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 선배하고 가까이 있으면 누구라도 선배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아무도 없는 숙직실 안에서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뒤이어 들어온 메시지는 담백했다.
― 아까 감사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하나 망설이며 메시지창에 수십 번 첫머리를 썼다 지웠다 하던 정언은 결국 답하는 걸 포기했다. 윤이 행여나 무슨 말이라도 하면 그냥 자느라 못 봤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윤은 그런 걸 묻지 않았다. 대답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한 건 말뿐이 아닌 듯했다. 고백한 쪽은 담담한데 왜 받은 쪽이 더 신경이 쓰이는지 생각하자 공연히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연구소 촬영 갔다 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중간에 연락 줘요.”
죄 없는 테이블 다리라도 걷어차고 싶은 것을 참은 정언은 애써 말을 돌렸다. 다행히 민혜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차 조심하고 잘 갔다 와.”
손을 흔드는 민혜를 뒤로하고 회의실을 나온 정언은 짧은 숨을 뱉었다. 그새 전화를 끊은 윤이 정언을 돌아보았다.
“지난번에 서온건설 다니는 형한테 고원종합기술공사 감리 담당자 명함 받았는데, 그쪽에 인터뷰 요청하려고 전화했더니 개인 번호는 안 받고 사무실에서 나중에 연락 주겠다고 하네요.”
“그래? 이름이 뭐야?”
“감리CM본부 민간1팀장 이종규요.”
그 이름을 입 안으로 다시 한 번 뇌어 본 정언은 알았어, 하고 대답하고는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이 모니터를 끄고는 미리 챙겨 둔 촬영 장비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정언이 세워 둔 차에 시동을 걸자, 조수석에 탄 윤이 자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법영상분석연구소 촬영 끝나고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일단 아동심리상담센터 성이진 교수님 잠깐 만날 거야. 어젯밤에 메일로 수아 문제 관련해서 도움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시더라고. 오후에 뭐 할 일 있으면 연구소 갔다가 다시 방송국 내려 주고. 아, 그 이종규 팀장하고 연결 한 번 더 해 봐.”
정언은 앞을 보며 대답했다. 그 말에 윤이 잠깐 웃는 소리를 냈다.
“아무 일 없어요. 촬영 마치면 고원에 연락해 볼게요.”
아무 일 없다는 건 결국 또 내내 붙어 있겠다는 뜻일 터였다. 상대적으로 노출이 안 된 윤 쪽이 자신과 떨어져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유로 윤을 떼어 놓을 자신이 없었다. 밤새 문 앞에 앉아 있으라고 해도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득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핸들에 머리를 박고 싶은 것을 참은 정언은 말없이 운전을 했다. 법영상분석연구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무실로 올라가자, 기다리고 있던 주성안 소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서 피디님, 오래간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정언이 가벼운 묵례로 답을 하자 성안이 안쪽의 1연구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교통사고 영상 분석 전문가인 양기영 연구원이 미리 와서 앉아 있었다. 윤이 촬영 준비를 하는 동안 기영이 미리 가져다 놓은 노트북과 영사 장비를 세팅하며 말했다.
“그래도 예정보다 좀 일찍 끝나서 다행이에요. 일이 많을 땐 확 많은데, 또 없을 때는 좀 한가하긴 하니까요. 이거 지나고 또 바로 일이 많이 밀려서요.”
“그러신 것 같던데요. 저희가 매번 촉박하게 요청해서 죄송합니다.”
정언의 말에 기영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촬영 전에 미리 말씀드리면 처음 보내 주신 사진은 영상이 아니라서 딱 이거다, 하고 저희가 확증을 할 수는 없어요. 영상이 있으면 더 확실한데 원체 옛날 자료더라고요. 가능성이 높다, 제가 그렇게 말을 할게요. 딱 확증하는 것처럼 제가 얘기하면 그건 좀 알아서 편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촬영 준비를 마친 윤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리에 앉은 기영이 노트북 화면을 스크린에 띄웠다. 박창도 국장이 보내 주었던 사고 현장 사진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기영은 포인터로 사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소스 자체가 워낙 오래된 거라서 저희가 일단 여러 차례 보정을 했습니다. 같이 보내 주신 자료에는 졸음운전 때문에 과속하다 회전하면서 충돌했다, 이런 식으로 돼 있었는데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저희가 자료상에서는 그런 소견을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대답이었다. 그건 결국 초동 수사가 엉망으로 진행됐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언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죠. 우선 차가 회전했다, 경찰이 왜 이렇게 추측했는지 제가 궁금한 거고요. 왜냐하면 차가 회전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여기서 보이지 않거든요. 도로면을 보시면, 이게 당시 새벽에 찍은 사진이라 어두운데 이 부분 밝기를 좀 올리면 노면에 타이어 자국이 드러나요. 회전을 하면서 이 정도로 심각하게, 차 앞부분이 완전히 파손될 정도로 충돌하려면 상당한 속도로 주행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일단 여기 타이어 자국을 한 번 보시죠.”
기영이 배열된 사진의 도로 부분에 포인터로 원을 그렸다.
“보통 도로에 남는 타이어 자국이 있다, 그러면 보통 스키드 마크(skid mark)18)라고 많이들 생각해요. 그런데 스키드 마크는 급감속 혹은 급가속, 급제동이 있을 때 나타나는 흔적입니다. 바퀴가 잠기면서 전방으로 미끄러질 때 도로면과의 마찰에 의해 나타나는 흔적, 이걸 스키드 마크라고 정의하죠. 이거하고 다르게 바퀴가 잠기지 않은 채로 회전하면서 옆으로 미끄러질 때 나타나는 흔적은 요 마크(yaw mark)19)라고 합니다. 주로 무리하게 과속하다 급선회할 때, 갑자기 핸들을 꺾었을 때 보이는 흔적이에요.”
“그럼 지금 여기 보이는 건 둘 중에 어느 쪽입니까?”
기영은 정언의 질문에 먼저 화면을 확대했다. 몇 번 키보드를 두드리자 확대된 화면이 보다 선명해졌다. 사진의 명도를 조금 조절한 기영은 확연히 뚜렷해진 타이어 자국을 따라 포인터를 움직였다.
“과속에 졸음운전 도중 어떤 이유로, 뭐 이 날 비가 왔다거나, 겨울이라면 노면이 얼었거나, 도로에 어떤 장애물이 있었거나 해서 감속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면서 충돌했다면 요 마크가 보이는 게 맞아요. 그런데 이건 전형적인 브로드사이드 스키드 마크(broadside skid mark)로 보이거든요. 이렇게 보시면 도로에서 횡으로 넓게 보이는 흔적이 있죠. 브로드사이드 스키드 마크라는 건 차량이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제동할 때 나타나는 패턴입니다.”
“그러면 일단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는 거군요.”
“그렇죠. 사진으로 판단할 때 차가 감속이나 제동 없이 회전했다, 이런 부분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여기 보시면 차가 한쪽 면으로 충돌하면서 그쪽에만 손상이 갔어요. 저희가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했거든요. 회전을 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제동하면서 핸들을 꺾었다가 측면으로 충돌했다, 이렇게 보는 게 타당합니다.”
기영이 확대한 사진의 위치를 옆으로 조금 옮겼다. 파손된 차량을 확대한 기영은 차 옆 부분에 선명하게 남은 스크래치 위를 포인터로 왕복했다.
“여기 보시면 아주 큰 스크래치가 남아 있어요. 옆에서 긁힌 자국입니다. 그런데 이게 차량이 추돌한 방향 반대편에 남아 있단 말이에요. 이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사고 차량은 은색 차량인데 이쪽에 검은색 도료가 전이된 부분이 확실히 보입니다.”
“이런 흔적은 보통 어느 때 나타나죠?”
“자료상으로 볼 때 검은색 차량과 도료가 전이될 정도의 밀착 충돌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게 당시에 상당히 고급 차량이었잖아요. 사고 전에 이미 이런 흔적이 있었다면 당연히 도색을 하거나 했을 겁니다. 이 상태로 탔을 가능성은 낮다는 거죠. 그런 점을 다 고려해서 스키드 마크의 방향을 봤을 때, 먼저 스크래치가 난 쪽에서 어떤 차량이 충돌했다. 그리고 운전자가 그 차량을 피하기 위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핸들을 틀었다, 이런 짐작이 가능한 겁니다.”
“당시 도로 상황을 보면 그런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까?”
“글쎄요. 이게 벌써 몇 십 년 전 아닙니까. 더구나 지방 도로예요. 통행량 자체가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지금 이 사진에서 봐도 사고 지역 표시해 둔 인근에 다른 차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어둡기 때문에 다른 차가 있다면 양쪽으로 광원이 보일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런데 일단 사진상으로 카메라 플래시 이외의 다른 광원은 확인할 수 없어요.”
고의적인 사고를 의심한 박창도 국장의 생각은 충분히 논리적이었다. 정언은 스크린에 떠 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닛이 거의 구겨지다시피 파손된 자동차는 오래된 사진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그날 밤의 일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영이 말을 이었다.
“이 스크래치가 백라이트 부근, 뒷좌석 문, 그리고 운전석 앞쪽에서 발견됩니다. 한 번 죽 긁고 지나간 것처럼은 보이지 않아요. 최소한 두 차례 이상의 충돌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거든요. 사고 차량이 정상적인 주행을 하고 있었다는 가정 하에, 이건 사고 유발 차량에 의한 충돌 사고 소견에 가까워 보인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고의성이 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까?”
“사진만 가지고 고의성까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황을 생각해 볼 때, 제가 이런 식의 자료를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대부분 보복 운전이에요. 일부러 사고를 내려고 들이받아야 이런 게 가능하다는 거죠. 보복 운전이 아닌 이상 이런 종류의 사고가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지막 말로 약간의 여지를 남겨 두기는 했으나, 결론은 명쾌했다.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영이 스크린에 뜬 사진을 모두 닫고는 두 번째 영상을 화면에 띄웠다. 대석의 사고 영상이었다. CCTV 화면을 확대한 기영은 화면을 잠시 멈춰 두었다가 포인터로 대석의 차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 차가 사고 차량입니다. 이 영상 같은 경우는 훨씬 명확해요. 전형적인 졸음운전 형태입니다. 이미 한참 뒤에서부터, 도로 진입하자마자 직선 주행 시에 차선 침범을 하죠. 술 취한 사람이 갈 지(之) 자로 걷는다고 하잖아요. 차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도 상당히, 여기서 보면 계속 좌우로 불안하게 운전을 하거든요. 이 지점에서 제일 가까운 휴게소가 3킬로미터 정도, 차로 먼 거리는 아니죠. 아마 휴게소로 가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기영이 화면을 재생했다. 영상 속에서 대석의 차가 위태롭게 휘청이듯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보시면 차량 통행이 적은 오른쪽 도로로 빠지죠. 여기까지는 이분이 의식이 있는 것 같거든요. 자기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자각하고 갓길에 차를 세우거나 하려고 했던 걸로 짐작이 돼요. 그런데 오른쪽으로 완전히 빠진 뒤에 얼마 못 가고 펜스를 들이받아 버립니다.”
화면에서 움직이던 대석의 차가 죽 미끄러지며 펜스와 충돌했다. CCTV 화면이라 충돌하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스크린을 보고 있던 윤이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기영이 화면을 정지시키고는 대석의 차를 다시 가리켰다.
18) 스키드 마크(skid mark) : 급제동이나 회전에 의해 노면에 생기는 타이어 자국. 제동에 의해 바퀴가 잠긴 상태에서 남는 자국을 스키드 마크라고 칭한다.
19) 요 마크(yaw mark) : 바퀴가 구르는 상태에서 진행 방향의 측면으로 미끄러지며 생기는 타이어 자국. 직선으로도 발생 가능한 스키드 마크와는 달리, 요 마크는 핸들의 움직임에 의해 발생하기에 반드시 곡선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