쩐지 정언과 닮은 데가 있다고 느껴졌다. 함께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일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지나간 시간의 지층을 상상하자 곧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서로가 닮아 갈 정도의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절대로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건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곧 고속도로로 진입한 재희가 말이 없는 윤 쪽으로 잠시 시선을 주더니 입을 열었다.
“일은 할 만해? 힘들지?”
“이제 어느 정도 적응돼서요. 괜찮습니다.”
“서로 한마디도 불평 안 한 거 처음이라 놀랐어.”
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네? 하고 되묻자 재희가 말을 덧붙였다.
“여태까지는 계속 다른 피디들이 서 피디랑 일 못 하겠다고 나가떨어지든지, 서 피디가 차라리 혼자 하겠다고 화를 내든지 둘 중 하나였어서. 김 피디도 아무 말 없이 잘 하고, 서 피디도 불평 한마디 안 하는 거 처음이라 놀랐다고.”
그런 건 몰랐던 사실이었다. 애초에 자신이야 글 하나 잘못 쓴 죄로 얼결에 로 오게 된 거였고, 반한 놈이 죄인이라고 정언이 좋으니 일이 힘들고 말고를 따질 것도 없었다.
그러나 처음에 그렇게 불편한 티를 내던 정언이 자신에 대해 불평 한마디 없었다는 건 의외였다. 머뭇거리던 윤은 애써 웃으며 가장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선배가 많이 봐주셔서 그렇지 않을까요?”
“서 피디 그런 스타일 아닌데.”
짐짓 툭 뱉은 재희가 바로 다시 치고 들어왔다.
“김 피디는 서 피디 어떻게 생각해?”
재희의 물음에 가슴이 덜컥했다. 그런 의미로 물은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몰래 쓰던 일기장을 들킨 아이처럼 귀 끝이 확 뜨거워졌다. 차 안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윤의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닌 듯, 재희가 앞을 보며 말했다.
“옆에서 봤으니까 알겠지만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그렇지, 남들 말처럼 피도 눈물도 없고 그런 애는 아닌데. 겉은 차가워 보여도 속은 안 그런데 보이는 게 그러니까 좀 아쉽지. 아, 남들도 얘 진짜 괜찮은 거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때 있잖아.”
재희가 정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는 일종의 애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불현듯 회식하던 날 밤이 생각난 건 필연적이었다. 자신이 마치 불청객처럼 느껴졌던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건너갈 수 없는 깊은 균열.
재희와 정언 중 어느 누구도 먼저 그 선을 넘어가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을 거라고 윤은 문득 생각했다.
“네, 좀…… 그렇죠.”
어떤, 인간적인, 부분. 정언이 발음하던 그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재희는 어쩌면 정언의 그런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심결에 종이에 베는 듯 소리 없이 싸한 감각이 심장 위를 긋고 지났다.
아픈 건지, 화가 나는 건지, 혹은 견딜 수 없는 건지 어느 쪽으로도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그 상처의 궤적 사이에서 스며 나왔다.
질투.
지금의 이 복잡한 감정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건 고작 그 두 글자였다. 윤은 본래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포기가 빨랐다. 그러나 정언에게는 달랐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데, 재희의 자리에 자신이 대신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불가항력적인 전제를 생각할 때마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혹시 포항에서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잠시 침묵하던 재희가 물었다. 윤은 순간 저도 모르게 재희를 보았다. 읽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 질문이 무슨 의도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정언이 그날의 일을 재희에게 얘기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재희가 어떻게 포항에서의 일을 묻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윤이 대답하지 못하자 재희가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졌다.
“대답이 없다는 건 긍정으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이야?”
입술이 마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은 짧게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아뇨, 그냥 조금…… 사적인 부분이라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뱉기 무섭게 강재희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의 대답을 들은 재희가 재미있다는 투로 짧게 웃었다.
“그게 누구한테 사적인 부분인지 물어봐도 되나?”
“선배한테는 공적이고, 저한테는 사적인 부분입니다.”
그 상황을 표현할 다른 말이 없었다. 그때 정언이 선을 넘지 말라고 한 건 분명 정언과 자신의 공적인 관계 때문이었고, 자신이 상처 받은 건 사적인 이유였으므로 그게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소 공격적인 태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미 한 말을 주워 담는 건 불가능했다. 그 말에 재희가 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재희의 그린 듯한 입매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김 피디, 표정 풀어. 내가 지금 굉장히 무례한 사람 된 것 같은데, 맞아?”
“그런 건 아닙니다.”
윤은 서둘러 대답했다.
“팩트 체크할 생각 없었고,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 별일 없었으면 됐어.”
웃음기가 약간 섞인 목소리였다. 그 이상의 질문이 돌아올 걸 예비하고 긴장한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재희가 깔끔한 태도로 상황을 정리했다.
윤은 이 끝으로 입술 안쪽을 깨물어 눌렀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재희 앞에서 어린애처럼 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탓이었다.
애초에 재희가 왜 그 이야기를 꺼낸 건지, 뭐가 생각나서 물어봤다는 건지, 그 대답만으로 별일이 없었다는 걸 어떻게 짐작했는지 윤으로서는 하나도 넘겨짚을 수 없었다. 이렇게 속을 알기 힘든 것까지도 정언과 닮아 있을 필요가 있을까. 공연히 재희 탓을 한 윤은 입을 다물었다.
재희가 손을 뻗어 카 오디오의 버튼을 눌렀다. 생경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윤은 대시보드의 액정에 뜨는 자막을 눈으로 읽었다. Thelonious Monk…… 델로니어스 몽크. 입 안으로 발음해 본 이름 역시 낯설었다.
한산한 고속도로에서 재희가 속도를 더 올렸다. 닫힌 창밖으로 희미하게 지나치는 소음이 경쾌한 피아노 소리와 뒤엉켰다.
이후로 재희는 진송신도시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희는 불이 꺼진 현장 게이트 앞을 지나 아직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현장 끝까지 차를 몰았다.
정찰하듯 주변을 서너 바퀴 돌던 재희가 차를 멈춘 곳은 현장에서 채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드넓은 공터 인근이었다.
시동을 끈 재희는 창 너머로 주의 깊게 그쪽을 살피더니 먼저 차에서 내렸다. 윤이 황급히 따라 내리자 재희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곁에 선 윤은 공터 안쪽으로 쌓인 각종 자재들이 어둠 속에서 작은 동산처럼 솟은 것을 알아차렸다. 야적장이었다. 공터 앞쪽으로 ‘서온건설 제1야적장’이라고 쓰인 간이 팻말이 서 있었다. 재희가 야적장 안쪽의 컨테이너 건물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무실이거나 숙소로 쓰는 건물 같은데 불 꺼진 거 보니까 사람 없는 것 같아. 일단 들어가 볼 건데, 김 피디 100미터 몇 초에 끊지?”
맥락 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한 윤은 순순히 대답했다.
“학교 다닐 때 13초 뛰었는데요.”
“그 정도면 됐네. 카메라 들고 따라와.”
뭐가 됐다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재희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바로 야적장으로 향했다. 확실히 출입 관리 따위는 일절 없는 느낌이었다. 불이 꺼진 컨테이너 건물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윤은 재희를 따라 목재며 강판, 파이프 따위의 자재들이 위에 비닐 천막을 덮은 채 높게 쌓인 사이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드리워지는 그 거대한 그림자는 위압적이었다. 눈은 곧 어둠에 익숙해졌으나, 야적장에 따로 조명이 없어 형태가 제대로 보이는 건 아니었다.
자재들의 산을 몇 개쯤 지나던 재희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을 돌아보고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윤은 서둘러 카메라를 켜고 야간 촬영 모드를 맞췄다. 적외선 라이트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실제로 써 본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