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설마는 무슨 설마야, 인마. 심석건 그 새끼도 정치부 있을 때 실력은 없는 게 정치는 잘 한다 그러고 까이긴 했어도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 난 몰랐다. 저 몸보신하는 거야 누가 뭐라겠냐만.”
“사람이 다 내 맘 같나요.”
한동이 킬킬거리며 웃고는 휴, 하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뱉었다.
“야, 내가 국장님, 백 선배 처음 봤을 때 백 선배가 후배들 모아 놓고 제일 먼저 한 말이 그거야. 니들은 뉴스 기사가 돈으로 따지면 얼마 정도 될 거 같아? 다 나름대로 생각해서 대답을 할 거 아냐. 그럼 선배가 묻는다고. 그거 돈 받고 팔 수 있으면 팔래? 그러면 판다는 놈도 있고 아니라는 놈도 있고. 그때 대통령이 팔라면 팔래? 또 그래. 안 판다고 하던 놈도 대통령이 팔라면 팔아야죠, 해. 5공 시대 알잖냐. 대통령의 대 자만 들어도 살 떨린다고. 안 판다는 말이 안 나오지. 근데 선배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딱 하는 거야. 팔겠다는 놈은 지금 나가라. 그게 우리 자존심인데, 돈하고 권력 앞에 비굴하게 자존심 팔 놈들은 여기 필요 없다.”
선경이라면 능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금녀의 구역에 가까웠던 시사보도국에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국장까지 올라간 선경이었다. 그 화려한 이력과 후배들의 존경이 거저 주어질 리 없었다.
잠시 추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리던 한동이 혀를 찼다.
“근데 그 소리 듣고 자란 놈들도 그렇게 무릎 딱 꿇는 거 봐. 요즘 애들은 어떻겠냐? 좋은 집안에서 자라고 명문대 멀쩡하게 나온 새끼들이 위에는 너무 쉽게 자존심 팔면서 아래에다 대고는 곤조를 부린다고. 기자질 하는 거에 취해서 그저 어떻게 하면 내가 위로 올라가나 그 생각만 하는 새끼들이 한둘이 아냐. 내 앞에서는 네, 네 하고 시키는 대로 기사 고쳐 오면서, 뒤에서는 개뿔도 모르는 꼰대새끼가 세상 변하는 것도 모른다고 해.”
그 말에 정언은 표정을 확 굳혔다.
“부장님이 직접 보신 겁니까? 어떤 새끼가 그래요?”
“말해 봐야 내 얼굴에 침 뱉기다, 야. 세상에 처음부터 나쁜 애가 어디 있냐. 부모가 잘못 가르친 거지. 내가 걔들한테 모범 못 된 거고 저렇게 되고 싶다, 저렇게 살고 싶다 이런 생각 못 하게 만든 게 잘못이야.”
자조적으로 대답한 한동이 쓴웃음을 뱉었다. 정언은 잠시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한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선경, 전한동이라고 하면 시사보도국에서는 모두가 존경하고 인정하는 선배들이었다. 그런 선배들이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정언은 누군가가 마음 한구석의 모래성을 함부로 무너뜨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에휴, 하고 짐짓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쉰 한동이 턱을 괴며 정언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내가 요새 너 볼 때마다 서현국 무지하게 보고 싶어. 사람이 옛날 생각 자꾸 하고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마음 기댈 데가 없다. 현국이 그 새끼가 지금 여기 있었으면 진짜 참 좋겠다, 어젯밤에도 그 생각이 딱 나더라고.”
농담처럼 뱉은 말은 묵직했다. 단어들이 마치 수면 위로 던져진 작은 돌처럼 쉽게 가라앉았다. 서현국.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라앉은 돌 사이를 쓸다 날카로운 면에 베인 듯 선뜩하게 가슴에 얹혔다.
한동이 정언의 얼굴을 보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거 진짜. 전한동 늙은이 다 됐네, 이제. 이러고 추한 꼴 보이느니 마누라가 사주나 좀 배워서 점집 차려 주둥이 털라고 할 때 말 들을 걸 그랬어. 얼굴 실컷 봤으니까 그만 가. 바쁜데.”
정언이 부장님, 하고 불렀으나 한동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세월의 결이 아무리 단단히 쌓인 사람이라도, 때로는 찾아오는 회한을 막을 방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그 옆모습에 눈을 두었던 정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믿고 가시죠. 백업 확실하게 해 주시면 갈 땐 가더라도 그냥은 안 갈 겁니다.”
“어린놈이 왜 자꾸 어딜 간다고 난리야, 인마. 죽어도 여기서 죽어!”
공연히 버럭 소리를 친 한동이 나가라며 손을 휘적거렸다. 씩 웃어 보인 정언은 회의실을 나섰다. 그러나 마음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건 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텅 빈 정치부 1팀의 책상 사이를 가로지를 때, 정언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사무실 안에서 언제나처럼 분주한 사람들 사이의 공기는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 너는 회사가 중요해, 자리가 중요해?
한동에게 그렇게 묻던 선경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곳의 많은 사람들 중, 회사가 중요한 사람은 누구고, 자리가 중요한 사람은 또 누굴까.
뻐꾸기 알을 품은 것 같다던 한동의 말 탓인지, 이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불신이 문득 등 뒤로 휘감겼다. 저 사람도? 혹은 저 사람도?
입술 끝을 깨문 정언은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지금은 우선 안보다 바깥을 의심할 때였다. 평소보다 한산한 복도를 걷던 정언은 발을 멈췄다. 맞은편에서 두리번거리다 자신과 눈을 마주친 윤을 본 탓이었다.
멈칫하던 윤이 한달음에 뛰어왔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엄청 찾았는데.”
왠지 진심으로 걱정하는 윤의 표정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민망했다. 시선을 어슷하게 비껴 피한 정언은 눈썹 위를 긁적였다.
“출근한 사람이 자리에 없으면 회사 어디 있겠거니 하지 왜 찾아.”
“걱정할 거 뻔히 아시면서 그렇게 얘기하셔야 돼요?”
속상하다는 투로 말하면서도 윤이 웃었다. 아무리 선을 긋고 밀어내도 매번 다시 이 자리인 것 같은 기분은 왜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 차라리 매번 같은 자리라면 나을 것 같았다. 돌아서면 더 가까워져 있는 그 느낌이 신경을 당겼다.
정언은 복도로 옅게 드리워지는 윤의 그림자를 보았다.
“무슨 일인데.”
“무슨 일 있어야 선배 찾을 수 있어요?”
나란히 선 윤이 물었다. 그러자 언젠가 절대 윤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 제가 선배 좋아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러시는 거예요?
밤새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 목소리가 마치 녹음 파일을 재생한 듯 선명하게 지나쳤다. 복도는 서늘했지만 귀 끝이 뜨거워졌다.
“수아 어린이집 원장님하고 통화했어요. 범죄 가능성 있으니 경찰에 신고하고 통화 기록 뽑아 보시면 어떻겠냐고 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상담이 많다 보니까 전화 녹취도 다 한대요. 저녁에 애들 다 하원한 뒤에 잠깐 찾아뵐 수 있겠냐고 했더니 알겠다고 하던데, 시간 언제가 괜찮으세요?”
남의 속을 알 리 없는 윤은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공연히 귀 끝을 만지작거린 정언은 최대한 평소처럼 대답했다.
“일곱 시쯤이면 끝나나? 거기 종일반 하원 끝나는 시간에 맞추겠다고 해.”
무심결에 사무실 문을 막 열려는 순간, 등 뒤에서 윤이 긴 팔을 뻗어 먼저 문을 열어 주었다. 사소하지만 늘 몸에 배어 있는 배려였다. 그건 아마 천성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윤의 그 배려가 모두에게 같지 않다는 걸 깨닫는 일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상한.
정언은 그 단어를 다시 한 번 입 안으로 뇌어 보았다. 스산하게 가라앉았던 마음속의 모래사장 위로 새파란 파도가 밀려들었다 다시 빠져나갔다. 거기 복잡하게 얽혀 있던 수많은 단어들이 그 파도 사이로 휩쓸려 지나가는 듯했다.
사무실 문 앞에 선 정언은 윤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윤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착각인가 생각할 정도의 찰나였다.
“안 들어가세요?”
곧 윤의 얼굴로 예의 미소가 번졌다. 정언은 서둘러 시선을 거뒀다. 저 좋아해 달라는 말 아니에요, 하고 나지막하게 발음하던 윤의 얼굴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마에 남은 희미한 흉터 위를 손끝으로 덧그렸을 때, 윤의 눈이 꼭 지금처럼 흔들렸던 것만은 또렷하게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눈.
그게 자신이라는 걸, 다른 누구도 아닌 서정언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자마자 아주 절실하게 트리플 샷이 필요해졌다. 평소보다 빨라진 심장을 설명하기 위한 핑계가 없는 탓이었다.
* * *
“일곱 시에 어린이집 들렀다가 늦어도 여덟 시 전에는 상수로 이동해야 돼. 거기서 신병민 씨 만날 거니까.”
조수석에 앉은 정언이 다이어리를 펼쳐 일정을 확인하며 말하자 네, 하고 대답한 윤은 시동을 걸었다.
하루 종일 사무실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탓에 차라리 밖으로 나오는 게 마음이 편했다. 시사보도국이 유독 심한 건가 싶어 낮에 태훈과 다인에게 기제국이나 교양국 분위기는 어떠냐고 메시지로 넌지시 떠보았으나 다른 곳이라고 사정이 나을 리는 없었다.
괜히 또 나대지 말고 제발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두 사람의 메시지를 떠올린 윤은 약간 심란해졌다. 정말 목숨의 위협을 걱정하고 있는 판국에 몸조심이 다 뭔가 싶어서였다.
윤은 곧 이 심란함의 근원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몸조심 따위와는 일절 연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정언의 옆모습을 흘끔 보자 참았던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서둘러 주차장을 빠져나온 윤은 정언에게 물었다.
“전한동 부장님이 뭐라고 하세요?”
“거기 TF에서 명부 맞춰 봤는데 일치하는 이름 많이 나왔대. 부장님이 저녁에 황 의원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데 아마 거기서 후속 대책을 논의할 거 같아. 그쪽에 투서 들어온 거 많다니까 내일 오전쯤 우리한테 정보 제공할 거 있을 거야.”
정언은 다이어리에 눈을 둔 채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던 정언이 물었다.
“천승욱 누군지 알아봤어?”
정언의 물음에 윤은 아, 하며 대답했다.
“천중헌 이사 차남이래요. 3년 전에 낙하산으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뉴질랜드 유학파에 무슨 벤처기업 몇 년 다녔다고 하고 들어왔는데, 당시에 대학 졸업장도 없었고 경력 증명서도 제출 안 하고 그래서 말이 좀 있었나 봐요. 사원행복문화팀은 재작년에 신설된 건데, 천승욱을 거기 바로 팀장으로 발령 내서 사내에서 불만이 많았다던데요.”
천승욱에 대해 묻자마자 대뜸 욕부터 한 원신이 들려 준 이야기였다. 간부 자녀들이 낙하산으로 입사하는 게 한두 건이 아니라서 새삼스럽지도 않다고는 했지만, 승욱은 개중에서도 심각한 케이스였다.
“사원행복문화팀이 정확히 뭐하는 팀인데?”
“말 그대로 사원 복지 이런 거 담당하는 팀이라는데, 내부에서 문제 제기가 있었대요. 천승욱이 여직원 성희롱, 성추행 건으로 사내 고충처리센터에 신고된 것만 네 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사원행복문화팀이 신설되면서 고충처리센터를 거기 산하로 넣어 버려서 이게 말이 되냐고 피해자들한테 항의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서온건설 사내 문화 생각하면 실제 건수는 더 많을 수도 있겠네.”
“네. 당시에도 천승욱한테 사내 성희롱 예방 교육 이수 정도 처벌밖에 안 했었대요. 합의금 얼마 주고 접근 안 하겠다고 각서도 쓰고 그랬다는데, 결국 천승욱이 거기 팀장이 되면서 피해자들이 다 퇴사했다던데요. 언론에 제보하겠다는 피해자도 있었는데 합의금으로 입막음했고요.”
“가지가지 한다, 아주.”
쯧, 하고 혀를 찬 정언이 펜 끝으로 찌푸린 미간을 긁적였다.
“그런데 거기서 박규형 씨 보상 금액을 올린다 만다 이런 얘기를 할 권한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