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일부러 어린이집에 전화를 한 건 아이들에게 언제든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위협이거나, 그걸 실행에 옮기기 전의 사전 작업일 수도 있었다. 이가 갈릴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정언은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펜을 움켜쥐며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혹시 보상금 받고 이 일 없었던 걸로 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에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얼마를 받든 그런 건 말이 안 돼요.』
희경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심 약간 안도한 정언은 희경에게 말했다.
“그러면 일단 어린이집 이름하고 전화번호 알려 주세요. 최대한 빨리 거주하시는 곳 잠시 옮기시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저희가 지금 증거를 상당히 확보해 둔 상태기 때문에 우선 방송 나가는 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방송 내보낼 겁니다. 회사에서 다시 연락 오거나 무슨 일 생기시면 바로 저나 김윤 피디 쪽으로 연락 주세요.”
『네, 피디님. 감사해요. 저기, 수아가 요즘 상담 받고 있거든요. 혹시 애가 더 안 좋아질까 봐 걱정도 되고 해서요.』
상담이라니,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정언은 무의식적으로 펜을 끄적이던 손을 멈췄다.
“수아가요? 왜요? 상태가 많이 나쁜가요?”
『얼마 전부터 집에서도 통 말이 없고, 원장님이 애가 어린이집에서도 말을 거의 안 하고 하루 종일 혼자 구석에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병원 한 번 가 보면 어떻겠느냐고 하셔서…… 지난주부터 상담 받고 있는데 이런 일 생기니까 너무 불안하네요. 우선 말씀하신 대로 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꼭 연락 주세요.”
정언이 대답하자 희경이 감사합니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곧 음성파일을 첨부한 메시지가 희경의 번호로 날아왔다.
잠시 얼굴을 감싸고 있던 정언은 이어폰을 꽂아 그 음성파일을 재생해 보았다. 전화를 걸어 온 건 삼사십 대쯤 되었을 듯한 남자였다. 서온건설 사원행복문화팀 팀장 천승욱이라고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힌 남자의 태도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이희경 씨, 본론부터 얘기하죠. 남편 건 언론에 제보했습니까?』
『그건 왜…….』
『만약에 지금 그 건 언론에 제보했다면 취소하세요. 취소하시면 저희가 원래 약속했던 보상금 1억 5천에서 1억 더해 2억 5천 드리겠습니다. 이게 저희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 조건입니다. 지금 뭐 돈 백만 원 아쉬운 형편인 거 우리 쪽에서도 뻔히 알고 있고, 사측 과실 다 인정했는데 왜 자꾸 일을 크게 만들려고 그래요. 2억 5천, 적은 돈 아닙니다. 뭐 돈 많은 남자랑 재혼 계획 있어요? 남편 없이 안 쓰고 안 입으면 그 돈 생길 것 같아요?』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뭐가 지나치다는 겁니까? 우리가 역대 이렇게 보상금을 지급한 적이 없어요. 사측 과실 다 인정했고, 일 크게 만들기 싫으니까 저희가 그냥 돈 올려 부르는 겁니다.』
『저 혼자 결정할 일 아닙니다.』
『그러실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후회하지 말고 적당히 받아들이세요. 계속 배짱부리면 사측에서도 이후에 어떻게 할지 장담 못 합니다. 사흘 드릴 테니까 생각해 보세요.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펜 끝을 책상에 톡톡 치며 그 파일을 다시 한 번 돌려 들은 정언은 들어 보라는 메시지를 적어 민혜와 윤에게 파일을 보냈다. 한쪽 이마를 감싼 정언은 노이섭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라고 이야기하기 무섭게 이섭이 아아 네, 하며 반가운 기색을 했다.
“저희 팀 피디가 만나 뵈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취재 중에 조창식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타살 정황이 확실하다고 해서요. 저희 측에서 의심 가는 부분이 있어서 팀장님한테 정보를 좀 제공하면 어떨까 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재희 피디님한테 아침에 얘기 잠깐 들었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든지, 아니면 피디님이 이쪽으로 오시든지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새 재희가 언제 또 여기 연락을 해 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도깨비 같은 인간,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말을 이었다.
“부검 오전 중에 진행된다고 들었습니다. 부검 결과 나오면 더 확실할 것 같은데, 오늘 저녁이나 내일 오전 중에 뵐 수 있을까요?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언제든 가능합니다.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정언이 전화를 끊자 곁에서 그새 녹취 파일을 들어 봤는지 윤이 이쪽으로 몸을 내밀며 물었다.
“이희경 씨한테 서온에서 이렇게 전화를 걸었다는 거예요? 이거 완전 협박 같은데요?”
“응. 애들 다니는 어린이집에도 삼촌이라는 사람이 전화해서 자기가 이희경 씨랑 사이가 안 좋은데 조카들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다고, 찾아가면 5분만 보여 줄 수 있냐고 그랬대. 이희경 씨가 불안해서 당분간 친정 언니 집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바로 그렇게 하라고 했어. 수아가 요새 상태가 좀 안 좋아서 상담 치료도 받고 있다고 하고.”
“그래요?”
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윤이 말했다.
“이 천승욱이라는 사람 누군지 일단 알아볼게요. 이희경 씨 혹시 경찰 쪽에 신변 보호 요청 같은 거 할 수 없어요?”
“당장은 범죄 피해가 증명 안 돼서 힘들 거야. 어린이집이 이런 거에 아주 민감하니까 그쪽으로 우선 경찰 신고 넣게 하고, 녹취 있으면 받아서 우리가 아는 목소리가 있는지 비교해 보자고.”
윤이 네, 하고 대답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재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얼굴이 좋지 않았다.
“다들 회의실로 잠깐 들어와. 할 말 있으니까.”
재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로 향했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 서둘러 재희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눈으로 인원을 확인한 재희가 팔짱을 끼었다.
“앞으로 별도 지시 있을 때까지 당분간 취재 관련 자료는 절대 사무실에 두지 마. 중요한 자료는 반드시 사본 만들어서 팀 전원이 가지고 있도록 하고. 회사 컴퓨터에 개인 자료 있는 건 저장장치 따로 해서 다 옮기고, 공유 폴더에 있는 인코딩된 파일이나 프리뷰 파일 같은 건 작업 끝나는 대로 바로 삭제해. 팀별로 공유해야 할 사항 있으면 개별 웹하드나 클라우드 사용하고, 비밀번호는 절대 유출 금지야.”
언제나 보안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의 조치를 얘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예준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재희를 쳐다보았다.
“그럼 회사에 뭐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말란 얘기예요?”
“맞아. 회사 컴퓨터에는 기획안이든 취재 관련 자료든 단 하나도 남겨 놓지 말고 싹 지워. 민감한 내용 있는 문서는 전부 파쇄하든지 가져가고. 특히 정부 관련된 아이템 했던 건 더 신경 써서 관리해야 돼. 제보자 명단이나 신변보호 안 된 영상도 마찬가지야.”
“누가 우리 사찰한대요?”
예준이 반신반의하며 물은 말에 재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 높아.”
“에이, 진짜로?”
“나 장난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불편하겠지만 당분간 그렇게 하자고. 그리고 종편본 나오면 서버 올리고 반드시 여러 군데 백업해. 얼마 전부터 시보국 프로그램마다 방송 전에 서버에 종편본 파일 올려 둔 거 삭제되는 일이 몇 번 있었대. 오류인 줄 알았는데, 정부 비판적인 아이템 들어가면 무조건 삭제돼서 방송 펑크 날 뻔한 적 있었다니까 누가 고의로 지우는 것 같아.”
“부장급 이상 아니면 삭제 권한 없잖아요, 그거.”
정언이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끼어들자 재희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 위에서 지운다는 뜻이지. 생각나는 사람들 몇 명 있잖아. 그리고 중요한 기밀 사항은 되도록 사무실 밖에서 얘기해. KTBC 쪽에서 들은 건데, 걔들 노조 회의실에 도청기 설치해서 회의 내용 유출됐다고 하더라고.”
“와, 나 모르는 사이에 타임머신 탔냐? 지금 5공 시대야?”
질색을 한 찬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쓴웃음을 뱉은 재희가 지혁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 피디가 사무실 전체 PC 백업하는 거 도와줘. 작가들도 구성안 쓴 거랑 프리뷰 파일, 섭외 명단, 제보자 명단 이런 거 다 꼼꼼하게 챙기고. 한 작가님이 전체적으로 좀 봐 줘요.”
“이거 뭐 완전 레지스탕스구만. 야 강재희, 이왕 레지스탕스 된 거 어디서 총 좀 못 구해? 내가 아주 대가리 다 쏴 버리고 구국의 영웅 좀 돼 보게.”
농담이었으나 전혀 농담 같지 않은 얼굴로 현진이 내뱉었다. 그 말에 재희가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두고, 일단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나라 한 번 구해 봅시다. 해산.”
팀원들이 웅성거리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정언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마지막에 재희와 둘만 남았을 때, 정언이 팔짱을 끼며 심각한 표정으로 재희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 들었어요? 위에서 뭐라고 해요?”
재희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한 얼굴로 잠깐 망설이다 곧 고개를 가로젓고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일단 우리 쪽에서는 서 피디 건 무조건 사수할 거야. 국장님하고 이따 얘기하기로 했으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할게.”
“알겠어요.”
“몸조심하고.”
뭘 알고 하는 말일 리는 없었으나 제풀에 놀란 정언은 움찔했다. 다행히 재희는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서둘러 회의실을 나온 정언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재희가 이 건은 무조건 사수한다고 말한 건 그만큼 중요한 방송이라는 뜻이었다.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희경과 두 아이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본 정언은 이마를 감싸며 잠시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