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31
131화.
이원욱, 김성학, 장영관.
정언은 낯선 이름들을 입 안으로 하나하나 곱씹어 보았다. 경일용역에서 만났던 남자들의 이름이었다. 합의서 사본 위의 그 이름들은 CCTV의 화면 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정언은 오피스텔 입구의 CCTV에 찍혀 있던 남자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마포서의 박동찬 형사가 확인해 준 그의 이름은 이원욱이었다.
인터넷 업체 로고가 붙은 모자와 조끼를 착용한 원욱은 태연히 경비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갔고, 정언의 집이 있는 층에서 내렸다. 복도의 CCTV에는 그가 마스터키로 도어록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모두 찍혀 있었다.
그 장면들은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일부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상을 다시 떠올려 보던 정언은 가벼운 두통에 머리를 감쌌다.
조금 전 이섭에게서도 조창식의 집 앞 CCTV에 촬영된 두 남자가 김성학과 장영관으로 추정된다는 연락을 받은 뒤였다. 두 사람 다 등록된 주소지에는 이미 살고 있지 않았다.
이섭은 의정부 경일용역 사무실로 출동했으나, 사무실도 닫혀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같은 상가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야반도주라도 한 것처럼 얼마 전부터 사람이 전혀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일용역은 애초부터 서온건설의 ‘설거지’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었다. 이원욱을 자신의 집에 보낸 이유도 결국 어떻게든 가 서온건설을 추적하는 걸 막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이원욱과 경일용역, 서온건설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더 벌어질까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은 자신의 일에 온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서온건설에서 희경에게 연락을 해 보상금을 올려 주겠다고 한 일, 수아와 리아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걸려 왔던 의문의 전화, 야적장의 미인증 불법 자재들, 그리고 규형과 주경의 장부에 드러나 있는 자금 흐름 등등의 문제를 풀어 가는 것만으로도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사람은 왜 잠을 자야 할까, 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던 정언은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민혜였다.
“정언, 밤에 어디서 잤어? 설마 경찰서 갔다가 집에 또 들어간 건 아니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은 민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정언은 자세를 고쳐 바로 앉으며 기지개를 켰다.
“숙직실에서 잤어요. 날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집이 있는데도 가지를 못하네.”
“숙직실 생활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 있을 거면 차라리 엄마 집 가 있는 게 낫지 않아?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야…….”
민혜가 말끝을 흐렸다. 정언은 손을 휘적거리며 됐다는 투로 대답했다.
“우리 엄마 알면 기절할 거 몰라요? 괜히 걔들이 거기까지 쫓아오는 게 더 위험해.”
“그럼 진짜 강 피디 집에 가 있든지. 집주인도 안 들어가는 집 좀 쓰면 어때.”
“안 땐 굴뚝에도 연기 나는 게 이 바닥인데 선배 집에 들어가라고? 누구 혼삿길 막으려고 그래요?”
민혜는 질색하는 정언을 아래위로 훑으며 농치는 투로 물었다.
“누구 혼삿길이 막히는 건데? 정언이야, 강 피디야?”
정언이 대답 대신 눈을 흘기자 깔깔거린 민혜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화면 보니까 아는 사람이야?”
“경일용역에서 본 놈이더라고요. 합의서 기록 보고 이름 찾아서 조회해 봤는데 이원욱이래요. 전과 5범이라는데 경찰에서 추적하겠다니까. 조창식 죽인 놈들은 합의서 있던 나머지 두 명인데 김성학하고 장영관이라고, 얘들도 뭐 둘이 합쳐 전과 15범 정도. 다 본인 명의로 된 핸드폰도 없고 주소지에도 없다네요. 경일용역 쫓아가 볼까 했더니 얼마 전부터 사무실 닫았다고 그러고.”
정언의 말에 민혜가 부르르 떨며 질색을 했다.
“어우, 생각할수록 정언하고 김 피디 거기서 그만한 게 천만다행이야. 사람 죽이기를 뭐 모기 한 마리 잡는 것처럼 아는 놈들인데, 거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어떻게 할 수도 있었던 거 아냐. 뭘 몰랐으니까 용감했지, 알고서 어떻게 또 가 볼 생각을 해.”
“아니까 캐러 가는 거지.”
다음 순간 민혜가 풀 스윙으로 정언의 등짝을 후려쳤다. 정언이 저도 모르게 억 소리를 내자 민혜가 손가락질을 했다.
“미쳤니? 미쳤어? 정언, 서랍 한 번 열어 봐. 혹시 간 거기다 넣어 놨나 좀 보자. 방송도 사람이 살아 있어야 하는 거지, 나 죽고 방송하면 무슨 퓰리처상 줄 줄 알아? 퓰리처상 준대도 그거 받고 죽느니 안 받고 사는 게 나아요, 이 사람아. 미련하기가 아주 이를 데 없어. 어제도 강 피디가 하도 펄펄 뛰니까 내가 말을 안 했지, 강 피디만 없었어 봐. 아주 내가 정언 팝콘 되도록 볶았을 거야.”
“아니, 내 간 배 속에 잘 있어요. 그건 그렇고, 그 청명토목 제보한 신병민 씨하고 혹시 다시 연락해 봤어요? 만나서 얘기했으면 싶은데.”
정언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내버려 뒀다가는 민혜의 일장 연설이 시작될 걸 뻔히 아는 탓이었다. 민혜가 한 번 이런 식으로 사람을 볶아 대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이라도 볶을 수 있는 지구력과 말발의 소유자라는 걸 정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민혜가 그 빤한 수작 다 보인다는 표정으로 흥, 하며 팔짱을 끼었다.
“이런 식으로 말 돌리지 말아 줄래? 어쨌든 내가 누구야, 연락은 미리 했지. 인터뷰 가능하겠냐고 물어보니까 본인이 지금 성수 쪽에서 직장 다닌대. 퇴근 후에 그쪽에서 만났으면 하더라고. 일정 잡아서 연락 주기로 했어.”
“난 송 작가님 없으면 어떻게 살까 몰라.”
감동했다는 얼굴로 짐짓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보이자 민혜가 손끝으로 정언의 이마를 밀었다.
“나도 정언 없이 못 사니까 조심하고 다녀, 제발.”
정언은 대답 대신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민혜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때 책상 위의 내선전화가 울렸다. 정언은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서정언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 나 한동이다. 지금 시간 있으면 너 이쪽으로 잠깐 좀 건너와.』
“아,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혜가 고개를 돌려 정언을 쳐다보았다. 어디 가느냐는 얼굴이었다.
“ 잠깐 갔다 올게요.”
민혜의 어깨를 짚으며 말한 정언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한동이 아침부터 전화를 해서 부르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정보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낯이 익은 기자들과 스탭들이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가벼운 목례로 답을 한 정언은 한동을 찾았다. 사회부 팻말 아래의 구석 책상에 앉아 있던 한동이 정언을 보더니 손짓을 했다.
“야, 서정언. 이리 와.”
한동이 회의실로 먼저 들어갔다. 뒤를 따라 들어간 정언이 문을 닫자 자리에 앉은 한동이 정언에게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순순히 그 자리에 앉자 한동이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우리 TF 만들고 취재 들어갔어.”
“벌써요? 누가 하는데요?”
눈을 동그랗게 뜬 정언이 묻자 한동이 대답했다.
“원진솔하고 이도하.”
진솔과 도하라면 사회부 베테랑 기자들이었다. 그 이름을 들은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서온 때도 부장님이랑 같이했죠? 그럼 뭐 베이스는 다 준비됐겠네. 다시 하려면 부담스러울 텐데 그건 괜찮대요?”
다소 걱정스러운 말투에 한동이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그놈들이 부담스럽고 자시고가 어딨어, 내가 까라면 까는 거지. 그건 그렇고, 내가 어제 저녁에 황형두 만났는데, 황 의원이 혹시 진송신도시 관련 건으로 취재하는 거 있는지 묻더라고. 너희 팀에서 몇 번이나 연락 왔었다고.”
“그래서요?”
“아이, 난 그 자식들 뭐하는지 모른다고 일단 잡아뗐지. 그러니까 그, 아, 황 의원이 민권당 사회반부패위원회 소속인 건 알지? 그 사반위 쪽으로 최근에 애포신도시랑 을정신도시 시청 공무원들에 대한 투서가 상당히 들어와 있대. 자기가 이게 진송신도시랑 관계가 있나 싶어서 그쪽에 얘기를 아직 안 했다는 거야. 근데 내가 보기엔 지금 사이즈가, 각이 딱 나오거든.”
정언은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투서 내용이 뭐래요?”
“하청 측에서 익명 제보가 많이 들어오는데, 시청 건축과 이런 쪽에 향응하고 금품 제공을 했다 그거야. 하청이 참다 참다 투서를 넣는 거지. 그쪽에 그런 일 워낙 비일비재하니 자기들도 어느 정도까지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중간에 착복하는 라인이 점점 늘어나니까. 건축과에 넣으면 도시계획과에서 달라고 하고, 도시계획과에 주니까 회계과에서도 달라고 하고.”
“허주경 사장 장부에 시청 공무원들 이름이 상당수 있었잖아요.”
“그렇지. 진솔이하고 도하가 거기 시청 공무원 명단 가지고 와서 장부하고 맞춰 보기로 했어. 황형두 의원실에서도 좀 파 보려는 모양이더라고. 한선당 이규완 쪽에서 무슨 소스가 있다고 연락을 했다네.”
“이규완이요?”
정언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규완은 한선당에서 대표적인 반 엄대진 세력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엄대진이 수도권으로 올라올 때 이규완이 자기 지역구를 내주며 키웠는데, 뒤에서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며 공공연히 울분을 터트리고 다닌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규완의 본래 계획은 를 낀 엄대진을 밑에 두고 대권 주자로 발돋움하려는 것이었는데, 엄대진이 도리어 자신을 밟고 올라간 꼴이 되어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경선에서 승산 있다고 보는 겁니까? 지지율 차이 상당할 텐데요.”
“승산 없으니까 민권당에 자기가 엄대진계 소스 주겠다 그거야. 잘 해가지고 민권당에서 이거 걸고넘어져서 운 좋게 먹히면 자기는 어부지리니까. 이규완이 황 의원하고 또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니까, 아무래도 뭐 영판 남보다는 낫다는 계산도 있겠지.”
“밑져야 본전이다?”
“그렇지. 우리 입장에서는 이이제이다, 내 생각엔 그래. 이규완이 무슨 소스 들고 올지는 모르겠지만 걔도 이 갈면서 준비한 게 꽤 있지 싶다. 자기가 털어 봐야 집안싸움 꼴밖에 더 되겠어? 정당 지지자들은 보통 그런 거 싫어하는 데다 당원 대다수가 엄대진 지지자니까 자기가 말해 봤자 입막음이나 당할 거 아냐. 자기 손에는 피 안 묻힌다는 거지.”
한동이 팔짱을 끼었다.
잠시 생각하던 정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잘못 말리면 엄대진 쪽에서 야합했다고 칠 텐데 위험하긴 하네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쪽에서는 오로지 부실공사에 초점 맞춰서 갈 거야. 부실 자재, 문서하고 감리 조작, 실제 피해 사례 묶어서. 우리가 스타일하우스 주민 커뮤니티 몇 군데 둘러봤는데, 신규 입주자들이 호흡기 질환이나 아토피 악화 호소하는 경우가 꽤 있어. 우리가 이쪽에서 시작하면서 너희 쪽에 이규완이 가져오는 소스 넘겨줄 테니까 한 번 파 봐.”
“원 기자하고 이 기자면 보안은 철저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부장님도 조심하세요.”
한동이 괴로워하는 얼굴로 그렇지 않아도 숱이 줄고 있는 머리카락을 뜯었다.
“안 그래도 요새 그것 때문에 돌아 버리겠다. 애들을 못 믿겠어. 솔직히 애들 다 투입해서 총력전 하고 싶은데 내가 명단을 딱 뽑아서 보니까 이놈도 의심이 가고, 저놈도 의심이 가고 그러는 거야. 얘들이 다 내 새끼들인 줄 알았는데 어, 이거 가만히 보니까 저 새끼는 뻐꾸기 닮지 않았나? 이 생각이 막 들어. 내가 남의 알을 품었나 싶다니까.”
“에이, 설마요.”
애써 위로하는 정언에게 한동이 정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