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25.
영등포경찰서 근처의 카페에 정언과 마주 앉은 윤은 생각에 잠겨 있는 정언을 흘끔 보았다. 오후에 재희와 함께 잠시 국장실에 다녀온 정언은 사회부 전한동 부장과 회의실에서 몇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냐고 물어보자 정언은 이따가,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노이섭 팀장과 만나기로 하고 경찰서 앞 카페에 도착한 지 근 이십 분째였으나 정언은 영 운을 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려던 윤은 결국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정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응.”
퍼뜩 현실로 돌아온 정언이 창가에 두었던 시선을 윤에게 돌렸다.
“아까 전 부장님하고 무슨 얘기 하신 건데요?”
“하고 양동작전하자 그 얘기였어. 우리가 신병민 씨한테 받은 제보 에서 갖고 여론전 가자고. 먼저 그쪽에서 임대주택 부실공사 건 터트려서 서온건설 까발리는 분위기 시작되면 우리가 바로 후속타 치는 거지.”
기다린 것치고 지나치게 간단한 대답이었으나 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게 가능해요?”
“모르지. 아무도 이런 식으로는 해 본 적 없으니까. 모 아니면 도야. 어차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방송 못 할 건 확실하니까, 뭐라도 한 번 해 봐야 될 것 같아서.”
정언의 표정은 담담했다. 위험한 도박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정언이라고 그런 부분을 모를 리 없었다. 하기야 그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는 그냥 기다려 봐야 알아서 모가지 헌납하는 꼴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았다.
오전에 올라왔던 계약직 기자 채용 공고는 선경의 지시로 곧 내려갔고, 팀에 대한 인사위 재심을 청구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으나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락 늦으시네요.”
시계를 본 윤은 말을 돌렸다. 정언이 그러게, 하고 무심하게 거들며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다시 한 번 팔락거렸다. 조금 전 김정환 교수가 보내 준 조창식 관련 자료였다. 최종 부검 보고서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 전에 미리 구두로 부검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 것이었다.
결정적인 사인은 예리한 흉기에 의한 흉부 자창으로 보이며, 상처는 외날 흉기에 의한 것과 양날 흉기에 의한 것 두 종류로 분석된 상태였다. 후두부에 둔기로 인한 3cm 가량의 타박상이 관찰되었고, 손과 팔에 방어흔이 상당수 남아 있다고 되어 있었다.
김정환 교수는 먼저 후두부를 가격당한 조창식이 돌아서서 방어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최소 두 명 이상의 범인들이 짧은 시간 사이에 조창식을 칼로 찔러 살해한 것으로 추측한다고 부연했다.
정언은 뚜껑을 닫은 펜 끝으로 종이 위의 한 부분에 원을 그렸다. ‘상처의 형태나 위치로 보았을 때 범인들은 살인 경험이 있거나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인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적힌 첨언 부분이었다.
“조폭이면 이런 일에 익숙하긴 하겠네요.”
정언의 펜 끝을 따라 눈을 두고 있던 윤의 말에 정언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그때 정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정언은 바로 전화를 받아 네, 네, 하고 대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정언은 카페를 나서며 경찰서로 향했다. 정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남자가 두 사람을 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노이섭입니다. 서정언 피디님 맞으시죠? 김윤 피디님은 제가 만났고.”
“아, 네.”
“연락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일이 좀 있어서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이섭이 두 사람을 경찰서 안으로 안내했다. 강력형사팀 사무실로 들어선 이섭은 구석의 탁자 앞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윤은 소란스러운 사무실 안을 슬쩍 둘러보고는 이섭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섭이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정언을 마주 보았다.
“우선 저희가 상부에 이 건에 관해 보고를 드렸습니다. 위에서 도움은 드리되, 해결 전까지 엠바고(embargo)17) 걸었으면 한다고 말씀하셨고요.”
“알겠습니다.”
정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섭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일단 조창식 방에서 발견된 핸드폰에 대한 통신기록 조회를 했고, 인근 CCTV 화면하고 블랙박스 화면 수거해서 확인중입니다. 저희한테 제보하시겠다는 내용이 뭔지 우선 알 수 있을까요?”
“조창식이 의정부에 있는 경일용역이라는 용역업체 직원인 건 알고 계십니까?”
정언의 물음에 이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용 기록이 전혀 없던데요.”
“조창식이 진송신도시 서온건설 현장에서 계장으로 있었습니다. 저희가 취재 중에 행적을 추적하다가 사망 사실을 알게 된 거고요.”
“다른 사건에 연루돼 있습니까?”
“해당 현장에서 현장 과장이 추락사한 사건이 있었는데, 조창식이 그 사건의 주요 증인입니다. 의정부경찰서 소관인데 해당 서에서는 자살로 처리했습니다.”
정언의 말을 듣고 있던 이섭이 눈썹을 약간 추켜세웠다.
“자살인데 조창식이 주요 증인이라고요?”
“자살로 볼 수 있는 정황이 뚜렷하지 않아요. 조창식이 최초 발견자인 데다 저희는 경일용역 측이 그 사건에 관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조창식 사망에도 경일용역이 분명히 관련돼 있을 겁니다.”
“경일용역이 뭐하는 회사입니까?”
“불법 용역 업체고 서온건설하고 오래 전부터 같이 일해 온 곳이에요.”
정언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온 자료들을 꺼내 이섭에게 내밀었다. 과거 기사들과 동영상 캡처 등을 프린트한 것이었다.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그 자료들을 읽고 있던 이섭이 고개를 들었다.
“조폭들 쓰고, 뭐 그런 데인 겁니까?”
“손경일이라는 사람이 대표인데, 이 사람이 포항 폭력조직인 황구파에 있었어요. 저희는 손경일이 서울로 기반을 옮기면서 경일용역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자기 사람들을 데려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섭이 그 말에 멈칫하며 어어, 하고는 손을 들어 정언의 말을 멈추게 했다.
“아니, 안 그래도 저희가 신원조회 해 봤는데 조창식이 전과 12범이더라고요. 포항 출신이고요. 피디님, 그러면 우선 저희가 CCTV 화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는 얼굴 있는지 확인 좀 해 주세요.”
잠시 자리를 떴던 이섭이 바로 노트북을 가지고 돌아왔다. 파일 수십 개가 들어 있는 폴더를 연 이섭이 마우스로 파일 하나를 확인해 열었다.
“이게 연립 있는 골목에 설치된 CCTV입니다. 이 집으로 들어가려면 이 앞을 무조건 지나야 돼요. 보름에서 20일 정도 전에 사건이 일어났다, 이렇게 봤기 때문에 저희가 해당하는 날짜 파일은 전부 가져왔습니다. 연립 주민 제외하고 드나든 사람 중에 저희가 유력한 용의자로 보는 게 얘들입니다. 밤 12시 45분에서 50분 사이에 남자 한 명이 먼저 들어가고, 그다음에 한 명이 또 들어가거든요.”
정언이 노트북 키로 영상을 몇 번 앞으로 감아 보다 갑자기 화면을 멈췄다. 앞뒤로 화면을 돌려 보던 정언이 윤에게 모니터를 가리켰다.
“김 피디, 이 사람 낯익지 않아?”
윤은 그 말에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정언이 화면을 확대했다. 새벽 시간이라 전체적으로 어두워 형체가 완전히 또렷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면 속에 서 있는 남자는 정언의 말대로 분명 눈에 익은 느낌이었다.
체형이나 머리 스타일, 얼굴의 윤곽 같은 것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때 윤의 뇌리를 스친 건 경일용역 사무실에서의 일이었다. 경일의 전화를 받고 올라온 남자 중 하나가 정언의 머리채를 낚아챘던 일이 떠올랐다.
그걸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눈이 확 돌아가 멱살을 잡고 밀어붙이기까지 했던 터라, 그 얼굴을 잊어버릴 리가 만무했다. 키가 작고 체격이 다부지던 남자였다.
[다음 편에 계속….]17) 엠바고(embargo) : 취재원과의 합의를 통한 보도 시점 제한 요청 관행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