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자세히는 얘기 안 했는데, 일단 통화 녹취가 있다고 하네. 메시지하고 사진, 통화 기록 지워진 것도 복원했고. 내용이 뭔지는 가서 봐야 알 것 같아.”
정언은 메시지창에 뭐라고 연신 답을 보내며 대답했다. 흘끔 보니 아마 아까 만났던 아동심리상담센터의 성이진 교수인 듯했다.
정언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들어온 메시지를 한참 보고 있었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며 시각장애인용 알림이 울리자, 정언이 핸드폰에 눈을 둔 채 걸음을 내딛었다.
다음 순간, 윤은 즉시 정언의 팔을 낚아채 뒤로 확 끌어당겼다. 놀란 정언이 윤을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방금 서 있던 자리 바로 앞으로 엄청난 소리를 내며 자동차가 지나갔다. 곁에 서 있던 사람들도 미친 놈 아냐, 하고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정언이 자동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서 달려올 때부터 주시하던 차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기에 이런 일을 예상한 게 다행이었다. 조금 당황한 표정을 하던 정언이 멈칫하며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선배, 괜찮으세요?”
“아, 뭐…….”
윤의 물음에 정언이 무심결에 고마, 까지 말하다 즉시 입을 다물었다. 반사적으로 고맙다고 말하려던 게 틀림없었다. 선배한테 고맙다는 말 듣는 게 좋다고, 그럴 때 귀여워 보인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런 말에 신경이 쓰였던 건가 싶어 놀란 것도 잠깐, 저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럴 때 귀엽다는 건 진심이었다. 그런 생각은 최대한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깨달은 시점에서는 이성과 표정이 이미 따로 놀고 있었다.
정언이 화가 난 건지, 창피해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본 윤은 뒤늦게 아차 싶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 와중에도 이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일까, 혹은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일까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잠시 말이 없던 정언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윤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윤이 얼른 손을 떼자, 정언이 이미 신호가 깜빡이기 시작한 횡단보도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평소에도 걸음이 빠른 정언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축지법이라도 쓰는 기세라 윤은 황급히 뒤를 쫓아갔다. 방송국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와 차에 시동을 건 정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이대로라면 정언이 자신을 버리고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윤이 서둘러 차부터 붙잡고 조수석에 몸을 들이밀어 간신히 문을 닫자, 정언이 약간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기분이 상한 건가 싶어 눈치를 보던 윤이 선배, 하고 운을 떼기 무섭게 정언이 액셀을 밟았다.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이라, 정언이 레이서처럼 지하 주차장의 커브를 돌아 나가자 순간적으로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다급하게 안전벨트를 찾아 매는 윤에게 정언이 내뱉었다.
“김 피디, 앞으로 내 앞에서 귀엽다, 예쁘다, 아무튼 그런 종류의 말 전부 다 금지야. 입 밖으로 내기만 하면 두 번 다시 그 말 못 하게 만들 줄 알아.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냐.”
맘에 없는 소리를 하는 법이 없는 정언이었기에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건 당연했다. 그런 소리를 두 번 다시 못 하게 만들 방법이 뭘까 문득 궁금했지만, 어쩐지 무서워져 그다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장 목이라도 칠 것처럼 말하는 그 서늘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빨간 귀 끝이 곧 눈에 들어왔다. 윤은 서둘러 시선을 돌리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이대로라면 어떻게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못 하게 될지 직접 체험할 날이 머지않았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등줄기를 엄습했다.
이러는 게 더 귀엽다는 거 알긴 할까, 하고 속으로 생각한 윤은 턱을 괴는 척 표정을 감췄다.
* * *
“저희가 복원 작업을 해 보니까 기기 자체에 어떤 전문가적인 처리, 그런 건 가해지지 않았다는 거죠. 흔히 이제 사용자들이 하는 공장 초기화,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기록을 삭제만 한 겁니다. 그러니까 복구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고요.”
이섭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들을 손끝으로 치며 말했다. 정언은 스크린에 뜬 핸드폰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이미 단종된 폴더폰 기종이었다.
“어느 정도 사용된 핸드폰인지 알 수 있습니까?”
“개통은 작년에 된 거더라고요. 대포폰인데 아마 노숙자 명의로 개통이 된 것 같고, 저희가 확인해 보니까 자주 통화하는 번호가 정해져 있어요. 특정인과 연락하기 위한 용도로 개통했던 것 같습니다.”
“조창식이 사용한 건 맞고요?”
“문자 내역이나 사진, 통화 녹취 같은 자료가 있어서 분석을 했습니다. 일단 분석팀 소견은 이 기기를 확실히 조창식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왔어요. 일단 복원된 사진 자료가 이건데 많지는 않습니다.”
이섭이 노트북의 파일을 클릭해 스크린에 화면을 띄웠다. 폴더 안의 썸네일을 차례로 클릭하자, 폴더폰으로 찍은 사진들이 나타났다. 경일용역 사무실 건물을 찍은 사진과 진송신도시 현장 사무실 사진 등이었다.
사진을 보고 있던 정언은 잠시만요, 하고 이섭을 멈추게 했다. 화면에 떠 있는 것은 현장 사무실을 배경으로 번호판이 나오게 찍힌 자동차였다. 그 사진을 본 정언이 멈칫하며 이섭에게 물었다.
“이거 차적 조회해 보셨나요?”
“아, 네. 지난달에 상속이전등록 됐던 차더라고요. 이희경 씨라고.”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규형의 자동차가 분명했다. 이섭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언을 마주 보았다.
“아는 분입니까?”
“이희경 씨가 사망하신 현장 과장님 박규형 씨 부인 되시는 분이에요. 저희가 이 자동차를 한 번 본 적이 있어서요. 원래 박규형 씨 소유로 돼 있던 차 맞죠?”
“네. 아까 전화해서 확인했더니 남편 사망 후에 명의 변경했다고 하시더라고요.”
현장 사무실 앞에서 굳이 규형의 차를 찍은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창식의 핸드폰에 규형의 차가 찍혀 있다는 건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터였다. 이섭이 출력해 놓은 종이 몇 장을 정언과 윤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저희가 추출한 통화 목록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단 대부분 다 없는 번호로 뜨고요, 아까 그 사망하신 박규형 씨 명의로 된 번호하고 통화한 내용 녹취된 게 있습니다.”
“통화 녹취가 있다고요?”
정언이 되묻자 이섭이 대답 대신 노트북의 파일을 클릭했다. 곧 음성 파일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음질이 약간 떨어지는 편이기는 했으나, 내용을 알아듣기 어렵지는 않았다.
『지난번에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저도 더는 힘들어서 못 하겠습니다. 저 집에 애가 둘입니다. 부인하고 애 둘 키우겠다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틀자마자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곁에 앉아 있던 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규형의 메모리카드에 들어 있던 바로 그 녹취 파일이었다.
이미 수십 번은 더 들었을 짧은 대화가 흘러나왔다. 이미 규형의 핸드폰 통화 목록을 뽑아 대조했기에 그 상대가 창식일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같은 파일이 창식의 핸드폰에도 저장돼 있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이 통화를 한 사람이 조창식 맞습니까?”
정언이 물은 말에 이섭이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였다.
“저희가 조창식 목소리를 모르니까 그게 맞다, 아니다 이건 판단이 안 되죠. 그런데 일단 다른 녹취 파일까지 음성 분석팀에서 다 비교했는데, 이 전화를 한 사람하고 나머지도 전부 동일인이라고 분석 결과지 보내긴 했더라고요. 그러면 사실상 조창식이 자기 통화 내용을 녹음했다고 봐야죠.”
“다른 녹취 파일 내용도 들어 볼 수 있나요?”
정언이 다급하게 묻자 이섭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던 이섭이 다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재생 바가 시작되기 무섭게 이미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님, 저 조 군입니다.』
순간, 당시 허주경 사장에게 살인을 사주한 남자가 일을 마친 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저 조 군입니다, 라고 말했다는 재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런 습관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흔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언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낌새가 영 안 좋아.』
『어디다 불어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냥 더 끌지 말고 바로 자르자고. 어르고 달래는 것도 하루 이틀이야. 애초에 반골인 새끼라 오래 못 갈 줄 알았다. 의원님도 빨리 처리해 달라고 하셨고.』
촬영을 하고 있던 윤이 정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손경일 같은데요, 이거.”
정언은 대답 대신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댔다.
『어떻게 할까요?』
『그거는 뭐, 알아서 해. 흔적 안 남게. 그리고 처리하면 사무실하고 핸드폰 꼭 뒤져 보고. 혹시 배달 다니면서 뭐 찍거나 녹음하거나 그런 거 없는지 확실히 확인을 해. 그거 아무래도 거지새끼들 데모하는 데 다니면서 변호사나 기자나 이런 애들하고 무슨 말 맞추려고 하는 거 같다고.』
『언제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뭘 질질 끌어.』
『알겠습니다.』
파일은 거기서 끊겼다.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차라리 아니기를 빌며, 정언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이섭을 마주 보았다.
“이 녹취 생성 날짜가 언제죠?”
“자료에는 2월 1일 13시 27분으로 돼 있네요.”
심장이 덜컥 움직였다. 희경이 창식에게서 규형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은 건 3일 아침의 일이었다. 확인 사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물론 녹취 파일에서 조창식과 손경일이 처리하자고 하는 대상이 규형이라는 건 첫마디를 들은 순간부터 직감한 것이었다. 대화 내용을 볼 때, 창식이 규형과 통화한 뒤 그 내용을 손경일에게 말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타인의 목숨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벌레 한 마리를 죽이듯 쉽게 명령을 내리고 받아들이는 그 짧은 통화는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정언은 떨림을 감추기 위해 펜을 더 꽉 움켜쥐었다.
“이게…… 이게 아주 중요한 증거인데요, 저희한테. 여기서 지금 두 사람이 언급하는 부분이…….”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정언은 아무것도 아닌 양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언급하는 부분이 사망한 현장 과장 박규형 씨에 대한 걸로 보이거든요. 이 통화가 2월 1일 오후에 이루어졌고, 박규형 씨가 사망한 건 2일 밤에서 3일 새벽 사이입니다. 앞의 통화 녹취 파일은 그것보다 사흘 전에 만들어졌을 겁니다. 들어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박규형 씨가 회사에 관련된 일로 조창식하고 충돌이 좀 있었습니다. 조창식이 그걸 이 통화를 한 상대에게 보고했고,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아요.”
“피디님, 그러면 이게 확실히 살해 사주에 관련된 내용이 맞습니까?”
표정이 변한 이섭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정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