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한 한인 병원에서 회영에게 잡 오퍼를 냈다. 현지에서 잡 오퍼를 받은 상태라면 받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유리했기에, 정률은 평소처럼 회영에게 교인이 운영하는 이민 컨설팅 업체를 소개하고 업체에 서류 진행 등을 부탁했다.
그 뒤로 잠시 회영을 잊고 있던 정률은 어느 날 예배 후 업체 대표와 만났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외교부에서 연락이 와 김회영 씨의 서류를 가장 먼저 처리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캐나다에서 이민 컨설팅 업체를 운영한 지 20년 이상이 되었지만 그런 케이스는 한 번도 없었다. 장난이거나 신종 사기인가 생각한 건 당연했다. 그러나 정률이 외교부로 전화해 통화한 사람을 다시 찾자, 외교부에서 직접 그 직원의 소속과 신원까지 확인해 주었다.
동네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가 뭐라고 한국 외교부에서 직접 연락이 올까 궁금해진 건 당연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회영은 실제로 당시 함께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에 비해 이례적으로 빨리 영주권을 승인받았다.
좁은 교민 사회의 평판을 의식했는지, 회영과 그의 가족은 한인 커뮤니티의 사람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문은 늘 막기 힘든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나온 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회영이 한국에서 한선당 국회의원과 무슨 줄을 댔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고 했다.
실제로 회영에게 잡 오퍼를 내준 한인 병원의 원장은 한선당 해외동포위원회 소속의 당원이었다. 처음 정률에게 회영의 이야기를 꺼낸 정양훈 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정률은 그런 것이 정말 관련이 있는지까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서온건설 게이트와 동네 병원 의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윤은 정률과의 통화에서 쉽게 하나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한국에서 김회영 원장을 치워야만 했을 사람은 누구일까. 그렇게 간단히 외교부 직원과 현지 당원들을 움직일 만한 권력의 시발점은 어디일까.
답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윤은 다이어리와 파일을 챙겨 들고 서둘러 2층 휴게실로 내려갔다. 휴게실 구석에 마주 앉아 심각하게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있는 정언과 민혜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정언의 옆 빈자리에 앉자, 민혜가 말을 멈추며 윤을 마주 보았다.
“통화 끝났어요?”
윤은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네. 이거 완전 수상해요. 김회영 원장 이민 관련해서 황정률 목사한테 처음 소개한 사람하고 잡 오퍼 내준 한인 병원 원장 둘 다 한선당 해외동포위원회 소속이에요. 그리고 컨설팅 업체에 외교부 직원이 직접 전화를 했고, 영주권 발급도 이례적으로 빨리 됐다는데요.”
“외교부 직원이?”
민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하고 이름 알려 달라고 해서 지금 내려오는 길에 검색해 봤거든요. 외교부 조정기획관 직원으로 있던 박천웅이라는 사람인데, 신환석이 민정수석 되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들어갔어요.”
“아우 나 못 살아, 진짜.”
민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화장 따위 죄다 지울 기세로 벅벅 문질렀다. 없던 두통이 생긴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린 민혜가 들고 있던 펜으로 탁자 위를 두드렸다.
“그 김회영 원장이 하던 병원 간호사 있잖아요, 최정미 씨. 최정미 씨 증언이 경찰 수사 기록에 포함이 안 됐잖아. 저번에 김 피디가 수사관 알아봐야 된다고 하길래 그거 내가 알아봤는데, 이거 담당한 사람이 지금 서울 서부경찰서에 있는 신관호 경정이야. 이 사람이 재작년에 뇌물 수수로 징계 받은 이력이 있어요.”
“뇌물이요?”
윤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민혜가 손을 내저었다.
“근데 이게 중요한 게 아냐, 지금. 이 사람이 8년 전에 이훈주 과장 추락사 때도 담당 수사관이었다고요. 목격자 증언도 그렇고 이게 정황이 있는데 초동 수사 자체가 엉망진창으로 된 거잖아. 하필이면 같은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같은 수사관한테 걸려서 똑같이 처리가 될 확률이 얼마나 되냐고.”
“경찰, 검찰, 정부, 국회, 청와대까지 싹 커넥션이 있다고밖에 생각 못 하지, 이러면.”
그때까지 말이 없던 정언이 툭 내뱉었다. 턱을 괸 민혜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더니 테이블 위에 흩어진 프린트물 위를 가리켰다.
“일단 이거 좀 봐요. 이거 전 부장님 팀에서 가져온 건데, 황형두 의원실에서 나온 자료래요.”
윤은 앞에 놓인 종이들을 정리하고는 한 장 한 장 훑어보기 시작했다. ‘애포시청 공공건축물 수주 관련 계좌추적 필요성 보고’, ‘한국선진당 엄대진계 의원 입금 내역 보고’ 등의 이름이 붙은 보고서 몇 장과 은행 이름과 계좌번호, 계좌주 명의, 금액 등이 쭉 적힌 목록들이었다.
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뭔데요?”
“의원실에서 검찰 내사 자료 입수한 거래. 그쪽에서 지금 애포신도시랑 을정신도시 공무원 뇌물 줬다고 제보 엄청나게 들어갔다고 했잖아. 이게 벌써 5년 전 자료인데, 검찰에서 서온건설 게이트 터지기 전부터 이미 그쪽에도 혐의 있다는 거 확인했다는 증거야. 보고서에 보면 거기 관련자들이 현금으로 한 달에 몇 번 얼마나 계좌로 입금했는지까지 벌써 다 파악했다고.”
곁에 앉은 정언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찰에서 덮었다는 거예요?”
“그 보고서 누가 썼는지 봐.”
무심코 보고서 앞장을 본 윤은 멈칫했다. 이정수, 진형은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정언이 곁에서 팔짱을 끼었다.
“그쪽에서 들어간 소스니까 백 퍼센트야. 이정수 검사하고 진형은 검사가 이거 아래서부터 이미 다 팠던 거라고. 위에서 강제로 덮은 거지. 추가 계좌 추적 안 들어가도 최소한 신차훈하고 고규덕은 절대로 못 빠져나가. 이거 감찰하는 기간에 본인 명의 통장으로 들어간 현금만 각각 2억이 넘잖아.”
“그러면 먼저 이쪽부터 터트릴 수는 없어요?”
“이거 터트려 봤자 꼬리 자르기밖에 안 돼. 최창묵 꼴 나게 돼 있다고.”
정언의 말이 옳았다. 엄대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터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은 펜 끝으로 어느새 찌푸려진 미간 위를 눌렀다.
“그러면 여기서 엄대진한테 들어간 돈을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네요.”
정언은 그 말에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안영균 파는 게 답이야.”
“안영균이요?”
“엄대진 보좌관. 엄대진 성격 생각해 보면 사람 쓰고 버리는 걸 물건처럼 하잖아. 그런데 안영균 보좌관이 벌써 엄대진하고 십 년도 훨씬 넘게 같이 일하고 있거든. 현 기자한테 물어봤는데 안영균 제외하고는 의원실 인원 자주 갈리는 편이라고 얘기하더라. 실제로 박규형 씨가 출장 갔을 때 안영균이 직접 오는 거 봐. 엄대진한테 갈 건 안영균이 챙길 가능성 높다고 봐야지.”
“그런데 그 정도면 안영균이 보통 치밀한 게 아니지 않을까요? 엄대진이 그렇게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터트려도 안영균이 다 뒤집어쓸 가능성도 있잖아요.”
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자 정언이 수긍했다.
“그건 그래. 그러니까 안영균한테 뒤집어씌울 수 없는 부분을 찾아야지. 내가 보기에 이거 터지는 건 시간문제야. 민권당 사반위 쪽으로 제보 엄청 들어온다는 건 하청들도 완전 한계에 달했다는 소리거든. 대선 앞둔 거 생각하면 더 그럴 거고. 엄대진이 정권 잡는다면 이 상황이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지는 않을 테니까.”
“엄대진이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을까요?”
“최후의 최후까지 몰리는 거 아니면 쉽지 않겠지. 지금까지도 이미지 메이킹 계속 그런 식으로 해 왔다고. 더러운 건 남들 손으로 하고, 자기는 뒤에 숨어서 계속 지켜보면서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지금도 우리 지켜보면서 어느 선에서 끊을지 계속 생각하고 있을걸.”
결국 문제는 최후의 최후까지 엄대진을 어떻게 몰아붙이냐 하는 것이었다. 윤이 작게 한숨을 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민혜가 웃는 소리를 냈다.
“김 피디 처음 왔을 땐 진짜 세상 걱정 없어 보였는데, 지금은 완전 세상 고민 혼자 다 하는 사람 얼굴이야.”
“어떻게 이걸 몇 년씩 매일 하시는 거예요?”
윤은 진심으로 궁금해져 민혜에게 물었다. 민혜가 뺨을 긁적이더니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얼굴을 했다.
“본인도 지금 몇 달 했잖아요. 며칠이 몇 달 되고, 몇 달이 몇 년 되고 그런다니까. 몇 년 몇 번 하면 순식간에 십 년, 이십 년 하고. 아, 김 피디는 다시 교양국 갈 건가?”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반문하기 무섭게, 정언이 한쪽 눈썹을 약간 찌푸리더니 윤을 마주 보았다.
“다시 교양국 간다고?”
당황하는 윤 대신 대답한 건 민혜였다.
“아니, 내가 며칠 전에 교양국 갔다가 있는 준희 있잖아, 조준희 작가. 걔 만났거든. 오랜만에 본 거라 커피 한 잔 마셨는데 준희가 그 얘길 하더라고. 거기 최진수 부장이 김 피디 여기 올 때 딱 반년만 참으라고, 자기가 다시 데려간다고 그랬다던데? 그래서 어, 최 부장님이 엄청 예뻐했나 보네 그랬지.”
그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완전히 새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 말을 들은 정언이 묘한 표정으로 윤을 빤히 응시했다. 어쩐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된 윤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냥 하신 소리죠, 뭐. 징계 받고 온 건데 어떻게 부장님이…….”
“아니, 근데 우리 어차피 셔터 내리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잖아. 뭐 일이 어떻게 잘 돼가지고 셔터 안 내릴 수도 있지만 그런다고 해도 교양국에서 다시 불러 주면 좋은 거 아니에요?”
물론 여기 올 때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그러나 그걸 민혜 앞에서 차마 뭐라고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제가 선배를 좋아하게 돼서 어지간하면 여기 붙어 있고 싶은데요……라고 말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굳이 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윤이 대답 대신 몹시 어색하게 웃자 민혜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본 신입 중에 김 피디가 제일 괜찮았는데 다시 보낸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더 아깝네. 워낙 힘드니까 셔터 안 내려도 계속 같이하자고 할 수도 없고.”
“에이, 왜 자꾸 그러세요. 저 빨리 보내고 싶으세요?”
“어머, 내가 출근하는 유일한 즐거움이 김 피디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든 이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최대한 애교스럽게 묻자 민혜가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다행히 타이밍도 좋게 민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선명하게 ‘남의 편’이라는 글자가 떴다. 남편인 모양이었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 민혜가 나 전화, 하며 핸드폰을 들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내심 안도한 윤은 무심코 정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움찔했다. 정언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왜요?”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한 얼굴로 윤을 응시하던 정언이 아냐, 하고는 탁 소리가 나게 파일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