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아, 이걸로 아까 내가 무례하게 굴었던 거 주고받은 셈 치자고. 김 피디 진짜 만만한 사람 아니네. 애초에 우리 팀에 굴러 들어왔을 때부터 알았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내가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을 한 건 인정하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되로 주고 말로 받을 건 예상 못 했네. 앞으로 김 피디한테 절대 사적인 질문 안 할게.”
장난스럽게 말한 재희가 앞을 보았다. 두 사람의 절대 넘어갈 수 없는 경계, 그토록 가까이 있으면서도…… 더 이상 지킬 것도 없이 쌓아 올린 입구 없는 재희의 벽과, 그 공허함을 알기에 스스로 그어 버린 정언의 선 사이는 까마득했다. 재희가 자신의 곁에 있으면 정언이 망가질 거라고 말한 건 그 때문일 터였다.
윤은 그 막막함에 안도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언제나 올곧은 건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알지만 약간의 자괴감 같은 감정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 가라앉은 윤은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어둠 사이로 풍경의 윤곽은 채 초점이 맺히기도 전 뒤로 흩어졌다.
방송국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세 시가 넘어 있었다. 재희가 차에서 내리며 윤에게 말했다.
“먼저 사무실 올라가. 난 편집실 들렀다 갈 테니까. 혹시 서 피디 와 있으면 내용 설명해 주고.”
“네, 알겠습니다.”
재희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윤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그새 자리에 앉아 있던 정언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윤을 본 정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강 피디님하고 진송신도시 현장 야적장에요. 제보 메일 온 거 보고 피디님이 야적장에 한 번 가 보자고 하셔서…….”
“선배 미친 거 아냐? 거기 왜 김 피디 데려갔어? 나한테 연락 안 하고.”
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언이 얼굴을 구겼다. 윤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제가 가겠다고 했어요.”
“야간 촬영 해 본 적도 없잖아. 위험한데 거기가 어디라고 가?”
“선배 깨우기 싫어서 그랬어요.”
그 말을 들은 정언이 순간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윤을 마주 보다 되물었다.
“주차장 앉아서 밤샌 사람은 안 피곤하고?”
“저기, 야적장 갔었는데 자재가 중국산이더라고요. 자재 관리도 엉망이고. 일단 찍을 수 있는 건 다 찍어 왔는데, 막판에 순찰 도는 사람들한테 걸려서 좀 불안하네요.”
윤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얄팍하기 그지없는 수작이었으나, 정언도 자신과 더 입씨름을 하기 피곤한지 윤의 말을 받았다.
“촬영하는 거 걸렸다고?”
“모르겠어요. 피디님이 먼저 보고 일단 도망치자고 하셔서…… 뒤에서 쫓아오긴 하더라고요.”
정언이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주변에 CCTV 있을 텐데, 경찰에서 또 연락 오게 생겼네. 뭐 선배가 알아서 할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일단 영상 있다니까 자재 상표나 그런 거 나온 부분 가지고 전문가 자문 받으면 되겠네. 그리고 이건 뭐야?”
정언이 자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문서 더미를 가리켰다. 아까 재희가 가져온 허주경 사장의 장부 복사본이었다.
“아, 피디님이 가져오신 거예요. 허주경 사장이 기록했다는 장부인데, 큰딸이 항소 대비해서 사본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이거 우리가 가진 명단하고 한 번 맞춰 보라고 하셨어요.”
사정을 들은 정언이 아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게 어디서 났나 했지. 알았어, 잘 됐네.”
“조창식 문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일단 날 밝는 대로 노이섭 팀장님 쪽에 연락해서 얘기하고 도움 요청할 거야. 오전에 부검 결과 나오면 더 확실하겠지. 주변 CCTV나 블랙박스 영상도 다 확보했을 테니까 진짜 손경일 쪽이면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을걸. 처넣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선배 집은요?”
윤의 물음에 정언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윤을 마주 보았다.
“우리 집이 왜.”
“거기서 계속 계실 수 없잖아요. 이사할 집 알아보든지, 아니면 잠깐 다른 데 계시면…….”
“확실해지면 그건 그때 생각하면 돼. 김 피디가 신경 쓸 일 아냐.”
정언이 말을 잘랐다. 이미 정언이 그 상황에서 잠시나마 평정을 잃는 걸 본 이상 그건 윤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언 역시 그걸 뻔히 알 텐데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화가 났다.
“선배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셔서 그렇게 할 거면 처음부터 말도 안 해요.”
“김 피디, 그만하고 퇴근하든지 숙직실 가서 한숨 자고 오든지 해.”
이 문제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윤은 정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맞받던 정언은 곧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뭐 어떻게 할까? 내가 지금 한가하게 집 구하러 다닐 시간 있는 것도 아니고, 신세 질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김 피디가 매일 나 퇴근할 때마다 밤새 그러고 있을 거야?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신경 쓰인다고 얘기하면 내가 김 피디 위해서 뭘 어떻게 해 줘야 돼?”
“제가 매일 그러고 있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실 거예요?”
윤이 정색을 하며 되묻자 정언이 얼굴을 찌푸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좀.”
“그게 왜 말이 안 되는데요. 상황이 이런데 그냥 보고만 있어요? 제가 뭐라도 해야겠으니까, 선배 걱정되니까 얘기하는 거지 절 위해서 뭐 어떻게 해 달라는 소리 아닌 거 아시잖아요.”
애써 차분하게 말하려 했으나 속에서는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감정의 발화점이 낮아진 건 피곤한 탓일 수도 있었지만, 이 일에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만약 그게 정말 누군가가 정언의 입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라면 윤으로서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언이 문 앞에 밤새 앉아 있으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정언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경찰에서 연락 오는 대로 무슨 방법이든 생각해 볼 테니까 이 얘기는 그만하자. 나 김 피디한테 더 폐 끼칠 마음 없어. 이거 내 일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고.”
“꼭 그런 식으로 말씀하셔야 돼요?”
“본인만 나 걱정한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마찬가지야.”
정언이 윤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칠까 봐 걱정됐다고 말하던 정언의 그 나지막한 목소리와 표정이 순간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다음 단어를 잠시 잊어버린 윤은 정언을 뚫어지게 마주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언이 윤의 어깨를 툭 치고는 커피머신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짙은 커피향이 순식간에 고요한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정언이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내려가서 쉬고 와. 엄청 피곤해 보여. 내 앞에서 이러는 거 보면 김 피디 안 멀쩡한 거 알겠으니까, 한숨 자고 아침에 제정신일 때 다시 얼굴 보고 얘기해.”
“선배.”
“김 피디, 말만 선배 선배 하지 말고 말 좀 듣자. 선배가 맨날 나보고 말만 선배라고 하지 저 하고 싶은 거 다 한다고 잔소리하던 기분 이제 내가 알겠어. 말 더 보태지 말고 지금 빨리 내려가.”
정언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도리가 없었다. 머뭇거리던 윤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커피머신 앞을 지나치며 정언을 돌아보자, 정언이 커피를 마시며 잠깐 눈으로 피식 웃었다.
그 표정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말없이 사무실을 나선 윤은 문 옆의 벽에 기대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정언이 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계보다 더 강한 척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언에게 자꾸만 온 신경이 기울어지는 건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미 그 한계를 넘어 버린 게 아닐까 두려워서. 정언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 없이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 때문에.
그래서 절대로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 * *
“딸이 그래도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나 보네. 이런 거 미리 다 복사해 놓을 생각도 하고. 어휴, 우리 아빠 그렇게 잡혀갔으면 난 아무 생각도 못 해.”
장부를 넘겨보던 민혜가 혀를 내둘렀다. 민혜의 책상 끝에 걸터앉은 정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우리한테는 엄청 다행이지. 수도권 엄대진계 애들 다 걸려요. 전직 국토부 애들 몇 명하고 한교, 을정, 애포, 여기 시장 부시장 다 걸리고. 이 장부에만 있는 이름들 몇 개 검색해 봤는데 시청 경리계장 이런 애들이에요. 하급 공무원 접대부터 하다가 올라간 거지.”
“전현직 판검사도 꽤 되더라. 이건 박규형 씨 명단에는 없는데, 그러면 이런 애들은 하청에서 직접 받은 건가?”
“허주경 씨 얘기 들어 보면 서온하고 커넥션 있는 판검사들 끼고 접대 받은 것 같아요.”
민혜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정언의 말을 듣다가 짝 소리가 나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오케이. 줬다는 증거는 확실하고, 그럼 이제 받았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까? CCTV 있어도 현금이 오가는 게 아닌데 계좌 추적 내역이나 녹취나 아무튼 뭐가 딱 있어야 얘들이 발뺌을 못 할 텐데.”
“검찰에서 차명계좌 알아낸 게 백여 개라는데 그 중에 몇 개는 무조건 걸리죠. 어제 청명토목 퇴사자 제보 보면 하청에서도 이거 벼르는 사람들 엄청 많을 거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까 하청업체 리스트하고 서온 게이트 때 증인 리스트 맞춰 봤어요? 내가 본다는 걸 깜빡했네.”
정언이 얼굴을 찌푸리자 민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가 누군데. 증인 리스트에 이름 중간 글자를 다 빼서 익명 처리했더라고. 근데 딱 한 사람이 감이 와. 찾아보니까 신○민이라는 사람 있는 거야. 하청업체 직원이라고 돼 있고.”
“혹시 그 제보자인가? 청명토목 신병민?”
정언이 되묻는 말에 민혜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기며 정언에게 그거야, 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