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채 몇 분도 지나기 전 국장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정언이 얼굴을 내밀었다.
선경이 손가락을 까딱여 정언에게 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정언은 재희의 곁에 앉았다. 선경이 미소를 지었다.
“정언, 얼굴 오랜만에 보네. 잘 지냈니? 왜 이렇게 말랐어?”
“아닙니다, 마르긴요. 국장님이 항상 신경 써 주시는 덕분에 잘 지내는데요.”
정언이 깍듯하게 대답하고는 슬쩍 선경의 표정을 살폈다. 왜 자신을 여기 불렀는지 가늠해 보려는 듯했다. 선경이 펼쳐진 파일을 정언 앞으로 밀어 두었다.
“정언이 직접 나한테 지금 이 내용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브리핑해 봐.”
아주 중요하거나 민감한 사안이 아닌 이상, 선경이 승인한 기획안의 취재 진행 내용을 따로 들으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기획안만 본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내용이었기에 선경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정언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정언은 토를 달지 않고 즉시 선경에게 지금까지 알아낸 사항들을 설명했다. 나름대로는 짧게 요약한다고 하는 것 같았으나 내용 자체가 워낙 방대했기에, 설명을 마치는 데는 거의 삼십 분 가까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선경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정언의 이야기에 아주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언이 말을 마치자 선경은 팔짱을 끼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그러면 취재 초기에 심석건이 재희 불러오라고 그 난리를 칠 때부터 위에서 이미 이 건에 대해 주시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아마 그랬을 겁니다.”
정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경이 말을 이었다.
“그때 이미 에서 뭐 캐기 시작했다는 거 안 건데,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본 모양이네. 재희가 평진 변호사까지 만나 봤다면 그쪽에서 당연히 얘기 들어갔을 테니 입 막을 필요성 느꼈겠지. 당내 경선 레이스 곧 시작될 텐데 엄대진한테 치명적인 얘기는 반드시 막아야 하니까.”
재희는 그 말에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다이렉트로 저희 팀부터 박살내는 게 편할 텐데, 뭐 하러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죠?”
“어차피 걔들 최종 목표는 시보국 자체를 없애는 거니까. ‘시사강국 YBS’라는 이름 자체가 싫은 거거든. 시사 프로에 대한 시청자들 신뢰도, 시청률, 영향력 전부 다른 방송국하고 비교 안 된다는 거 알잖아. 그런데 재희처럼 이름 알려진 피디 있는 간판 프로그램 셔터 내리는 건 부담 커. 눈에 바로 보인단 말이야. 뉴스 논조는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지만 는 다르지. 강재희 어떻게 제거할지 위에서도 머리 엄청 굴리고 있을 거야.”
선경은 이 부분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온 사람처럼 즉각 대답했다. 재희는 잠시 침묵했다. 의 본질이 강재희의 팀, 강재희의 시선, 강재희의 언어에 기반을 둔다는 데 이견을 갖는 팀원들은 없었다. 지금의 정체성을 만들어 온 것도, 그걸 유지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강재희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재희는 자기 한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가 무너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누군가 인위적으로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위에서 강재희를 없애려고 든다는 건 곧 강재희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같은 상식으로 말하는 모든 팀원들을 없애려고 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선경이 나지막한 한숨을 뱉었다.
“나름대로는 머리 쓰는 거지. 시보국 팀들은 전부 유기적으로 돌아가니까, 먼저 시청률 낮고 존재감 작은 팀부터 없애면서 하고 를 고립시킨다. 그리고 예정한 대로 싹 물갈이하고 문 닫게 만들면 그 이후는 끝. 시사보도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명무실해지는 거지. 그러면 원하는 대로 시보국 없애고 구색 맞추는 뉴스만 남겨서 자기들 입맛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까.”
선경의 상황 판단은 정확했다. 놈들은 개미를 잡기 위해 집 전체에 불을 질러 버리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사보도국을 폐지하고 교양국에 통폐합한 뒤 뉴스 센터만을 남겨 운영할 거라는 소문을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치부했지만, 결국 궁극적인 목표는 거기 있음이 분명했다.
시사보도국의 정체성을 완전히 빼앗고 껍데기만 남기는 것, 앵무새처럼 권력의 언어만을 반복하는 스피커를 만드는 것.
“국장님, 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템 무조건 방송할 겁니다.”
정언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웃음기 없는 얼굴은 결연했다. 재희는 입 안이 문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정언은 지금 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때였다면 재희 역시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에이스 플레이어라도, 심지어 그 손에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들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모두 테이블에 앉아 게임이 시작된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였다. 지금 재희가 두려워하는 건 오직 하나, 정언이 이 게임을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선경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선경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재희는 짐작했다. 선경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는 힘없이 웃었다.
“정언, 지금 내가 이 기획안 승인할 거야. 그런데 그게 방송 내보낼 수 있다는 확답은 안 돼. 어떻게 해야 되겠니? 어떻게 해야 위에서 최소한 이거 방송할 때까지만이라도 우리가 자리 지킬 수 있겠어?”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세 사람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돌아갔다. 고작 몇 분이었을 테지만 거의 영원처럼 느껴지던 그 침묵을 깬 건 정언이었다.
“절대로 입을 막을 수 없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무슨 수로?”
선경이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정언은 그런 선경을 마주 보았다.
“여론이 한 번 시작되면 권력으로 막기 힘들죠. 방송하자마자 실시간 검색어 뜨는 세상이니까요. 위에서 포털 사이트 아무리 조작하고 여론 호도한다고 해도, 일단 흐름을 타면 거기 관련된 모든 보도 절대로 하지 말라고는 못 하잖아요.”
“그 여론을 어떻게 만들 건데?”
“가 저희 백업하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마자 멈칫한 재희는 서 피디, 하고 정언을 불렀다. 가 시사보도국의 간판이라면 메인 뉴스인 는 기둥이었다. 가 아무리 간판 프로그램이라 한들, 메인 뉴스 팀보고 이쪽을 백업하라는 건 주객전도였다.
더구나 매일 후속타를 터트릴 수 있는 일일 뉴스가 겨우 주 1회 방송되는 프로그램을 백업한다는 건 이치에도 맞지 않았다.
선경이 손을 들어 재희를 막았다.
“계속 얘기해 봐.”
“하청업체 소속이었던 제보자가 현장 자재 문제 있다는 거 저희한테 제보했습니다. 경기도 임대주택 현장이고, 서온건설이 지금 시공 방식하고 자재 전부 속이고 있다고요. 저희가 이 제보 바탕으로 진송신도시 현장에도 같은 문제 있다고 짐작했고, 실제로 선배하고 저희 팀 김윤 피디가 이미 그거 확인했습니다. 제보 받은 현장에서도 팩트 확인 당연히 가능할 겁니다.”
“에 이 소스 주고, 임대주택 부실공사로 서온건설 치라는 거야?”
선경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자 정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온건설이 수주한 임대주택 전국에 상당수 있습니다. 부실공사 문제에 포커스 맞추고 에서 공사 수주 과정, 감리 문제, 자재 문제 전부 엮어서 연속으로 치는 거죠. 프리미엄 라인에서도 같은 문제 있고, 자재에 인체 유해성 있다는 거 알려지면 비난 절대 못 피합니다. 서온 브랜드 스타일하우스 선호하는 거 주로 젊은 사람들이니까요. 당장 방송 나가면 바로 전국 스타일하우스 주민 커뮤니티며 맘카페부터 뒤집어질 걸요.”
“가 그렇게 선빵 날리고 가 그 사태의 근원지가 어딘지 까발리겠다?”
“네. 입 막을 시간 안 주고 바로 치는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재희는 미간을 문질렀다.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최악의 상황이고, 상대가 절대 권력이라 해도 독재 정권 시절처럼 모두의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지금처럼 조금씩 조직을 잠식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말이 없던 재희는 정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서 피디, 그거 완전 도박이야. 실패하면 둘 다 죽는 거 알잖아.”
“가만히 앉아 있어도 둘 다 죽기는 마찬가지잖아요. 손 놓고 당하는 거 체질 아니에요.”
정언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생각에 잠겨 있던 선경이 입을 열었다.
“재희 말이 맞아. 이거 엄청나게 위험한 도박이야. 여론이라는 거, 아주 다루기 힘들다고. 남한 인구가 5천만인데 그 사람들 전부가 나하고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묻힐 수도 있고, 역풍 맞을 수도 있을 거야. 그거 다 감수하고 덤비겠다는 거지?”
“에서 거절 안 한다면요.”
“나하고 사장님이 그렇게 오래 못 버텨. 그 안에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고 없고가 어디 있습니까, 해야 되면 무조건 하는 거죠.”
정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웃고는 몸을 일으킨 선경이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들고 내선번호를 눌렀다. 어디로 전화를 건 건지, 선경은 곧 지금 올라와, 하고 짧게 내뱉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