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두 사람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 병 정도를 비운 재희는 먼저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만하고 이제 슬슬 들어가시죠. 시간 벌써 꽤 지났는데요.”
그럴까, 하고 한동이 먼저 엉덩이를 떼었다. 그사이 소주 두 병을 비운 한동의 얼굴에는 취기가 올라와 있었다. 주당으로 소문난 한동이었으나 내심 상했던 속이 술을 이기지 못하는 듯했다.
문턱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고 일어나던 한동이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아래로 내려선 재희가 얼른 한동을 부축하자, 한동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됐어.”
그러나 한동을 기어이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온 재희는 택시를 잡아 한동을 먼저 태웠다. 내일 보자고, 하며 약간 말리는 발음으로 내뱉은 한동이 문을 닫았다. 도로 저편으로 사라지는 택시를 눈으로 좇던 재희는 등을 툭 치는 형두의 손길에 몸을 돌렸다.
“강 피디, 태워 줄 테니까 가요. 우리 비서관 근처에 있는데 금방 올 거야.”
“아닙니다. 저도 차 다시 회사에 가져다 놔야 돼서요. 대리 불렀습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재희가 사양하자 형두가 에휴, 하고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힘 좀 내 줘요. 우리만 잘 되자고 그러는 건 아니니까. 알죠?”
“제가 뭐 불편한 게 있겠습니까. 도움 주셔서 감사하죠.”
길거리에 서서 인사치레를 잠시 주고받는 사이, 비서관이 도착했는지 형두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은 형두가 눈으로 재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웃어 보인 재희는 가벼운 묵례를 하고는 근처의 택시 정류장 벤치에 걸터앉았다. 자주 쓰는 대리운전 앱을 켰으나, 재희는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고 그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
산천어.
형두가 농담조로 뱉은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바르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오려는 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사회의 상식이라면, 자신이 하는 일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아닐까. 그건 끝없이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 답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종착지는 언제나 연수였다. 연수의 답은 늘 명쾌했다.
「재희야, 있잖아. 상식은 진실이 아니야. 상식은 상식일 뿐이야. 상식은 바뀔 수 있고, 진실은 변하지 않아. 우리가 하는 일은 결코 변하지 않는 걸 따라가는 일이라고 생각해.」
언젠가 괴로워하던 자신에게 연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재희는 고개를 젖히며 긴 숨을 뱉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숨은 무기력했다. 연수가 가졌던 그런 확신들은 이런 순간이면 항상 재희에게 더 절실했다.
너는 어떻게 그토록 확고할 수 있었을까.
잠시 눈을 감자 얇은 눈꺼풀 위로 가로등과 네온사인,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흩뿌리는 빛의 입자들이 희미하게 떠돌았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그때,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메시지 미리보기 창이 나타났다. 재희는 반사적으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 YBS 강재희 피디 19시 32분 보문동 민권당 황형두 접촉 22시 47분 해산발신번호 없는 메시지였다.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등으로 아주 조그마한 얼음 조각이 미끄러지듯 싸늘한 감각이 달려 내려갔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길거리에 늘어선 수많은 가게와 골목 사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이쪽을 주시하는 자취 없는 시선. 도시의 불빛 사이로 촘촘히 엮인 어둠 어딘가의 존재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재희는 다시 그 메시지로 눈을 돌렸다.
잘못 보낸 메시지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재희는 이런 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일부러 알려 주는 고전적인 수법 중 하나였다. 더 두려워하라고, 더 조심하라고, 더 침묵하라고.
재희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핏기가 빠져나간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미 꺼진 화면 속 어둠은 자신을 비웃는 듯 깊고 막막했다.
29.
고원종합기술공사 간판을 붙인 신축 빌딩은 회사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호화롭다는 인상을 주었다. 약속한 1층 카페에는 이미 한 남자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 가방을 멘 윤과 정언이 오픈된 카페로 들어서기 무섭게, 초조한 표정으로 시계와 입구를 번갈아 보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남형의 인상이었으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방송국에서 오셨습니까?”
먼발치에서부터 묻는 목소리가 워낙 큰 통에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이 깜짝 놀라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정언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맞은편에 섰다. 남자가 서둘러 주머니를 뒤져 명함 두 장을 정언과 윤에게 건넸다. 급히 꺼내느라 끝이 구겨진 명함에는 이종규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이종규 팀장님?”
“네. 이쪽으로, 이쪽에 앉으시죠.”
맞은편 자리를 권한 종규가 뭐라고 운을 떼기도 전 카운터로 뛰어가더니 곧 차가운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행동 하나하나가 잔뜩 긴장한 것이 눈에 뻔히 보여, 곁에 앉아 있던 윤이 정언 쪽으로 몸을 약간 기울이며 소곤거렸다.
“제발 수상하게 생각해 달라고 애원을 하는데요.”
“위에서 무슨 얘기 들었겠지.”
나지막하게 대답한 정언은 곧 맞은편에 다시 앉은 종규를 빤히 마주 보다 입을 열었다.
“저희가 촬영 좀 해도 되겠습니까?”
“아, 예…… 예, 그러셔야죠.”
종규가 카페 냅킨으로 이마에 송골거리는 땀을 닦았다. 건물 안은 빈말로라도 덥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도 목덜미까지 엷게 땀이 배어 나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종규는 윤이 카메라를 세팅하는 걸 연신 흘끔거리며 이 끝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랫입술이 이미 얇게 뜯겨 피딱지가 말라붙은 채였다.
“저희가 서온건설 관련한 취재 중에 고원종합기술공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요. 현장 감리 담당하시는 분이 팀장님이라고 해서 한 번 만나 뵙고 얘기를 좀 듣고 싶었습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기, 뭐…… 어떤 부분이, 어떤 부분에 대해 얘기를 듣고 싶으신 건지 일단 그런 걸 좀 말씀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이런 일에 그다지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이것보다는 더 언론을 상대하는 데 능숙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을 내보내려 했을 게 분명했다. 정언은 그를 유심히 관찰하며 대답했다.
“서온건설에 대한 제보를 여러 차례 받았는데, 그 중에 서온건설이 공개된 자재와 공법대로 시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일반 주택은 물론이고 공공 건축물 수주에 있어서도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된다고요. 저희가 알아보니까 정상적인 현장이라면 감리에서부터 이런 일이 발생할 수가 없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기엔 문제가 있는 현장 중에 고원종합기술공사가 감리를 담당한 현장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확인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죠?”
종규는 앞에 놓인 커피 잔에 눈을 고정한 채, 계속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정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언은 말을 하는 동안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손끝을 계속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말이 없던 종규가 이마 부근을 긁적였다.
“예, 저기,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충분히 알았습니다. 충분히 알고 있고요, 그런 부분이 어떤 범법, 범법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 제가 확신이 안 가는데…… 아무튼 어떤, 그, 법망의 빈틈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도 제가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일단 그 부분을 문제 삼는 건 건설업의 생리를 잘 모르셔서 그럴 수도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이 되거든요.”
“건설업의 생리요?”
정언이 되묻자 종규가 서둘러 변명했다.
“아니, 물론 제가 그게 잘 됐다,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니고요. 아닌데, 이게 뭐라고 해야 될까요. 말하자면 그, 유도리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건설 현장이라는 데가 그렇게 법적으로, 그런 게 딱딱 지켜지는 데가 아니라는 거죠.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관행적으로, 많은 부분이 관행에 따라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사람이 안 하는 일이 있습니까?”
되도록 참으려고 했으나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종규가 다시 한 번 땀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그렇죠. 그런 부분은,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압니다. 그런데 건설업이 남초 직종이라 특히 더 이해를 못 하시겠지만, 건설업에서 현장이 진행되는 부분은 굉장히 관행적인 게 많아요.”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사람들을 한두 번 상대하는 건 아니었으나, 만날 때마다 열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정언이 더 화가 나는 부분은, 종규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더 이런 식으로 군다는 점이었다.
여자니까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니까 모른다, 여자니까 적당히 속여 넘길 수 있다는 태도에는 신물이 났다. 정언은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끼었다.
“핵심을 비켜 가면서 말씀을 하시네요. 저희가 이미 고원종합기술공사에서 서온건설이 진행하는 현장 감리 대부분을 맡아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공공건설의 경우 감리업체도 입찰 진행해서 선정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고원이 낙찰됐다는 거죠. 더 낮은 가격, 더 좋은 포트폴리오를 가진 업체를 두고 굳이 고원을 선정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니까 서온하고 고원의 관계가 상당히 유착돼 있다,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데요. 제가 질문을 좀 더 분명하게 하죠. 감리 과정에서 어떤 압력이 있었습니까?”
종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정언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취재를 하면서 관행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많이 들었습니다. 서온건설 관련자 분들은 어떤 부정, 비리, 불법, 이런 걸 전부 관행이라는 말로 묶어서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던데요. 관행이라는 게 마법의 단어입니까? 제 말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을 해 주시죠.”
“피디님, 그건 제가 지금 여기서 말씀드리기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팀장님이 생각하시기에 여기서 말씀하시기 적절한 부분은 어떤 부분입니까?”
윤이 곁에서 정언의 소매를 살짝 당기며 선배, 하고 속삭이듯 불렀다. 지나치게 그를 몰아붙인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짧은 침묵이 지났다. 종규가 손에 움켜쥐고 있던 냅킨으로 목덜미 부근을 닦았다. 정언은 조금 가라앉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지금 여기 아무것도 모르고 앉아 있는 거 아닙니다. 취재 요청 처음에 피하신 이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출장 가셨었는지도 제가 확인을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