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노크 소리가 들린 건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건 사회부 전한동 부장이었다.
먼저 와 있는 재희와 정언을 발견한 한동이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니들이 여기 웬일이냐, 하는 무언의 메시지에 재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여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한동이 조심스럽게 재희의 곁에 앉자 선경이 한동을 마주 보았다.
“한동, 지금 사무실 분위기 어때?”
“엉망진창이죠, 뭐. 다 아시면서 왜 묻고 그러십니까, 마음 아프게.”
한동이 반 농담처럼 대꾸했다. 하기야 하루아침에 인사위가 갑작스러운 통보와 함께 팀을 아주 박살냈으니 분위기가 좋을 리 만무했다. 선경은 몸을 앞으로 조금 내밀며 한동을 가만히 응시하다 물었다.
“너는 회사가 중요해, 자리가 중요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진 말에 한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경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잠깐 사이를 둔 한동은 곧 정색을 했다.
“국장님, 실망입니다. 제가 국장님 밑에서 얼마나 굴렀는데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저 그렇게 안 배웠습니다. 상황 이렇게 됐다고 저 떠보시는 겁니까?”
농담으로 다들 무당 아니냐고 할 정도로 감이 좋은 한동이었다. 그 눈치로 선경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까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선경이 팔짱을 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너 기자 인생 최대의 오점이 뭐야?”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인 듯, 한동이 이번에는 정말 당황한 얼굴을 했다.
“진짜 애들 앞에서 왜 이러세요.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잘못한 거 없으니까 대답을 해 봐.”
“아니, 서온건설 게이트인 거 아시잖아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데요.”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투였다. 실패하는 법이 없었던 한동에게 서온건설 게이트는 최대이자 유일한 오점이었다. 시사보도국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너 그러면 정언하고 같이 걔들 뒤통수 한 번 쳐 볼래?”
“네?”
“정언, 직접 설명해 줘. 어떻게 할 건지.”
선경이 정언에게 슬쩍 턱짓을 했다. 정언은 자신의 계획을 한동에게 얘기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정언의 말을 듣고 있던 한동이 약간 찡그린 눈썹 위를 긁적였다.
“우리가 선발대로 까라? 그 제보 얼마나 확실한데?”
“백 퍼센트요.”
정언은 즉시 확답했다. 한동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는 소리를 냈다.
“이거 뭐 니들 위아래도 없는 놈들인 건 진작 알았지만 선배보고 백업을 하라니…… 어디 가서 아주 혼나려고 작정을 했지?”
“부장님, 제가 설마 공 혼자 먹겠습니까? 지금 60분이 아니라 600분짜리 방송할 수 있을 정도로 소스 넘치도록 많아요. 저희가 이 방송 내보내고 나면 나머지 엄대진 관련 소스 전부 부장님 드리겠습니다. 벌써 허주경 사장 접대 장부 선배가 공유해 줬다면서요. 그것만 터트려도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특종인 거 아시잖아요.”
“야, 서정언. 너 같은 놈이 제일 위험한 놈이야. 새파란 게 벌써부터 부장 앞에서 특종 가지고 쇼부를 쳐? 내가 그런 거에 제일 약하다는 거 뻔히 알면서?”
한동이 짐짓 화를 내며 정언에게 삿대질을 했다. 정언이 씩 웃자 한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가지고 딜 하면 내가 어떻게 빠져나가냐?”
“저 죽어도 이 방송 하고 죽을 겁니다. 그러니까 부장님이 저 좀 도와주세요.”
“살날이 구만 리 같은 놈이 말하는 꼴 봐라, 죽긴 왜 죽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정언의 이마를 한 대 쥐어박은 한동이 한숨을 쉬고는 선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국장님, 애초에 얘들하고 다 짜고 저 끌어들이신 거 아닙니까. 제가 이러면 어떻게 거절을 합니까?”
“거절할 생각 있으면 지금 해도 돼.”
선경의 말에 한동이 손을 휘적거리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우, 자존심 상해서라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백업하고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올해의 언론인상은 제가 가져가야죠. 재주는 곰이 부린다니까 저는 왕 서방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잘 생각했어. 가 먼저 서온 정조준하는 거야. 헛발질 안 할 자신 있지?”
“저도 두 번은 안 당합니다.”
“서온이 지금까지 수주한 임대주택 수량이 상당하니까, 자재하고 공법 전부 속이고 건설해 왔다는 거 터지면 사회적으로 파장 클 수밖에 없어. 기본권 관련된 문제기 때문에 터트리면 위에서 서온건설 언급 절대로 못 막아. 한동이 먼저 훅 치고 후속보도 계속 내보내면서 정언이 스트레이트 먹일 수 있게 드라마 쓰라고. 내가 자리 지키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가드 칠 거니까. 할 수 있겠어?”
한동이 그 말에 킬킬 웃었다.
“국장님, 할 수 있겠냐니요. 저 이래봬도 부장입니다. 새파랗게 어린것들 앞에서 너무 먹이시는 거 아닙니까?”
“좋아. TF팀 만들고 너희 팀에서 정보 유출한 거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놈들은 전부 배제해. 한동이 제일 믿는 애들, 절대 변절 안 할 애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애들만 골라서 최소 인원으로 가는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직접 체크하고. 정언 방송 날짜 맞춰 터트릴 시기 조정하자고. 여론몰이하려면 최소한 3연타는 필요할 테니까 일정 잘 계산하고, 재희랑 정언이 한동한테 필요한 자료 전부 공유해 줘. 시간 없어. 바로 작업 들어가. 당장 내일 상황 어떻게 변동될지 모르니까.”
선경이 정언의 기획안에 사인을 하고는 파일을 덮어 재희에게 돌려주었다. 그 파일을 받아든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두 사람도 재희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선경에게 인사를 하고 국장실에서 물러나오기 무섭게 한동이 허리에 두 손을 짚으며 정언과 재희를 번갈아 보았다.
“아주 이것들이, 내가 제일 만만하지?”
“지금 상황에 만만한 사람한테 이런 부탁을 어떻게 합니까?”
정언이 되물었다. 한동이 으이구, 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말이나 못하면. 하여튼 너 그럴 땐 아주 애비랑 똑같다, 똑같아.”
“그 말씀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칭찬이지 그럼, YBS 창사 이래 전한동 다음으로 대단한 기자랑 똑같다는데. 서정언 너 먼저 내려가서 자료 준비 좀 해놔. 내가 바로 가서 볼 테니까.”
네, 하고 대답한 정언이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 발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듣고 있던 한동이 팔짱을 끼며 재희를 쳐다보았다.
“너 이거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고 하는 거야?”
“제가 그거 모르고 동의했을까 봐서요?”
재희가 가볍게 대꾸하자 한동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한동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거 먼저 터트린다 치자. 그래서 플랜대로 여론 난리 난다 쳐. 그러면 너희가 예고편이나 내보낼 수 있겠어? 경선 레이스 곧 시작돼. 엄대진이 자기하고 연관된 건 무조건 다 막으려고 들 거라고. 우리가 훅 친다고 해도 니들이 스트레이트 먹일 틈은 나오겠냐?”
“그럼 다른 방법 있습니까?”
“야, 강재희 인마.”
“서 피디가 이 방송 죽어도 해야겠다고 하는 거 보셨잖아요. 한 입으로 두말 안 하는 애예요. 죽어도 하겠다는 건 목숨 걸고 한다는 소립니다. 서 피디도 거기까지 생각 안 하고 이런 제안을 했겠습니까?”
재희는 방금 자신이 한 말에 퍼뜩 차가운 불길함 같은 것을 느꼈다. 죽어도 하겠다는 건 목숨 걸고 한다는 소립니다…… 정언이 한 번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뿐 아니라 누구라도 말릴 수 없다는 걸 재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엄대진에 청와대가 아니라 누구라도 정언의 의지를 꺾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이 회유도 협박도 통하지 않는 상대를 침묵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방법. 그게 뭔지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올해의 언론인상 꼭 가져가게 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죠.”
재희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한동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두어 번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재희는 말없이 천천히 바뀌는 숫자에 눈을 주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허락된 것일까. 정언은 재희가 아는 모든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승부사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패배를 생각하지 않는 유일한 플레이어. 정언이 목숨을 걸고 뛰어든 이 판이 모두의 마지막 게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건 반드시 시작되어야 할 게임이었다. 그 대가가 무엇이더라도.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