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재포장도 안 하고?”
“감사에서 안 걸릴 자신 있는데 뭐 하러 돈 들여 재포장하는 수고를 해. 관청에 돈 좀 먹이면 그만인데.”
“세상 정말 쉽게 사네, 다들. 우리만 이러고 사나 봐.”
투덜거린 정언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때 회의실 문을 노크하더니 성옥이 머리만 쏙 들이밀었다.
“정언 피디님, 지금 경찰서에서 전화 왔는데요. 핸드폰을 안 받으신다고…….”
“경찰서?”
느슨하게 앉아 있던 정언이 뒤를 돌아보았다. 핸드폰이 든 가방을 자리에 던져두고 들어와 전화가 온 걸 몰랐던 듯했다. 정언이 몸을 일으키며 성옥에게 물었다.
“영등포경찰서래?”
“아뇨, 마포서요. 강력 4팀 박동찬 형사님이라는데요. 오피스텔 빈집털이 범인 CCTV 확보했다고 연락 달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정언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 생각 없이 자료에 눈을 두고 있던 민혜와 재희가 순간 고개를 번쩍 들며 정언을 쳐다본 탓이었다. 윤 역시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성옥이 다시 고개를 빼며 문을 닫았다.
“오피스텔 빈집털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재희가 뭔가 직감한 듯 즉시 정색을 하며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정언이 아이 씨, 하고 눈썹 위를 문지르다 대답했다.
“집 털렸거든요. 퇴근하고 들어갔더니 문 열려 있어서…….”
“어머, 어머 미쳤어. 언제?”
민혜가 정언의 팔을 찰싹 때리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언이 아야, 하고 얻어맞은 팔을 문질렀다.
“며칠 됐어요.”
“집에 누구 다른 사람 없었어? 범인 본 거야? 아무 일 없었어?”
민혜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 냈다. 정언이 뭐라고 해명하려는 듯 그게, 하며 입을 열었으나 재희가 바로 말을 끊었다.
“그때 서 피디 혼자 있었어? 그걸 왜 여태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해? 누구한테라도 연락을 했었어야 할 거 아냐!”
재희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저하던 윤이 서둘러 재희에게 말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선배가 제 차에 핸드폰을 두고 가셔서 그거 갖다드리러 갔다가 문이 열려 있어서…….”
“김 피디가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고?”
재희가 되물었다. 윤이 네, 하고 대답하자 재희가 짧은 한숨을 뱉었다. 잠시 말이 없던 재희가 다시 정언에게 물었다.
“서 피디, 없어진 물건 뭐 있었어? 범인이 안에 있었다는 거야?”
“그런 건 없었어요. 사람도 없었고.”
“그냥 빈집털이 아니라는 거 의심 안 했어, 그럼?”
정언이 안심시키려는 듯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으나, 도리어 그게 재희의 화를 더 돋운 듯했다. 재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취재 중에 그런 일 생겼으면 바로 보고를 했었어야지! 그리고 그런 일 있었는데 계속 거기서 지내? 지금 제정신이야? 안일한 것도 정도가 있어! 김 피디한테 이거 단순한 빈집털이 아닐 거라고 조심하라고 얘기했어, 안 했어?”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정언이 입을 다물자 재희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정언을 다그쳤다.
“그게 진짜 협박이면 서 피디한테만 그러고 말 것 같아? 송 작가하고 김 피디도 전부 타깃 될 수 있는 거 몰라? 의심이 갔으면 최소한 나 아니라 팀원한테라도 먼저 그렇다고 얘기를 했어야지! 아마추어야? 그따위로 굴다 누구 하나 다치면 그때 말하려고 했어? 일 벌어진 다음에는 늦는 거 몰라서 이래?”
“협박이란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얘기를 해요?”
정언이 평소보다 약간 한풀 꺾인 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재희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팩트 확인은 방송 내보낼 때나 해! 심증 있었어, 없었어?”
“확실해지면 얘기하려고 했다니까요.”
“대답 똑바로 안 해? 심증 있었냐고, 없었냐고! 내가 지금 묻고 있잖아!”
“있었어요.”
정언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재희가 정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재희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고 잠시 감정을 누르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테이블 위로 시선을 주고 있던 재희가 윤을 보더니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김 피디는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왜 이 얘기 바로 안 했어? 위험하다는 생각 안 들었어? 그게 협박 아니라 그냥 우연한 범죄라고 생각했더라도 말을 했어야지. 본인이 거기 같이 있었으면 좀 더 현명하게 생각했어야 할 거 아냐.”
윤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재희의 말마따나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바로 보고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정언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데만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도 맞는 말이었다. 윤이 죄송합니다, 하고 겨우 운을 떼자 정언이 바로 말을 끊었다.
“김 피디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김 피디는 잘못 없으니까. 선배한테 말하겠다는 거 내가 못 하게 한 거예요.”
윤은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재희의 시선을 느꼈다. 비난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책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 말만으로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문득 심장 부근이 선뜩해졌다. 곁에 둬서 망가뜨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언을 좋아한다는 재희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자신이 재희의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재희 자신의 말대로 정언을 굳이 여자로 보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그만큼 아끼는 후배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숨기고 있었다면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재희가 눈을 들었다.
“김 피디랑 송 작가도 혹시 신변에 조금이라도 문제 생기면 즉시 보고해. 이번처럼 하루든 이틀이든 숨기고 있을 일 절대 아니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아우, 뭐 CCTV 확인도 안 했는데 그렇게 콩 볶듯 볶아.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지. 나야 남편 있고 애도 있고, 친정 시댁 가까우니까 그렇다 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더 걱정이지 뭐. 정언, 서에서 전화 달랬다며. 나가서 전화하고 와.”
민혜가 서둘러 정언의 등을 떠밀었다. 마지못해 정언이 자리를 뜨자 민혜가 재희에게 눈을 흘겼다.
“말 좀 곱게 해. 마음 알지만 애를 뭐 그렇게 쥐 잡듯 잡니? 정언 성격 몰라? 김 피디야 뭐 정언이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말 못 한 거지. 놀라도 자기들이 더 놀랐을 텐데.”
“성격 아니까 말이 곱게 안 나가는 거 아냐. 자기 혼자 숨기고 있으면 그게 없었던 일이 되냐고. 이런 일 한두 번 아닌데 대처하는 게 안일하니까 내가 화가 안 나, 지금? 무슨 사고라도 났으면 어떻게 하려고?”
재희가 팔짱을 끼었다. 에 온 이래 재희가 팀원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된 윤은 조그맣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피디님. 제 잘못입니다.”
민혜가 펄쩍 뛰며 손을 저었다.
“아니, 김 피디가 잘못한 게 또 뭐가 있어. 김 피디가 정언 집 털었니? 됐어, 됐어. 정언 성격 누가 몰라. 그 성격에 김 피디가 얘기하겠다니까 증거 나올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펄펄 뛰었을 거 안 봐도 알겠어. 그래도 정언이 혼자 안 있었다니까 차라리 다행이다. 안 그래? 말을 하거나 말거나 아무튼 지 혼자 이거 가지고 끙끙대진 않았을 거 아냐. 누구라도 먼저 알고 있었으면 됐지.”
동의를 구하는 민혜에게 재희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송 작가의 그 긍정적인 마인드 참 좋아한다는 거 꼭 알았으면 좋겠네.”
“어머, 그래? 결혼해도 계속되는 이 인기를 어쩌면 좋니? 우리 집에 있는 인간도 이 사실을 알아야 되는데. 강 피디, 우리 남편한테 전화해서 내가 이렇게 대단하고 이 팀에 꼭 필요한 인재이자 만인의 인기녀라는 사실 좀 얘기해 줄래?”
민혜가 두 손을 맞잡더니 한껏 눈을 빛내며 재희를 쳐다보았다. 턱을 괸 재희가 민혜를 마주 보다 한숨을 쉬었다.
“얘기야 백 번, 천 번도 더 해줄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말 돌리는 거 나 아주 안 좋아해. 알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민혜가 손가락질을 하며 재희를 야단쳤다.
“아우, 좀! 까탈스러운 티 그렇게 안 내도 강재희 까탈스러운 거 세상이 다 알아! 누가 집 털리고 싶어 털렸니? 정언도 산전수전 다 겪었어요, 이 사람아! 걔가 열한 살이야? 서른하나야, 서른하나! 강 피디가 하도 팩트 타령을 하니까 확실해질 때까지 말 안 한 거지, 뭐 일평생 숨겼을까 봐 그래? 김 피디만 가시방석 만들고! 그렇게 걱정되면 끼고 살아! 끼고 살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쥐 잡듯 잡아?”
민혜가 더 펄펄 뛰자 재희도 할 말이 없는 듯 잠시 침묵하다 알았어, 하고 조금 누그러진 투로 대답했다. 오 분쯤 지나 정언이 돌아왔다. 민혜가 얼른 정언에게 물었다.
“경찰서에서 뭐래? 범인 얼굴 봤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