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3
13화.
03.
오늘따라 휴게실은 한산했다. 윤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흘끔 보았다. 앞에 놓인 명함 위의 이름 세 글자가 선명했다.
서정언, YBS 시사보도국 3부 PD.
처음 회의실로 들어섰을 때부터 이상하게 낯이 익다고 생각했었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복도에서였다. 정언이 그건 좀 놓고 오죠, 하고 말하자마자 금요일 아침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운전 똑바로 안 합니까?」
낮은 목소리, 또렷한 발성, 정확한 발음. 절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그 말투. 윤이 기절할 정도로 놀란 건 당연했다. 그 순간 윤은 왜 자신이 정언을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느꼈는지도 깨달았다.
방송이었다. 는 스튜디오에 피디들이 직접 나와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시청자였던 윤에게 정언의 얼굴이 익숙한 건 당연했다. 다만 방송을 보면서 피디들의 이름까지는 신경을 쓴 적이 없었고, 방송 때는 메이크업을 하고 나가니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 다시 보니 그날 아침 까닭 없이 위축되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시베리아 벌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냉랭한 얼굴은 가까이서 보니 훨씬 차갑게 느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딜 찔러 봐도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는 인상이었다. 웃으면 훨씬 더 예뻐 보일 텐데, 아예 무표정이 디폴트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서정언입니다. 아까 얘기한 대로, 김 피디가 여기 있는 동안은 내 부사수로 일할 겁니다.”
정언이 짧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연필로 눌러쓴 글씨처럼 또박또박한 발음이 귀에 꽂혔다. 윤은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선배, 말씀 편하게 하시죠. 저, 나이가 어떻게…….”
“초면에 나이부터 묻는 거 아주 고전적이네.”
정언이 즉시 말을 자르자 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빤히 마주 보는 시선이 서늘했다.
“서른하나. 올해 7년 차고.”
냉랭한 분위기치고 대답은 쉽게 돌아왔다. 윤은 아 네, 하고 대답하며 정언에게 슬쩍 눈을 주었다.
서른을 넘긴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묘한 분위기, 만성이 된 듯한 피로감이 결코 녹록하지 않은 첫인상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빈말로라도 접근하기 쉬운 느낌은 아니었다.
정언은 들고 있던 펜을 습관적으로 돌리며 내뱉었다.
“선배 대접 깍듯하게 받는 거 취미 없으니까, 김 피디도 말 놓고 싶으면 놔. 는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는 군기 잡을 시간도 없어서 그런 분위기는 아냐.”
그러나 절대 그렇게 쉽게 말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나이에 이미 7년 차라면 윤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였다.
게다가 설령 자신이 연상이거나 선배였다 해도 편하게 대할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저…… 차는 진짜 수리 안 해도 괜찮으세요?”
“안 괜찮으면 그날 연락했겠지.”
정언이 짧게 대답했다. 얼굴만큼이나 성격도 쿨하기는 한 듯했다. 그 말에 윤은 약간 안도했다. 돌리던 펜을 멈춘 정언이 윤을 마주 보았다.
“2년 차면 교양국에서는 아직 입봉 멀었을 거고, 조연출 업무는 숙지했나? 기획안 쓰는 건 배웠어? 촬영하고 편집은?”
“네, 그 정도는…….”
“그럼 바로 일 시작해도 되겠네.”
아니, 보통 경력직이라도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인수인계 기간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올 리 만무했다.
바로 어제까지 요리 프로그램을 찍다 온 윤이었다. 오늘부터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윤이 그러거나 말거나, 정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들고 온 파일을 앞으로 밀어 놓았다.
“보고 감 오는 거 있으면 하나 골라 봐.”
아무 생각 없이 파일을 펼친 윤은 숨을 멈췄다. 첫 장부터 12년 전 미제 토막 살인사건 관련 기사였다. 윤은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천천히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살인, 방화, 사기, 성폭행, 뇌물, 비리, 사이비, 다단계…….
눈에 들어오는 단어 중 밝고 희망차고 아름다운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봄철 나물 무침’, ‘냉이된장국과 두부전’, ‘두릅 숙회’ 따위나 매일 검색하던 삶이었다. 호러나 스릴러 따위에는 일평생 취미가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건 실화였다. 기사로 보는 것도 끔찍한데 취재까지 하러 다닐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까마득했다. 자신이 어떤 팀에 떨어진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윤이 얼어붙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물끄러미 윤을 마주 보던 정언이 물었다.
“왜?”
너무 무섭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윤은 최대한 겸손해 보이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저, 아직 잘 모르겠어서요.”
“거기선 뭐했는데?”
정언이 되물었다. 윤은 수많은 요리 연구가들의 연락처와 신혼부부, 피크닉, 아이 도시락, 명절, 술안주 등 각종 TPO에 맞는 요리 이름들 따위가 가득한 자신의 다이어리를 떠올렸다. 그러자 어쩐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다행히도 윤의 머리를 지켜 준 건 그때 급히 휴게실로 뛰어 들어온 여자였다.
“정언, 정언, 나 왔어! 늦어서 미안.”
발랄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숨을 몰아쉰 여자가 정언의 곁에 풀썩 앉았다. 작은 체구에 통통한 얼굴, 자글자글 볶은 머리를 하나로 꽉 당겨 묶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회의실에서는 못 본 얼굴이었다. 서른여섯, 일곱쯤 되었을까.
여자는 자리에 앉은 뒤에야 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윤을 본 여자가 정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설명해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정언이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오늘부터 우리 팀에서 일할 김윤 피디고, 여긴 송민혜 작가님.”
“오늘부터? 우리 팀에서?”
정언의 말을 되풀이한 민혜가 측은한 표정을 했다.
“어머, 세상에. 어쩌다가…….”
민혜가 말끝을 미묘하게 흐렸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말투였다. 그 말투에 더 미묘해진 건 윤의 기분이었다. 민혜와 윤을 번갈아 본 정언이 손을 휘적거렸다.
“뭐가 어쩌다가예요. 겁주지 말고 이거나 좀 봐요. 오후에 선배랑 얘기하기로 했어.”
정언이 민혜의 앞에 파일을 밀어 놓았다. 민혜가 으응, 하며 파일을 펼쳤다. 그러나 민혜는 한 장을 채 넘기지도 못했다.
“아우, 근데 나 모든 의욕을 잃었어. 이렇게 죽어라 하면 뭐하니?”
정언이 한탄하는 민혜를 달랬다.
“왜 또 그래요. 일단 하는 날까지는 열심히 하기로 했잖아요.”
윤은 정언이 민혜에게는 약간 누그러진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아마 오랫동안 같이해 온 콤비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민혜가 곧 정언에게 투정을 부리듯 투덜거렸다.
“애 아빠한테 얘기하니까 아주 좋아 죽으려 그러잖아. 돈은 지가 번다고 이제 집에서 애 좀 보래. 누가 들으면 평소에 지가 애 엄청 열심히 봐 주는 줄 알겠어.”
민혜가 테이블 위에 놓인 파일을 보더니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윤은 민혜가 폐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대화를 듣자 처음으로 자신이 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본격적으로 실감이 났다. 그런 윤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정언이 민혜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작가님 자리 없을까 봐 그래요? 어디서든 다 모셔가지. 하다 굴러온 사람도 여기 있는데 작가님이 그러면 어떡해요.”
“뭐라고?”
민혜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입을 막았다. 자포자기한 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네, 저…… 하다가 왔거든요.”
“왜? 왜? 무슨 사고 쳤어요? 어머, 세상에. 어머머.”
민혜의 반응을 보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한층 더 명백해, 조금 전보다 약간 더 괴로워졌다. 윤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허벅지를 뜯었다. 측은함인지, 한심함인지 얼른 분간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윤을 보던 정언이 다시 파일 위를 두드렸다.
“그니까 그만하고 뭐 할지 고민 좀 해 보자고.”
“오후에 강 피디랑 얘기할 거면 빨리 골라야겠네. 나도 몇 개 가져온 거 있는데. 참, 정언, 이거 봐봐.”
민혜가 자기 가방에서 프린트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정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제보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거든. 근데 며칠 전부터 거의 매일 올라와. 묻힐까 봐 그러는 거 같더라고. 촉이 와서 한 번 보라고 가져왔어. 김 피디도 같이 봐요.”
민혜가 정언과 윤에게 종이를 한 장씩 건넸다. 그리 긴 글은 아니었다. 별생각 없이 글을 읽기 시작하던 윤은 도중에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홍제동에 사는 두 딸의 엄마 이희경이라고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 보조 교사로 일하고 있는 평범한 주부입니다.
제 남편의 이름은 박규형입니다.
2월 3일 새벽, 제 남편은 신도시 공사 현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습니다. 아무도 없는 사이 건축 중인 아파트 건물에 올라가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회사에서는 남편이 격무와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해 자살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 남편은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닙니다. 남편은 건강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가장이기도 합니다.
경찰도 회사의 주장만 믿고 손을 놓고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가 저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부탁드립니다.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윤은 글 말미에 함께 올린 한 장의 사진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너덧 살쯤 먹었을 듯한 두 딸과 부부의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가족은 단란해 보였고, 모두가 어떤 불행도 예감하지 않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민혜가 다른 종이 한 장을 밀어 놓았다. 짧은 인터넷 기사를 프린트한 것이었다.
“찾아보니까 기사가 있긴 있더라고. 진송신도시 개발 현장이고, 남편이 다니던 회사는 서온건설인가 봐. 건설 중인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는데 유서도 없고 가족들한테 무슨 메시지 같은 것도 안 남겼대. 회사에서는 일단 근무 시간 초과가 많았다는 부분을 인정해서 산재 처리 할 거고 보상금은 별도로 지급하겠다고 했다더라고.”
윤은 눈으로 그 기사를 읽었다. 민혜의 말대로였다. 날짜를 보니 박규형이 죽은 다음 날의 기사인 듯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정언이 팔짱을 끼었다.
“과로로 스트레스가 심했으면 집에서 그런 부분은 눈치챘을 거 같은데, 부인이 매일 글 올릴 정도면 진짜 뭐가 억울해서 그런가?”
“그치. 나도 우리 애 아빠 피곤하고 힘든 거 보면 아는데…… 그렇게 죽을 생각을 할 정도로 몰렸으면 진짜 쇼윈도 부부거나 하지 않은 이상은 부인이 알지 않았을까?”
“가족이 죽으면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하잖아요.”
“응, 그렇긴 한데 회사에서 너무 순순히 산재를 인정해 준 것도 좀 맘에 걸려. 이런 경우에 산재 인정받으려면 보통 법정 싸움은 가야 되잖아. 근데 회사에서 바로 그래 알았다, 이런 적이 있었나? 요새 이런 경우에 산재로 인정하는 판례가 좀 있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상해. 서온건설 작년에 현장에서 사망한 인부 사건 있는데 이거 하청업체 직원이라 산재 인정 못 해준다고 아직 소송중이잖니.”
민혜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정언이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기울였다.
“본사하고 하청 차이인가? 근데 하청을 그렇게 취급하는 애들이 본사 직원이라고 잘 해주는 꼴 아직 못 봤는데.”
“그치? 이거 이상하지?”
“회사에서 빨리 덮고 싶은 이유가 있었나? 요새 사내 왕따 심각하니까 그런 문제일 수도 있겠네. 아니면 현장 과장이었다니까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정언이 갑자기 윤에게 물었다.
“김 피디는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