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졸음운전 사고는 순간적으로 벌어지니까 급감속이나 제동을 못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분도 그런 케이스예요. 그런데 뭐랄까, 제가 보기에는 오른쪽으로 빠지는 사이에 운전자가 거의 정신을 잃은 게 아닌가 의심이 돼요. 저희가 계산을 해 보면 당시 속도가 대략 시속 40킬로미터에서 50킬로미터 사이로 보이거든요. 과속은커녕 제한 속도보다 느리게 가는 상황이었어요. 게다가 도로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충돌하기까지 제동 거리가 충분했는데 사선으로 쭉 가면서 그대로 받아 버리잖아요.”
“그러면 차선을 변경하면서 충돌하기까지의 시간 동안 운전자가 상황 판단이 전혀 안 됐다는 거죠?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까?”
“아, 그렇죠. 약물로 인해 졸음이 온다, 이건 굉장히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니까요. 자기 몸을 컨트롤할 수 없으니 이런 사고가 일어날 확률도 높을 수밖에 없죠.”
기영이 정언의 말을 수긍했다. 정언은 메모를 하던 다이어리를 덮으며 기영을 마주 보았다.
“그러면 첫 번째 건은 사고 유발 차량으로 인한 충돌 사고, 두 번째 건은 졸음운전으로 인한 충돌 사고, 이렇게 정리할 수 있나요?”
“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백 퍼센트다, 이건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보내 주신 자료에 보니까 두 번째 차량 운전자분 부검 결과 디펜히드라민이 검출됐다고 했는데, 약물에 의한 사고가 굉장히 많거든요.”
약간의 겸양과 더불어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두는 대답이었으나, 기영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몇 줄의 초동 수사 기록보다는 과학적으로 분석한 정황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정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영이 영상을 닫고는 노트북을 덮었다. 정언은 윤에게 컷 신호를 보냈다.
“매번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언의 인사에 기영이 아휴,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 아닙니다. 저희가 갑자기 일정 당겨서 죄송하죠. 어쩌다 보니까 좀 빨리 끝나게 돼서요. 워낙 시간 아껴 쓰시는 팀이니까 하루라도 빨리 뵈면 더 나을까 싶어서…… 그런데 회사는 괜찮으신 겁니까? 뉴스 보니까 위에서 막, 그런 게 심하다고 하던데요.”
“요즘은 가는 데마다 다들 걱정부터 하시네요.”
웃는 얼굴로 그 말을 받아넘긴 정언은 적당히 둘러댔다.
“상황이 막 좋은 건 아닌데 또 아주 나쁜 것도 아니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YBS 뉴스 뜨면 저희도 마음이 불안하고 그렇더라고요. 세상이 참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혹시 다른 부분, 문의하실 거 있으시면 또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네, 감사해요.”
기영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윤이 장비를 모두 정리한 것을 본 정언은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연구소를 나와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다시 시동을 건 정언은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오늘의 첫 일정이었는데 벌써부터 피로감이 쌓이는 기분이었다.
운전석에 올라타 시트에 등을 댄 정언이 미간을 누르며 윤에게 말했다.
“윤대석 씨한테 약 처방한 의사 더 알아봐야겠어. 캐나다로 이민 갔다고 했나?”
“네.”
“캐나다 교민 커뮤니티, 페이스북 이런 쪽에 그 사람에 대해 제보 달라고 일단 글 올려 봐. 교민 사회 좁고 의사였으니까 아는 사람 금방 나올 거야.”
“알겠습니다.”
윤이 핸드폰으로 뭔가 검색하며 대답했다. 정언은 아동심리상담센터로 차를 돌리며 희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서너 번 가기 무섭게 희경이 전화를 받았다.
『네, 피디님.』
“안녕하세요. 저희가 어제 어린이집 들러서 원장님하고 잠깐 얘기했는데 수아하고 리아 당분간 등원 안 시킨다고 하셨다고 해서요. 벌써 옮기신 건가요?”
『네. 어제부터 언니 집에 와 있어요. 형부가 해외 장기 출장 나가 있어서 언니가 빨리 오라고 해서요. 간단한 짐만 챙겨서 왔어요.』
“수아 상태에 대해서도 얘기 잠깐 들었는데, 혹시 상담 선생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수아의 이야기를 꺼내자 희경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애가 아직 선생님한테도 무슨 얘기를 잘 안 하려고 해서요. 선생님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아, 그러시구나. 저희 쪽 전문가 분한테 일단 연락을 해 뒀거든요. 제가 지금 그분 만나러 가는 길인데, 얘기가 잘 되면 수아를 이쪽에 한 번 보이면 어떨까 싶어서요.”
정언의 말에 희경이 깜짝 놀란 투로 대답했다.
『어머,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 주셔도 되는데…… 어떡하죠, 피디님. 정말 감사해요.』
“아닙니다. 혹시 그 뒤에 회사에서 다시 연락 온 건 아직 없었죠?”
『네.』
“알겠습니다. 만약에 연락 오면 저희한테 바로 알려 주세요.”
핸즈프리의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은 정언은 가벼운 두통 탓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지 않아도 고질병인 두통이 요즘은 더 수시로 찾아들었다. 저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뱉은 정언은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다.
윤이 곁에서 흘끔 이쪽을 보는가 싶더니 가방을 뒤져 무언가를 내밀었다. 무심코 윤의 손으로 시선을 준 정언은 멈칫했다. 에너지 바 하나와 늘 먹는 진통제였다.
“지난번에 보니까 이 약 사다 놓고 드시는 거 같아서요. 물어보니까 빈속에 먹으면 속 쓰리다고 그래서…… 아침 안 드셨잖아요. 이거 먼저 드시고 약 드세요.”
에너지 바 포장을 까서 아예 정언의 손에 쥐여 준 윤은 곁에서 물병 뚜껑을 땄다. 이미 거절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라, 당황하던 정언은 머뭇거리다 손에 들린 에너지 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단 초콜릿과 견과류가 입 안에서 낯설게 씹혔다.
뒤늦게 고마워, 하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리자 윤이 미소를 지었다.
“선배한테 고맙다는 말 듣는 거 좋은데요.”
그런 말은 듣는 사람이 낯 뜨거워 죽을 것 같으니 속으로 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순간 윤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럴 때 선배 귀엽다고 하면 화내실 거죠?”
그 말에 화를 낼 틈도 없이 넘어가던 땅콩 조각이 목에 걸렸다. 입을 틀어막으며 콜록거린 정언은 서둘러 물을 마셨다. 곁에서 빤히 이쪽을 보는 윤의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곁눈질한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망할 자식, 어디서 이런 게 굴러 들어온 걸까. 차 안만 아니었다면 당장 민망함에 어딘가로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듣는 사람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정언은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27.
“사무실 밖에만 있어도 살겠어, 진짜.”
민혜가 카페의 소파에 몸을 묻으며 흑흑 우는 시늉을 했다. 커피를 가져오던 윤이 그 말에 웃고는 민혜와 정언의 앞에 컵을 놓아 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똑같이 일하는 건데도요?”
“그래도 장소가 바뀌면 기분도 바뀌잖아요. 물론 뭐 이런 효과를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린 민혜가 컵 안을 가득 채운 휘핑크림 사이로 빨대를 찔러 넣었다. 오후에 사무실로 돌아오자, 재희가 할 얘기가 있다며 밖에서 보자고 해서 방송국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카페 2층에 자리를 잡은 참이었다.
“근데 생각하니까 열 받네. 커피 값은 비용 처리도 안 해주는데 회사에서 안심하고 회의도 못 하게 해?”
“그래서 정규직인 내가 샀잖아요. 비용 처리고 뭐고 이거 방송만 했으면 좋겠네.”
투덜거리는 민혜의 얼굴에 정언이 옆에서 말을 보탰다. 커피를 마시며 시계를 본 정언이 왜 안 와, 하고 중얼거리기 무섭게 계단을 탁탁탁 뛰어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재희가 나타났다.
자리에 앉은 재희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탁자 위에 던져 놓고는 미리 가져다 놓은 컵 뚜껑을 열어 커피를 마셨다. 민혜가 짐짓 눈을 흘겼다.
“어우, 하여튼 양반 못 돼. 자기 얘기만 하면 오는 거 봐.”
얼음 조각 하나를 소리 나게 씹은 재희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송 작가가 내 욕 5분 이상 하게 내버려 둘 수 없거든.”
재희가 탁자 위에 놓아 둔 파일을 턱으로 가리켰다.
“일단 파일부터 봐봐. 원진솔 기자가 준 건데, 작년에 분양한 장원지구 스타일하우스 커뮤니티에 그런 글이 꽤 올라와 있대. 다른 데도 비슷한데, 장원지구가 진송신도시랑 똑같은 에코프리미엄 라인이라 여기 주목하고 있나 봐.”
윤은 파일을 펼쳐 보았다. 인터넷 카페 글을 프린트한 것이었다. 상단에는 ‘장원지구 스타일하우스 에코프리미엄 6단지 입주민 모임’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수십 장이나 되는 프린트의 내용 대부분이 이유 없는 두통이나 아이들의 아토피 악화를 호소하는 글이었다.
민혜가 그 중 한 장을 집어 들고는 소리를 내어 읽었다.
“‘1005호 최영원, 저만 그런가요? 입주한 지 6개월 됐는데 몇 달 전부터 작은애 아토피 증세가 너무 심해졌어요. 원래 아토피 있긴 했는데 요즘은 밤에 거의 잠을 못 자네요. 혹시 애들이 같은 증상 있는 분들 계세요?’, 밑에 댓글도 스무 개 가까이 되네? ‘2104호 김예진, 저희 애도 입주 후에 아토피 심해졌어요. 회사에 문의하니 어느 정도의 새집증후군 현상은 어쩔 수 없다네요. 입주 전에 보일러 돌리고 환기 자주 해서 조치를 취했어야지 그건 자기들이 어떻게 해줄 수 없대요.’”
“이런 게 한두 명이 아니면 왜 여태 조용했지? 이거 되게 민감한 문제인데.”
정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재희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일단 그 댓글 내용처럼 새집증후군 현상은 어쩔 수 없다는 게 회사 매뉴얼인 것 같아. 사람마다 민감도가 다르고, 자기들은 유해 물질 기준치 이하 친환경 자재만 사용한다 그거지. 그리고 에코프리미엄은 무덕트 환기 장치가 기본 옵션이란 말이야.”
“무덕트 환기 장치가 뭐야?”
민혜의 물음에 재희가 대답했다.
“덕트라는 게 기체나 액체 같은 게 지나가는 관을 얘기하는데, 이런 덕트 없이 설치하는 환기 장치를 그렇게 부른대. 몇 년 전부터 아파트에 이거 설치하는 데가 좀 있다고 하더라고. 이게 문제가 되는 게, 새집증후군 최초 배상 판례가 2004년이야. 새집증후군으로 생후 7개월 된 딸한테 피부염이 생겼다고 소송 걸었거든. 이때 법원 측에서 건설사 책임 인정해서 치료비, 공기 질 개선비, 위자료 명목으로 3백만 원 지급하라는 판결 내렸어. 이 판례 가지고 볼 때 서온건설은 서류상으로 친환경 자재 사용했고, 실내공기 질 개선을 위해 환기 장치 기본 옵션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일단 책임을 면피할 소지가 있다고.”
“최초 판례가 2004년이면 민 의원님이 그 전에 어떻게 승소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