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저도 그게 궁금해서 넌지시 물어봤는데 형 말로는 그런 것까지는 권한이 아닐 텐데 잘 모르겠대요. 천중헌 이사 쪽에서 다이렉트로 지시 내린 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유가 뭐든 그런 전례 만들었다는 게 알려지면 회사 측에 안 좋긴 하겠지. 그쪽도 걸기 시작하면 채용 비리에 성범죄 묻은 거에 아주 노다지겠네. 혹시 모르니까 키핑해 두는 걸로 하자고.”
잠시 신호에 걸린 사이 뭔가 휘갈겨 적은 정언이 다이어리를 덮어 가방에 넣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있던 정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경일용역 쪽이 큰일이네.”
“왜요?”
“이희경 씨 입 막으려고 하는 거 같은데, 돈으로 안 되면 무슨 짓 할지 모르겠어. 애 걸리면 부모들이 무슨 일이든 끝까지 끌고 가기 힘들어져. 애들한테 아무 일 없어야 되는데…….”
짧은 한숨을 뱉은 정언은 눈꺼풀 위를 눌렀다.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닌데요, 하는 말이 목까지 나왔으나 윤은 애써 그 말을 참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는 있었으나, 좋아한다고 말해 버린 뒤에도 정언을 대하는 마음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좋아해 달라는 게 아니라고, 대답을 강요하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정말 평생 이대로라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언이 조금은 흔들리지 않았을까 기대한 건 사실이었다. 입 밖으로 낸 순간 그 감정이 더 분명해졌던 것처럼, 정언 역시 더 이상은 지금까지처럼 모호한 말로 선을 긋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모든 것이 자를 대고 그은 선처럼 확실한 정언이었으나, 윤은 자신을 대하는 정언의 태도가 어쩐지 이전과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는 중이었다. 마치 물에 적신 종이 위에 수채화 물감을 떨어뜨리듯, 경계가 흐려지는 정언의 태도는 간혹 윤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자신이 정언에게 조금쯤은 의미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희미한 이마의 상처 위로 문득 뜨끔한 환각이 지났다.
― 이런 일 다시 생기면 내가 나 용납 못 할 것 같으니까.
나지막하게 말하던 정언의 표정이 떠올랐다.
감정이 쉽게 읽히지 않는 눈은 그 순간에도 여전했다. 그 말을 하면서 정언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공연히 이마 부근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윤은 무심결에 손을 올려 두어 번 상처 위를 문질렀다.
어린이집 앞에 도착한 건 일곱 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차를 세우자 때마침 종일반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엄마들 두어 명이 눈에 띄었다. 차에서 먼저 내린 정언이 벨을 누르자, 안에서 이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교사가 뛰어나왔다.
“원장님하고 아까 연락했었는데요, 입니다.”
정언이 내민 명함을 받아 든 교사가 잠시만요,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교사가 원장실 쪽으로 정언과 윤을 안내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되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의 여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얼른 자리를 권했다. 작은 원장실의 책상 위에는 ‘원장 이여정’이라는 명패가 있었다.
“이여정 원장님 되세요? 제가 아까 통화한 김윤 피디입니다.”
윤이 먼저 입을 열자 여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경찰에 신고는 하셨나요?”
정언의 물음에 여정이 벽에 걸린 시계로 눈을 한 번 주더니 대답했다.
“점심시간에 했어요. 경찰에서 통화 내역 뽑아 보고 발신자 추적해서 연락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전화가 정확히 언제 온 거죠?”
“4일, 5일…… 5일 됐네요. 어머니가 항상 네 시, 늦어도 네 시 반에는 데리러 오시거든요. 그날 네 시 좀 안 됐을 땐데, 세 시 반은 넘었었고. 그때 전화가 왔더라고요. 남자분이 전화하는 일이 거의 없거든요, 저희가.”
“수아 삼촌이라고 전화가 왔다면서요?”
여정이 불안한 표정으로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네. 그 전화를 먼저 받은 게 제가 아니고 우리 선생님이었거든요. 보통 이모나 고모가 애들 대신 데려간다고 전화 주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삼촌이 그런 적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그러시냐, 하니까 자기가 동생 죽고 제수하고 사이가 틀어져서 조카들을 못 보게 됐다고, 수아 엄마가 보통 몇 시쯤 애들 데리러 오냐고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이제 잠시만 있어 보라고 하고 저한테 물어보러 온 거죠. 이러는데 어떡하냐. 그래서 제가 바로 전화를 받아서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수아 어머니하고 상의를 해 보셔야 한다고 했죠.”
“최근에 어린이집 주변에서 수상한 사람을 보셨거나 한 적은 없으셨고요?”
“네, 그런 건 모르겠어요. 경찰에서 어린이집 외부 CCTV 화면은 다 수거해 갔어요.”
“전화를 한 남자가 몇 살 정도 된 것 같으셨어요?”
“40대쯤, 그렇게 젊은 남자 목소리는 아니었어요.”
정언은 여정의 말을 들으며 부지런히 메모를 했다. 곁에 앉아 있던 윤이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수아한테 상담치료 권하셨다고 들었는데, 상태가 많이 안 좋았나요?”
수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여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그게…… 수아가 여기 3년을 넘게 다녔거든요. 원래 굉장히 활발하고 똑똑하고, 나이보다 좀 빠른 편이라 같은 반 친구들도 언니처럼 잘 챙기고 그랬어요.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도 한동안은 특별할 게 없었거든요. 수아 엄마 얘기로 아직 애들한테 얘기를 못 했다고, 당분간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저희는 다 쉬쉬하고 있었죠. 그런데 한 이삼 주 전부터 수아가 갑자기 말도 없어지고, 활동 시간에도 구석에 혼자 가만히 있고 그러는 거예요.”
“리아도 같은 증상이 있었습니까?”
“아뇨. 리아는 평소랑 똑같았어요. 수아만 그러더라고요. 선생님들이 수아 왜 그러니 해도 그냥 고개만 이렇게 흔들고, 낮잠 시간에도 안 자고. 그런데 지난주에, 수아 반 담임 선생님이 아무래도 수아가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얘기를 했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수아가 낮잠 시간에 한동안 안 자더니 웬일로 자리에 누워서 이불을 덮길래 안심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애가 이불을 덮고 베개로 자기 얼굴을 꼭 누르고 있더라는 거예요.”
핸드폰으로 대화를 녹음하던 윤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언 역시 손을 멈추며 여정을 마주 보았다. 여정이 아휴, 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선생님이 너무 놀라서, 얼른 수아를 안고 숨을 못 쉬면 큰일 난다고 그랬더니 수아가 그랬대요. 자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엄마랑 리아랑 행복할 것 같다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작 여섯 살짜리 어린애를 그렇게 몰아가는 고통이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윤의 표정을 읽은 듯, 여정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뱉었다.
“간혹 그런 경우가 있어요. 소아 우울증인 것 같아서 저희가 조심스럽게 엄마한테 말씀을 드렸죠. 상담 치료를 받아 보시면 어떻겠냐고. 그렇지 않아도 수아가 맨날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이 있는데, 여자애들 좋아하는 거 있잖아요. 핸드백처럼 생긴 거. 그걸 밥 먹을 때, 화장실 갈 때도 절대 안 놓고 다녀서 왜 그러나 했더니 그게 아빠가 사 준 거라고 하더라고요. 혹시 수아가 아빠 돌아가신 걸 눈치챈 건가 싶어서…….”
“어머니한테 물어보셨어요?”
“수아 엄마 얘기로는 절대 말 안 하셨대요. 그런데 애들도 눈치라는 게 있거든요. 어른들이 보기에는 쟤들이 뭘 알아, 싶은데 네 살, 다섯 살만 돼도 애들이 엄마 아빠가 부부싸움하고 그러면 다음 날 다 티가 나요. 수아 같은 애들은 발달도 빠른 편이고 똑똑해서 어쩌면 어렴풋이 짐작을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문틈으로 눈만 내놓고 자신을 가만히 보던 수아의 얼굴이 퍼뜩 지나쳤다. 아빠는 엄마랑 수아랑 리아가 제일 제일 중요하댔는데, 하고 천진하게 말하던 수아가 자기만 없어지면 엄마랑 리아가 행복하다고 말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누군가 심장을 꼭 붙드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눈가가 뜨끔거렸다. 여정이 원장실에 설치된 CCTV 화면을 가리키며 리모컨을 몇 번 눌렀다.
“이게 어제 오후 화면인데, 여기 구석에 있는 애가 수아거든요.”
윤은 여정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CCTV 화면 속에서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 사이에 수아가 앉아 있었다. 구석의 책장 앞에 무릎을 끌어당겨 안고 앉은 수아는 마치 그곳에서 유리된 작은 섬 같았다.
그 조그만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화면을 한참이나 앞으로 감아도 수아는 동상이라도 된 양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정이 다시 화면을 멈췄다.
“거의 하루 종일 이렇게 있어요. 선생님들이 말 걸어도 그때뿐이고, 잘 먹지도 않고요. 좋아하는 음식이 나와도 손을 잘 안 대니까 저희도 걱정이 너무 많았죠.”
“상담 받는 내용까지는 모르시죠?”
“네. 근처에 아동 상담센터 있어서 그쪽에 한 번 가 보시라고 알려 드리기만 했어요. 상담 치료 시작하셨다고 듣기는 했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안 그래도 수아 엄마가 애들 오늘부터 당분간 등원 못 할 것 같다고 하시던데요. 아무래도 그런 일도 있고 하니까 집에서 잠깐 쉬려나 보다 했어요.”
“알겠습니다. 담당 형사님 성함이나 연락처 혹시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윤의 질문에 여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잠시 무언가를 찾던 여정이 메모지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적어 뒀네요.”
메모지에는 ‘서대문경찰서 여성청소년계 정경수 경위’라고 쓰여 있었다. 여정은 그 이름을 서둘러 옮겨 적는 정언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방송에는 안 나가게 해 주실 수 있나요? 이런 일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저희도 굉장히 좀, 그렇거든요.”
“아, 네. 저희가 지금 취재하는 내용하고 관련이 있어서 온 거고, 직접적으로 어린이집 언급하거나 할 일은 없으니까 그런 부분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감사해요. 세상이 하도 흉흉하니까…….”
여정이 민망한 표정을 했다. 정언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넨 정언은 윤에게 가자는 눈짓을 하고는 먼저 원장실을 나섰다.
어린이집 근처에 세워 둔 차에 도착한 윤은 문을 열지 못한 채 눈가를 덮었다. 선명한 CCTV의 화면 속에서 웅크리고 앉은 조그만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는 탓이었다.
마주 선 정언이 윤을 빤히 보았다.
“그 어린애가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랬을까요?”
한동안 바닥을 보고 있던 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속이 답답해져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을 뿐이었다.
멈칫한 정언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윤의 곁에 등을 대고 섰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문 정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내가 열여덟 살 때 아빠가 돌아가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