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정언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눈썹 위를 긁적였다.
“같은 라인하고 아래층 탐문했는데 바로 아래층 사람이 그날 오후 세 시쯤 너무 시끄러워서 경비실에 한 번 연락했었대요. 원래 출근하는 사람인데 연차 내고 집에 있다가 위층에서 이사하는 것처럼 계속 쿵쿵거리니까 뭔가 했나 봐요. 그 시간대 CCTV 확보했다고 와서 확인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혹시 지금 잠깐 볼 수 있냐고 하니까 화면 사진으로 찍은 거 보여 줬는데 아무래도 경일용역 애들 중에 한 명인 거 같아요.”
정언의 말을 듣고 있던 재희가 고개를 까딱였다.
“지금 가서 확인해, 그럼. 그리고 일 아무리 급해도 주말에 출근하지 말고 이사할 집 알아봐. 며칠 있을 데 없으면 우리 집 비밀번호 알려 줄 테니까 거기 가 있든지.”
재희의 말에 정언이 그건, 하고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재희가 손을 휘적거리며 정언을 막았다.
“더 화내려는 거 송 작가가 말려서 참고 있는 거니까 말 보태지 말고.”
민혜가 옆에서 재희를 거들며 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경일용역 애들이면 김 피디도 잘 알 거 아냐. 같이 갔다 와. 김 피디, 정언 좀 부탁해요. 당분간 취재 나갈 때 되도록 둘이 계속 붙어 다니고. 나야 뭐 안에서 일하고 노출 없으니까 그렇다 치는데 정언은 얼굴까지 팔린 애라 좀 그래요. 김 피디도 조심하고.”
“아니, 됐어요. 뭘 계속 붙어 다니라고 해, 애도 아닌데.”
정언이 질색을 하는 얼굴에 민혜가 정언의 옆구리를 꽉 꼬집었다. 정언이 아야, 하며 움찔하자 민혜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하여튼 간이 부었다 부었다 하니까 겁이 없어도 너무 없어, 정언은. 지금 이런 일 가지고 우리가 신경 써서 낭비할 시간 없는 거 몰라? 신경 안 쓰이게 잔소리하지 말고 강 피디 말대로 해. 주말에 당장 이사할 집 알아보고.”
“알았어요, 알았어.”
마지못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대답한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이 따라서 몸을 일으키자 정언이 뭐라고 하고 싶은 듯 윤 쪽을 잠깐 보았으나 곧 할 수 없다는 듯 회의실을 나섰다. 윤과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정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주차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자기 차에 시동을 건 정언이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윤에게 조수석에 타라는 고갯짓을 한 정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깐 운전석 문에 기대 허공에 짧은 숨을 뱉었다.
차에 타 주차장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침묵하던 정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한테 괜한 소리 듣게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선배랑 송 작가님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이런 일 한두 번 아니니까.”
윤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정언을 보았다.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정언은 앞창에 눈을 고정한 채였다.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무표정한 옆모습에 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한두 번 아니라서 문제 안 되는 일이에요?”
목소리가 조금 잠겨 나왔다. 정언이 대답 대신 물고 있던 담배의 필터 끝을 까딱였다.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수많은 말들이 무질서하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저 이제부터 선배 옆에서 안 떨어질 거니까 혼자라도 상관없다든지, 신경 쓰지 말라든지 그런 얘기 그만하세요. 선배가 저한테 무슨 일 시키시든 민폐라고 절대 생각 안 해요. 선배 집 문 앞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으라면 그렇게 할 거고, 24시간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도 그렇게 할 테니까 제발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세요.”
“김 피디.”
정언이 담배 탓에 약간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윤을 불렀다. 정언이 자신을 이렇게 부를 때 의도가 뭔지는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들이 그대로 나와 버릴 것 같아 윤은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그러나 결국 물이 끓어 넘치듯, 떠돌던 말이 울컥 쏟아졌다.
“이게 선배 선 안이든 밖이든 저 이제 상관 안 해요. 송 작가님이나 강 피디님하고 저 선배한테 안 똑같은 거 알아요. 아는데, 그래도 그때 선배 옆에 있었던 거 저잖아요. 제가 이 일 제일 먼저 알았잖아요. 그런데 전 왜 선배한테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무것도 못 해야 되냐고요.”
멈칫한 정언이 윤을 보았다. 시선이 느껴졌으나 윤은 그쪽을 보지 못하고 무릎 위의 손을 말아 쥐었다.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쉬운 게 왜 저한테는 안 되는 건데요. 제가 후배라서요? 믿음이 안 가서요? 아니면 제가 선배 좋아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러세요?”
마지막 문장을 발음하기 무섭게 심장이 어긋나는 듯한 감각이 지났다. 좋아하는…… 한 번도 정언 앞에서 그 말을 직접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직후였다.
언어로 규정된 적 없던 감정이 그 순간 더욱 명확해졌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정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릿한 감각이 번졌다.
“저 지금 제멋대로 구는 거 알아요. 공사 구분 똑바로 못 한다고 생각하셔도 상관없어요. 저 원래 한 번 빠지면 다른 생각 못 해요. 좋아하니까, 선배 안 다치게 할 수 있으면 뭐든 할 거예요. 그냥 지켜보는 거 이제 안 해요. 선배가 이런 일 그냥 혼자 감당하게 내버려 두는 거 싫어요. 저 좋아해 달라는 말 아니에요. 대답해 달라고 강요 안 할게요. 그냥 선배 대단한 사람인 거 알지만 가끔은 누가 필요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거면…… 그럴 때면 그게 저였으면 좋겠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최대한 차분하게 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호흡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듯 숨이 막혔다. 온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금 내뱉은 말을 한마디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윤은 떨림을 참기 위해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그 안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정적이 이어졌다. 정언의 침묵은 길었다. 운전하는 내내 정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윤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경찰서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사방이 어둡고 고요했다.
시동을 끈 정언은 도어록을 여는 대신 한동안 창 너머의 어둠을 응시했다. 견디다 못 한 윤이 선배, 하고 겨우 작은 목소리로 정언을 부르자 정언이 몸을 돌려 윤을 마주 보았다. 차 안으로 스민 어둠 속에서도 그 눈동자가 또렷했다.
한참 윤을 응시하던 정언이 문득 손을 뻗어 윤의 머리칼을 만졌다. 눈썹 위로 닿은 손끝이 차가웠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윤은 숨을 멈췄다.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굳어 있는 윤의 머리칼을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소리 없이 쓸어 넘겼다.
옅은 한숨이 정언의 입술 사이에서 배어 나왔다. 그 미미한 공기의 움직임마저 모두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졌다. 몸을 약간 앞으로 내민 정언이 드러난 윤의 이마를 뚫어지게 보았다.
손끝이 한 지점에 머물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진 흉터 위였다. 서늘한 손이 그 위를 스치듯 지났다가 떨어졌다. 그 손길을 따라 머리칼이 이마 위로 다시 흩어졌다. 손을 거둔 정언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치지 말고 본인 잘 지켜. 이런 일 다시 생기면 내가 나 용납 못 할 것 같으니까.”
낮은 목소리였다. 도어록을 푼 정언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무슨 정신으로 내렸는지도 모르게 따라 내린 윤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얼어붙어 있다가 숨을 들이쉬었다. 호흡조차 낯설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마에 닿았던 손끝의 감각이 생생했다. 윤은 저도 모르게 흉터 위를 만져 보았다. 흔적만이 옅게 남은 그 자리에서 스쳤던 서늘함 대신 열이 올랐다.
정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가로등 빛에 긴 그림자가 떨어져 윤의 발치까지 드리워졌다. 윤은 그 궤적을 밟으며 정언을 따라 걸었다. 큰 보폭 덕에 윤이 정언의 곁에 서기까지는 고작 몇 걸음이면 충분했다.
모든 소리가 지워진 듯한 어둠 속에서 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온몸의 모든 곳에 심장이 저마다 존재하는 것 같았다.
강요할 마음은 절대 없었지만 이미 발화점에 이른 지 오래인 감정은 쉽게 넘쳤다. 좋아한다고, 좋아하니까 뭐든 할 거라고, 언제나 이 자리에 있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고…… 이미 규정된 마음은 되돌릴 수 없이 선명했다.
이건 소망일까, 혹은 욕망일까.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절히 바라는 것만으로 죄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윤은 생각했다.
손을 뻗어 정언의 앞에서 먼저 유리문을 밀자 무감한 냉기가 번졌다. 유리문 위로 정언의 창백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 짧게 비쳤다가 스쳐 지났다. 그 찰나가 문득 눈에 맺혔다.
윤은 정언과 함께 문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유리문이 닫히며 온기 없는 공기가 그림자를 따라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