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39
139화.
“일단 저희가 취재 내용을 지금 전부 말씀드릴 수가 없는 점은 양해를 해 주시고요. 박규형 씨가 사망했을 때 최초 목격자가 조창식으로 돼 있는데, 조창식이 현장에 있었다면서 유가족에게 전해 준 핸드폰에서 조창식하고의 통화 목록만 지워져 있는 걸 저희가 이미 확인했습니다. 조창식이 박규형 씨 핸드폰에 손을 댔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거든요. 이 통화에서 사무실하고 핸드폰을 뒤져 보라고 얘기를 하네요.”
일이 커졌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하는 기색을 하던 이섭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고야, 이게…… 담당이 의정부서라고 하셨죠?”
“그쪽에서는 처음부터 자살이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초동수사도 상당히 부실하게 됐고요, 의심 가는 정황을 유가족이 여러 번 얘기했는데도 다른 조치가 없었어요.”
정언의 말에 이섭은 얼굴을 찌푸렸다. 한동안 말을 고르는 듯 침묵하던 이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우선 그쪽에 사건 기록을 요청해 보죠.”
“지금 이거 외에도 녹취 파일 남은 게 있나요?”
“이 기기에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도 들려 드릴게요.”
이섭이 서둘러 다음 파일을 재생했다.
『입금이 안 돼서 전화 드렸습니다.』
시작하자마자 흘러나온 창식의 목소리는 다소 심기가 불편한 사람처럼 들렸다. 돌아온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당장 그 돈 없다고 어떻게 돼? 상황 돌아가는 거 알잖아. 우리 쪽에서 지금 뭐 1원 한 장도 마음대로 막 움직일 수가 없다고.』
아까와 같은 상대였다. 분명 손경일과의 통화인 게 확실했다. 곁에서 윤이 손을 깍지 끼어 입가에 대며 온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애들 편에 현금으로라도 보내 주셔야 할 거 아닙니까. 감방 가도 지금 이것보다는 낫겠습니다.』
『방송국에서 붙은 거 알고 위에서 자금 다 묶어 놔서 나도 만 원 한 장 내 맘대로 못 써, 지금. 당분간은 그냥 나 죽었소 하고 있으라니까.』
『이게 지금 몇 달째인데요. 제가 참다 참다 얘기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일을 똑바로 했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위에서 아주 돌아가면서 얼마나 깨졌는지 알아? 너 이 새끼 일 허술하게 처리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여태까지는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 일로 상황 아주 개같이 됐다고!』
경일이 고함을 쳤다. 정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규형의 일을 말한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가 붙게 된 걸 창식의 탓이라고 비난하는 게 틀림없었다. 자신들이 현장 사무실로 찾아간 직후부터 창식이 현장에 나오지 않은 건 경일의 뜻인 듯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이젠 제 탓 하십니까?』
『그럼 누구 탓이야, 이게?』
『증거가 없다고 짭새도 손 놨는데 방송국 붙은 게 왜 제 잘못입니까? 처음부터 제가 그 새끼 짱개로 쓰지 말자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결정은 위에서 다 하시면서, 이제 일 틀어질 거 같으니까 밑에서 설거지하는 놈만 좆 되게 하려고요?』
『야, 인마!』
『내가 씨발, 형님 밑에서 산전수전이 몇 년인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줄 압니까? 내가 입 털면 대가리 한두 개 날아가는 걸로 안 끝나요. 전에 온 기자한테 나 연락 끊기면 찾아가라고 맡겨 둔 것도 있으니까 나 어떻게 할 생각 하지 마쇼. 긴말 말고 당장 애들 편으로 돈 보내요. 내일까지 소식 없으면 나도 이제 안 참습니다.』
통화 내용은 그것이 끝이었다. 정언은 다이어리에 기자, 하고 메모하며 거기 원을 그렸다. 이섭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조창식이 조폭 출신이잖아요. 이 통화 내용 봤을 때도 아마 조직이 관련돼 있다, 그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상대가 돈을 주는 척 조직원을 보내 제거하라고 명령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 느낌이죠.”
“그러네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자가 누구죠?”
정언의 물음에 이섭이 통화 목록을 출력한 문서를 정언의 앞으로 돌려놓으며 그 중 한 번호를 가리켰다. 목록 가장 위에 남겨진 번호였다.
“이 번호인데, 저희가 확인해 보니까 임형원 기자 번호더라고요. 그런데 이 번호가 연결이 안 됐어요. 임형원 기자가 조창식이 죽기 직전에, 그러니까 한 2주 좀 더 됐죠. 그 직전에 취재 때문에 해외 출장을 갔답니다. 아마 로밍이 안 된 상태거나 전파 수신 불가 지역이라 임형원 기자하고 통화를 못 한 것 같습니다.”
이라면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 발간되는 일간지였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이미 30년 가까이 된 곳이었고, 주요 일간지 출신의 중견 기자들이 중심이라 취재력은 상당했다. 중도 성향이나 진보 성향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도가 높은 매체기도 했다.
정언은 데일리시사 인 서울 임형원, 하고 서둘러 목록의 전화번호를 메모하고는 이섭을 마주 보았다.
“그러면 아직 임형원 기자님은 한국에 안 돌아오신 겁니까?”
“거기 출입기자한테 물어보니까 이번 주에 복귀한다고는 하던데요. 모레쯤 출근한다고요.”
“아, 그러시구나. 저희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핸드폰으로 조창식하고 통화한 상대가 경일용역 사장 손경일인 것 같은데요, 혹시 저희 쪽 소스로 음성 분석이 가능할까요? 저희가 손경일하고 인터뷰를 한 소스가 있거든요.”
정언의 말을 들은 이섭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면 저희는 정말 좋죠. 분석팀에 바로 넘겨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무실 돌아가는 대로 보내 드릴게요. 현장 분석 결과는 나왔습니까?”
“과학수사팀 넘어가 있는데 아직 분석 중이라서요. 이번 주 안으로는 나올 겁니다. 일단 저희가 용의자 추적 중인데, 사흘 전에 강원도 지역 렌트카 업체에서 김성학 명의로 차량 렌트했더라고요. 업체 내부 CCTV로 확인했는데 김성학하고 장영관 둘이 동행했습니다. 수배 내렸으니 금방 잡히겠죠.”
“알겠습니다. 혹시 체포하시면 꼭 연락 주세요.”
“그럼요.”
정언이 다이어리를 덮어 가방 안에 넣자 곁에서 윤이 촬영 장비를 서둘러 정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언은 이섭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제보 주신 덕분에 아주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짧은 악수를 건넨 정언은 윤과 함께 경찰서 건물을 나섰다. 곁에서 카메라 가방을 고쳐 메던 윤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잠시 멈춰 서서 화면을 스크롤했다.
그사이 주차장에 세워 둔 차 문을 연 정언이 먼저 운전석에 타자, 뒤따라 뛰어온 윤이 조수석에 앉으며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선배, 이거 한 번 보세요.”
정언은 윤의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메일 화면이 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거기 시선을 주었던 정언은 곧 눈을 가늘게 떴다.
밴쿠버 지광선교한인교회 목사 황정률입니다. 에서 김회영 씨에 대한 제보 받는다는 소식 듣고 연락드립니다. 저는 김회영 씨의 캐나다 연방 전문인력이민 과정22)에 도움을 준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화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메시지에는 교회 주소와 전화번호가 함께 적혀 있었다. 정언은 미간을 누르며 물었다.
“밴쿠버하고 여기 시차가 얼마지?”
“서머타임 적용해서 16시간이요.”
정언은 피곤한 눈가를 누르며 윤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러면 거기는 지금 새벽이겠네. 내일 워킹타임 중에 연락해 봐. 이거 어디다 뭐라고 하고 제보 받은 거야?”
“캐나다 교민 커뮤니티 검색해서 한인 교회 담당 목사들하고 동호회 회장들 연락처로 메일 돌렸어요. 작년에 캐나다로 이민 간 김회영 씨에 대해 아는 분 제보 달라고 서울대 의대 졸업년도하고 병원 운영했던 거 적어서 보냈고요.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 쓸까 하다가 그러면 너무 공개되는 것 같아서…….”
“졸업년도는 어떻게 알았어?”
“구글 검색하니까 바로 나오던데요.”
씩 웃는 윤의 얼굴에 잠시 눈이 머물렀다. 윤을 마주 보던 정언은 눈썹 위를 긁적였다.
“교양국에서도 이렇게 빠릿빠릿했어?”
“최진수 부장님이 지금 선배 말 들으면 기절하실 텐데 아쉽네요, 저 혼자 들어서.”
“피디 다 됐네.”
“선배 없었으면 아직도 동사무소 직원이었죠.”
여상한 말투였으나, 그 단어들은 문득 차가운 컵 위로 맺히는 물방울처럼 심장 부근 어딘가에서 동그랗게 응결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타인의 삶을 지나 왔지만, 정언은 단 한 번도 거기에 자신의 흔적이 남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타인의 삶 속에서 이미 종결된 어떤 순간들을 따라갈 때, 정언은 자신을 늘 관찰자라고 느꼈다.
거리를 두고, 감정 없이, 개입하지 않는. 영원히 폐쇄된 박물관을 홀로 걸어 다니는 큐레이터처럼. 고독은 익숙했고 이미 완결된 모든 삶은 화면 속에서, 자신과 동떨어진 곳에서 보존되어야 했다. 방송이 끝났을 때 거기 서정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윤의 삶 속에 자신이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정언은 모든 순간이 낯설어졌다. 아직 전시된 적 없는 미완성의 그림 위에 붓을 대듯, 종결되지 않은 윤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긴다는 건 때로 두려운 일이었다. 무심코 지나친 한 번의 선으로 모든 걸 망쳐 버릴까 봐.
정언은 애써 윤의 단정한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이런 생각을 할 리 없었다. 초대한 적 없는 불청객. 그러나 돌려보내기엔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내뱉은 한숨 사이로 미처 감추지 못한 두려움이 스몄다.
* * *
연신 메모를 하며 통화를 마친 윤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바로 전화기의 메모리카드를 뽑아 방금 녹취한 파일을 핸드폰으로 옮긴 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저녁 메일을 보내 온 황정률 목사와의 통화였다.
정률이 김회영 원장을 알게 된 시기는 대석이 사망한 직후였다. 정률이 담당하고 있는 지광선교한인교회는 밴쿠버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한인교회였다. 때문에 교인들이 교회 내부에서 친척이나 지인 등의 이민 상담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때 교인 중 사업을 하는 정양훈 사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양훈이 자기 후배가 캐나다 이민을 생각한다며 정률에게 도움을 요청해 처음 회영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회영은 어떤 방법으로든 좋으니 무조건 가장 빨리 이민을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한국에서 개원의로 상당한 경력이 있었기에, 정률이 추천한 방법은 캐나다 연방 전문인력이민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민부에서 서류 적체 기간이 상당해, 대략 넉넉하게 1년 정도 잡고 준비하면 될 거라고 답변했더니 회영은 펄쩍 뛰었다. 그렇게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회영은 우선 부인과 아이들부터 캐나다에 보내 놓고 이민 절차를 밟겠다고 했다.
정률은 그를 아주 특이한 케이스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다른 준비는 물론이고 아이들 입학에 필요한 서류조차 제대로 구비하지 않은 바람에, 아이들이 현지 국제학교에 입학하는 데만 일 년 가까이 걸렸다. 아이 교육이 걸려 있는데 부모가 그렇게 준비가 안 된 채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률이 정말 이상하게 생각한 건 그 뒤의 일이었다.
22) 캐나다 연방 전문인력이민 과정 : 캐나다는 인력난의 해결을 위해 전문·기능직 인력의 이민을 장려하는 전문인력이민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특히 2015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급행이민(Express entry)의 경우 선발된 사람에 한해 이민 신청이 가능한 제도로, 연방 전문인력이민, 연방 전문기술인력이민, 캐나다 경력이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전문의, 일반의, 가정의, 치과의사 등의 의료 인력은 전문인력이민 신청이 가능한 부족직업군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