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광원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액정 안으로 사물의 윤곽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초점을 조절한 윤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재희가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검은 천막으로 아래까지 완전히 덮어 놓은 자재의 산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는 전혀 망설이는 기색 없이 아래서부터 그 천막을 걷어 올렸다. 제대로 적재되지도 않은 채 그냥 쌓아 올려놓은 철근들이 드러났다. 몸을 숙이며 핸드폰을 꺼내 액정 불빛으로 긴 철근을 따라가며 비춰 본 재희가 윤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중국산이네. KS 마크도 없고 제강사 고유 넘버도 없는데.”
윤은 서둘러 재희가 가리키는 대로 가까이서 철근을 찍었다. 재희는 윤이 촬영을 하는 사이 바닥을 살펴보았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바닥 위를 한참이나 더듬던 재희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흰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이었다. 종이를 비추며 그 위를 살핀 재희가 윤에게 손짓을 했다.
“철근 원산지 표시된 태그야. 아래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돼 있는 거 보이지?”
“아, 네.”
대답한 윤은 재희의 손에 들린 태그를 촬영했다. 재희가 그 태그를 주머니 안에 쑤셔 넣고는 몸을 숙여 철근 위를 만져 보더니 곧 냄새를 맡았다. 눈썹을 약간 좁힌 재희는 바로 핸드폰 라이트를 켜 철근 아래쪽을 살폈다. 생각보다 지나치게 밝은 빛이라 윤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재희가 손가락으로 자기가 비추고 있는 쪽을 가리켰다.
“여기도 찍어 줘. 밑에 다 녹슨 거 보여?”
재희의 말대로 아래쪽의 철근에는 녹이 빨갛게 올라와 있었다. 윤이 촬영하며 얼굴을 찌푸리자 재희가 혀를 찼다.
“자재 관리부터 이렇게 개판인데, 여태 어디 하나 안 무너진 게 신기하네.”
두 사람은 야적장 안을 샅샅이 뒤졌다. 철재 관리가 엉망이니 다른 자재라고 사정이 다를 리는 없었다. 문서에 기록된 것은 대부분 국산 자재였으나, 야적장 안에서 원산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재들은 거의 중국산이었다.
드넓은 야적장 안을 한참이나 헤집고 다니던 윤은 한쪽에서 폐자재를 쌓아 둔 더미를 발견했다. 녹이 슨 철근 조각이나 빈 시멘트 포대, 부서진 목재 따위가 대충 덮어 둔 천막 아래로 드러났다.
그 사이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윤은 제품명을 확인할 수 있는 태그며 포대 같은 것을 무조건 찍었다. 어차피 지금 자세히 본다고 해야 어디에 쓰는 것인지, 제대로 된 것인지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근처에서 주변을 살피며 핸드폰에 연신 무언가를 메모하던 재희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재희는 숨소리에 가까울 정도로 작게 김 피디, 하고 윤을 불렀다. 윤이 고개를 들자 재희는 서둘러 카메라를 끄라는 손짓을 했다.
영문을 모른 채 윤이 우선 카메라를 끄자, 재희가 먼발치에서 보이는 자재 더미 쪽을 가리켰다. 무언가 밝은 불빛이 크게 번졌다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가 순찰을 도는 모양이었다.
“나 따라서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뛰어.”
재희가 속삭이는 목소리에 윤은 즉시 카메라를 움켜쥐었다. 손짓으로 신호를 한 재희가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재희가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통에 기겁을 한 윤은 서둘러 그 뒤를 쫓아갔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뭐라고 고함을 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적장을 가로질러 입구로 빠져나간 재희가 멀리서 차가 보이기 무섭게 시동을 걸었다.
차에 도착하자마자 뒷좌석 문을 연 재희는 달려오는 윤의 팔을 낚아채 안으로 밀어 넣고는 바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윤이 거의 구르다시피 뒷좌석에 처박히면서도 문을 잡아당겨 닫자 재희가 엄청난 속도로 액셀을 밟았다.
사이드미러로 호각을 불며 쫓아오는 두 남자의 실루엣이 비치다 순식간에 멀어졌다. 윤이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재희가 백미러로 윤을 보았다.
“이거 간만인데 스릴 있네. 어디 안 다쳤어?”
“엄청 빠르시네요.”
대답 대신 저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재희가 그 말에 소리를 내어 웃었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육상부였어. 공부하려고 관뒀는데 하던 짬은 있으니까.”
스마트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든 것 같은 재희가 육상부 출신이라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문득 정언이 거의 매일같이 새벽 조깅을 한다고 혀를 내두르던 지혁의 말이 떠올랐다.
달리기 잘하는 게 언제부터 피디의 덕목이었더라, 하고 속으로 생각한 윤은 아직도 쿵쿵거리는 심장 위를 누르며 숨을 골랐다. 뒤에서 쫓아오던 남자들을 생각하자 뒷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정언이 성모 사원 촬영을 하다 한밤중에 산길에서 추격당하며 도망쳤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온몸으로 체감될 지경이었다. 자신이 대체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걸까 새삼 궁금해진 윤은 품에 안은 카메라를 내려다보았다.
재희가 운전을 하며 말했다.
“도착하면 영상 바로 인코딩 걸어 놓고, 전문가 섭외했다며? 날 밝는 대로 송 작가한테 그쪽에 자문 부탁하라고 얘기해.”
“아, 네.”
“자재 쪽에서 확실하게 걸리면 방송은 문제가 아닌데, 소스가 넘쳐서 문제네. 지금 위에서 프레셔만 없으면 3주 분량도 나올 것 같은데.”
아쉽다는 투가 역력한 목소리에 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눠서 방송할 수는 없나요?”
재희는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상황이면 첫 주 방송 나가자마자 위에서 당장 그다음 방송 막을 거야. 3주분 준비했다가 다음 내용 다 날리면 아깝잖아. 최대한 다이제스트 깔끔하게 해서 60분 안에 해결해야지. 60분 생각보다 기니까 어느 정도 내용 충분히 다 들어가긴 할 거야. 서 피디랑 송 작가 그거 기가 막히게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
네, 하고 대답했지만 정작 자신이 걱정하는 건 방송이 아니라 정언이었다. 정언의 집을 일부러 보란 듯이 건드린 거라면 앞으로도 같은 일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당장 이사부터 하든지, 그럴 시간이 없다면 당분간 회사 숙직실이든 어디서든 지내는 편이 나을 텐데 정작 당사자인 정언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 속이 탔다.
“김 피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얼마나 멍하니 있었던 건지, 재희가 묻는 말에 윤은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 아닙니다.”
더듬거리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자 재희가 백미러에 비친 윤을 흘끔 보았다.
“여자 친구 있다고 했나?”
“아뇨, 없습니다.”
윤의 대답에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래? 김 피디 눈독 들이는 사람 엄청 많던데. 당연히 있을 줄 알았지.”
“저한테 얘기하는 사람은 없던데요.”
“다들 벌써 애인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보네.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냐고 물어봐야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무난한 대답을 생각해 보려 했으나 뭐가 무난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냥 뭐…….”
“서 피디 같은 스타일은 어때?”
적당히 얼버무리기 무섭게 돌아온 질문에 마시지도 않은 물이 목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거짓말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기에 재희를 속일 자신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머뭇거리던 윤은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선배가 저 같은 타입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김 피디는 그런 타입 좋아하고?”
놀리는 건지, 진심인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도 이미 재희의 손바닥 위인 것 같았다. 잠시 주저하던 윤은 대답했다.
“네.”
그 말에 재희가 다시 한 번 백미러로 윤을 보더니 씩 웃었다.
“그 매력 아는 거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김 피디 눈 높네.”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어쩐지 그건 재희가 정언을 이성으로 느낀 적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정언은 단언했지만,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그렇게 칼로 자르듯 분명한 건 아니었다.
침묵하던 윤은 사이를 두고 물었다.
“피디님은 선배, 여자로 생각하신 적 없습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재희가 멈칫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기는 했으나, 사이를 둔 재희는 미묘하게 달라진 말투로 되물었다.
“아까 내가 무례하게 군 거 이런 식으로 갚는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서 피디 나한테는 좋은 후배고 동료야. 이런 대답 원하는 건 아니겠지만.”
윤은 그 말에 재희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포항에서의 일을 물었다는 건, 자신과 정언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 분명했다.
재희의 의도가 뭔지는 확실히 파악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윤은 재희를 응시했다. 재희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인간적으로 난 서 피디 굉장히 좋아해. 내 옆에 둬서 망가뜨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건 자기 곁에 있다면 정언이 망가질 거라는 뜻일까, 하고 윤은 생각했다. 그 생각이 계속 이어지기도 전, 재희의 목소리가 선을 그었다.
“다른 사람하고 삶을 공유한다는 거 생각 안 한 지 오래됐어. 예외는 없어.”
단호하기 그지없는 단어들이었다. 윤은 문득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던 재희를 떠올렸다.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는 인생을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 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고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이란 무엇일까.
재희의 얼굴에 잠시 가시는 것 같았던 웃음기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