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그렇지, 그렇지. 맞는 것 같아. 그때 윤대석 씨랑 같이 증언하려다 윤대석 씨 사고로 죽고 출석 안 했대. 그러고 나서 계속 입 다물고 살다가 퇴사한 뒤에 내부자들한테 우리가 연락했다는 얘기 듣고 제보한 거 같아. 이따 신병민 씨하고 연락하면서 확인해 보려고.”
소곤거린 민혜는 으으, 하고 목을 뒤로 젖혔다. 신음 소리를 내며 뒷목을 몇 번 주무르던 민혜가 머리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놓고는 정언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나저나 강 피디랑 김 피디 둘이서 그 새벽에 그래서 기어이 거길 간 거야? 강 피디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 그렇다 치고, 김 피디는 거길 왜 따라갔대, 겁도 없이. 몇 달 있더니 아주 피디 다 됐어. 엑스레이 한 번 찍어 보라고 해, 간덩이 잘 있나.”
“애초에 간이 부었으니까 여기 왔죠. 커피 드세요.”
양반 못 되는 윤이 언제 온 건지 민혜의 등 뒤에서 대답하고는 책상 위에 커피를 올려놓았다. 기겁을 한 민혜가 앉은 채로 팔짝 뛰었다가 윤을 돌아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양반 못 돼, 진짜! 사람 간 떨어뜨리는 것까지 강재희 닮으려고 그래요? 그런 거 닮지 마. 강재희 같은 인간은 방송국에 딱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커피 잘 마실게요.”
“그렇게 되고 싶어도 못 될 거 같은데요. 선배도 커피 드세요.”
윤이 들고 있던 캐리어에서 벤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 컵을 꺼내 정언에게 건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민혜가 빨대를 문 채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물었다.
“새벽에 거기 갔다 오고 집에 들렀다가 지금 오는 거예요?”
“아뇨, 숙직실에서 좀 자고 올라왔어요.”
윤의 대답을 듣기 무섭게 민혜가 슬픈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아, 진짜 이러지 말자, 우리. 자꾸 밤새고 집에 못 들어가고 그러면 사람이 급격하게 상해요. 정언, 김 피디 얼굴 보는 게 나의 몇 안 되는 낙인데 제발 그것까지 빼앗지 말아 주겠어?”
“내가 뺏은 거 아니거든요?”
정언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항변하자 민혜가 콧방귀를 뀌었다.
“간접적인 책임은 있다고 본다, 솔직히.”
말문이 막혔다. 어차피 재희를 제외한 여섯 명 중 누구의 부사수로 들어갔더라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자신이 나머지 다섯 명에 비해 나을 건 정말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정언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탓이었다.
윤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뭐. 관리 잘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또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닌데, 하긴 원판 불변의 법칙이 있긴 하지. 망가질 원판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다행이야.”
민혜가 즉시 태세를 전환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정언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막 메일함을 확인하려는데, 갑자기 엄청난 기세로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며 뛰어 들어온 호형이 숨을 몰아쉬었다. 두 번째로 화들짝 놀란 민혜가 깜짝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자 호형이 손을 내저으며 벽을 짚었다.
“깜짝이고 뭐고, 지금 난리가 났다고!”
“뭔 난리?”
민혜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묻자 호형이 숨소리를 씩씩대며 대답했다.
“지금 밑에서 인사위 공지 떠서 난리 났어요. 재희 선배랑 이충민 선배랑 뭐 노조에서 아주 한판 뜰 기세인데, 경찰 올 거 같아.”
“뭐가 떴다고?”
정언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호형이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 인사위! 정치부 전원 3개월 감봉에 녹취록 보도한 1팀은 전원 해직, 최병주 선배하고 나명욱 부장님은 미디어사업본부 광고영업부로 전보, 정수창 선배 무기한 감봉에 심야 뉴스로 자리 옮기라고 그랬다고, 지금!”
그 말에 정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친 새끼들, 인사위 언제 열었는데? 언제 인사위 열린다고 공지 있었어?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데 그걸 어떻게 열어?”
“조금 전에 인사위 연다고 통보 문자 보내더니 30분 있다가 처리 상황 공지했대! 이 새끼들이 궐석으로 날치기한 거야, 씨발 진짜! 이 개 같은 놈들, 통보만 하면 궐석 진행하는 것 자체는 규정 위반 아니라고 그랬다잖아!”
숨이 턱까지 차 악을 쓴 호형이 곁에 놓인 정수기에서 찬물을 받아 두 컵을 연속으로 벌컥벌컥 마셨다. 숨도 쉬지 않고 물을 마신 뒤에야 조금 진정이 됐는지, 손등으로 입가를 닦은 호형이 어후, 하며 가슴을 치더니 정언에게 모니터 쪽을 손가락질했다.
“더 황당한 게 뭔지 알아? 지금 방송국 홈페이지 좀 들어가 봐. 이 새끼들 메인에 지금 계약직 전문기자 뽑겠다고 공고 올렸어. 내가 진짜 살다 살다 뉴스 기자를 계약직으로 뽑는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이 미친놈들 뭐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는 거야?”
“계약직 기자는 또 뭐야? 해직시킨 기자들 자리 계약직으로 쓴다고?”
“그러시겠대.”
케이블도 아니고 공중파 방송국에서 계약직 기자라니, 들어 본 적도 없는 초유의 사태였다. 정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며 호형에게 물었다.
“아니, 최 선배랑 나명욱 부장님 광고영업부로 보내는 건 또 뭐야? 보도국 사람들 거기 보내서 뭐 어떻게 하라고?”
“엿 먹어 보라는 거지. 김 피디는 진짜 운 좋은 줄 알아. 몇 달만 있다가 간 배 밖에 내놨으면 진짜 듣도 보도 못한 데 갖다 처박았을 거라고, 이 새끼들이.”
호형이 윤을 향해 고개를 휘적이더니 에이 씨발, 하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정언은 서둘러 방송국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호형의 말대로 첫 페이지의 공지사항에 ‘YBS 계약직 전문기자 채용 공고’라는 제목이 선명했다.
옆에서 목을 빼고 정언의 모니터를 보던 민혜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어머, 하며 입을 막았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라온다. 어떡하니, 진짜. 이거 어떡하면 좋아?”
“아니, 돌지 않고서 이럴 수가 있어요? 한 팀 인력 죄다 날리고, 앵커 없고, 메인 피디도 없고, 그런데 누가 뉴스 만들고 진행하라고? 나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이럴 거면 지금 당장 시보국 문 닫으라고 하지, 왜?”
“자기들도 지금 셔터 내리면 일 커진다는 거 아니까 이렇게 하겠지. 세상에, 정말 이게 웬일이야. 오래 살다가 별꼴을 다 본다, 내가.”
민혜가 기가 차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뱉으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사무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곧 출근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현진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한국어로 된 욕이란 욕은 전부 쏟아 내며 씩씩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맞대도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오전 열 시를 막 넘길 즈음, 정언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가 싶어 핸드폰을 집어 든 정언은 눈썹을 좁혔다. 희경이었다. 정언은 즉시 그 전화를 받았다.
“ 서정언입니다.”
『피디님, 저예요. 이희경이요.』
넘어온 희경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정언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저기, 사실은 어제 회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보상금을 2억 5천까지 올려 주겠다고, 혹시 언론 제보 같은 거 했다면 취소해 달라고요.』
“네?”
정언이 저도 모르게 되묻자, 희경이 핸드폰 너머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에서 그러더라고요. 그게 자기들이 제시하는 최고 조건이고 이거 안 받아들이면 자기들도 장담 못 한다고, 후회하지 말라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어서 피디님한테 전화를 드렸어요.』
“통화 녹취하셨습니까?”
『네.』
“그거 지금 저한테 보내 주시겠어요?”
『네, 바로 보내 드릴게요.』
정언은 눈썹 위를 문지르며 그 말을 곱씹었다. 장담 못 한다, 후회하지 말라…… 어떻게 들어도 협박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말이었다. 정언은 다급히 물었다.
“애들하고 같이 당분간 다른 곳에 계실 수 있습니까? 친정이든, 친척 집이든, 친구 집이든, 아무튼 사측에서 모를 만한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왜요?』
희경이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묻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저, 안 그래도 요새 좀 불안해서 친정 언니 집에 잠깐 있으려고 했거든요. 뭐 아시는 거 있으세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정언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혹시 몰라서요. 요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며칠 전에 어린이집에 애들 데리러 갔는데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어떤 남자가 어린이집으로 전화를 해서, 자기가 수아하고 리아 삼촌이라고 그랬대요. 애들 엄마랑 사이가 안 좋아서 조카들을 너무 보고 싶은데 못 본다고 그러면서, 혹시 자기가 찾아가면 몰래 5분만이라도 만나게 해 줄 수 있냐고…… 선생님이 원칙상 그건 안 된다고 얘기하니까 알겠다고 했다는데, 제가 그 말 듣고 애들 삼촌한테 바로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그런 적이 없대요.』
순간 등줄기로 싸늘한 감각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상대방이 자신들이 이 일을 취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희경에게 전화를 해 보상금을 올려 줄 테니 만약 언론 제보를 ‘했다면’ 취소해 달라고 말한 건 희경을 흔들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