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피디님, 아, 정말 이게…… 이게 제 선에서 말씀드리기가 난처한, 그런 부분입니다.”
정언이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종규가 몹시 난감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정언은 그를 쉽게 풀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팀장님 선에서 말씀하시기 난처하다면 어느 선까지 올라가야겠습니까?”
“취재를 하셨다니까 잘 아시겠지만…….”
종규가 망설이듯 말끝을 흐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정언은 그를 빤히 응시하며 그 속내를 가늠했다. 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로서는 전혀 파악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득 짧은 전류 같은 감각이 번뜩 지나쳤다. 엄대진과 서온건설이 지금까지 자신들을 지켜보았던 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중요한 키가 될 감리업체 담당자에게 어떤 대응책도 알려 주지 않은 의도가 무엇일까.
이미 취재 과정에서 수차례 본 패턴이었다. 꼬리 자르기. 한 사람의 일탈로 뒤집어씌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실무 담당자가 무조건 잡아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 텐데도 맨몸으로 내던졌다는 건, 결국 그가 총알받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정언은 앞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종규가 움찔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정언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굳이 팀장님한테 확인하지 않아도 유착 관계 확인할 수 있는 팩트 여러 개 가지고 있습니다. 최대 주주 채기원이 서온건설 남제선과 친인척 관계인 것도 이미 파악됐고, 시청 건설과 공무원과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하청에 대한 서온건설의 원청 갑질에 대한 사례도 상당수 제보가 들어왔고요. 이 과정에서 자재와 공법 문제 여러 차례 지적됐는데, 그거 전부 감리에서 덮어 버린 것도 확인했습니다.”
종규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정언은 자신의 명함을 꺼내 종규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 문제 저희가 터트리면 절대 쉽게 안 묻힌다는 거 아셔야 됩니다. 수천억대, 수조원대 소송 걸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거 전부 팀장님 개인의 일탈로 덮어쓰실 겁니까?”
“피디님, 저…….”
“서온건설하고 오래 일하셨다니 잘 아시겠지만, 저희 취재 결과 거기서 하청이나 협력업체 보호해 준 사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여기서 말씀하시기 적절하지 않다고 하시니까,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시죠.”
정언은 종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멈칫하던 윤이 서둘러 장비를 정리했다. 한 모금도 손대지 않은 커피를 그대로 두고 건물을 나서자, 윤이 유리창 안쪽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종규를 슬쩍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연락 올까요?”
정언은 앞을 보며 대답했다.
“내 생각엔 그럴 가능성 높아. 팀장이고 담당자면 일단 현장 감리 저 사람 주도하에 이루어졌을 거고, 어느 정도 대가 당연히 받았겠지. 현장에서 감리가 현금 요구하는 거 관행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규모가 너무 커. 오래되기도 했고. 이종규 팀장이 언제부터 일했는지는 몰라도, 이미 수십 년간 이루어진 유착 뒷감당을 본인이 혼자 하기는 억울하다고 생각할 거라고.”
“그렇다고 고발하기 쉽지도 않을 텐데요.”
“일단 팀장 선에서도 우리가 어디까지 취재했는지 모르는 거 확실해. 알았으면 저 정도 위인 안 내보냈을 거야. 팀장이 계속 관행이라는 말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거 봤잖아. 만약에 우리가 방송 터트려서 난리난다고 해도 감리에서는 팀장한테 덮어씌우면 그만이라고. 관행이라는 말로 개인이 불법 자행했다, 그러면 끝이야. 이종규 팀장은 지금 그거 모르고 나온 거고. 일단 저녁이나 먹자. 연락 오면 좋고, 안 온다고 하면 할 수 없고.”
정언의 말에 가벼운 한숨을 쉰 윤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카페 안에서 그새 종규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가방을 고쳐 멘 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길 건너편의 건물을 가리켰다.
“어, 저기 유명한 덴데. 저런 거 좋아하세요?”
건물 2층에 붙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거나 상관없어.”
윤의 물음에 별생각 없이 대답하자마자, 취재 나와서 레스토랑 가자고 하는 놈은 처음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여튼 별나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윤이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먼저 앞질러 길을 건넜다.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그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기가 찼다. 식당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마주 앉기 무섭게 정언은 장소 선택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봐도 회사 선후배 사이에 와서 앉아 있을 만한 공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전부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나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업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정언 앞으로 밀어 놓은 윤이 씩 웃었다.
“뭐 드실래요?”
“제일 빨리 되는 걸로.”
정언은 윤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의도된 장소 선택일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진심으로 그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 그 짧은 사이 이탈리안 레스토랑 간판이 눈에 들어온 건 그렇다 쳐도 자신 앞에서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용기만은 거의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종업원을 부른 윤은 로제 파스타와 오일 파스타를 하나씩 시키고는 정언에게 물었다.
“파스타 괜찮으시죠?”
“가리는 음식 없어.”
“어, 그럼 제가 다음에 해 드릴게요. 저 파스타 진짜 잘 하거든요.”
아무리 들어도 진심인 말투였다. 정언은 그 순간 정말 윤을 취조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 왜 그걸 자신에게 해 주겠다는 건지 진심으로 묻고 싶었으나 동시에 대답을 듣는 게 무서웠다.
팀원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래도 김 피디가 일이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된 것 같다고 수군거렸을 게 틀림없었다.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들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던 정언은 곧 얼굴을 감싸며 좌절했다. 팀원 중 이 일을 그러려니 할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레스토랑 안을 채우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 죄 없는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던 정언은 시선을 들었다. 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이 턱을 괴며 생글거렸다.
“데이트하는 거 같고 되게 좋은데요.”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던 정언이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김 피디, 그런 말 하면서 본인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뭐가 이상한데요?”
“왜 나하고…….”
이런 데서, 이런 음식을 먹으면서 데이트하는 것 같아서 좋다는 소리를 하냐고 물으려던 정언은 즉시 후회했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좋아하니까. 정언이 말을 멈추자 윤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으로 웃었다.
“전 선배가 저 싫어하시는 거 아니면 됐고, 이런 데서 저랑 저녁 같이 먹어 주시는 거 좋아요. 선배하고 내내 붙어 다닐 수 있으니까 만족하고, 교양국 다시 돌아갈 마음도 없어요. 선배가 이거 방송하고 싶어 하시는 거 아니까 저도 같이 열심히 하는 거고요. 복잡하게 생각 안 해요. 저한테는 지금 이상한 거 하나도 없고 다 좋은데요. 더 질문하실 거 없죠?”
말문이 막혔다. 때마침 예쁘게 담긴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정언의 앞에 놓인 접시를 가져간 윤이 파스타를 덜어 다시 놓아 주고는 드세요, 하고 권했다. 정언은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잘도 먹는 윤을 멍하니 응시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면 됐다고,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대답하는 윤의 단정한 얼굴 위로 쏟아지는 조명의 입자가 그 속눈썹 끝에 걸려 반짝였다. 잠시 거기 시선을 붙들렸던 정언은 접시로 눈을 주었다.
“왜 안 드세요. 괜찮은데요.”
이렇게 정신없이 사람을 흔들어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언제나처럼 제자리로 돌아간 윤이었다. 정언은 대답 대신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는 파스타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정언을 가만히 마주 보던 윤이 포크 끝으로 접시 위를 살짝 톡톡 쳤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윤이 말했다.
“체해요, 선배. 천천히 드세요.”
그 무조건적인 다정함의 결은 정언이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정언은 일순간 모든 소리가 지워지는 착각에 빠졌다.
어쩌면 자신과 윤도 주변에 앉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평범한 커플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아주 오랫동안 허락된 적 없는 일상. 정언은 자신이 이런 순간에 어느새 익숙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문득 인식했다.
정언은 일상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떤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연인을 잃은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너무나 오랫동안 지켜본 탓이었다. 한 번 무너진 삶은 다시 쌓아 올린다 해도 결코 이전과 같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엄마를 혼자 남겨 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외에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선을 그었던 건 그래서였다.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아무렇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오래전 언젠가 재희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겁이 없지만,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강해진다고. 그렇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느 쪽인 걸까. 정언은 시선을 내렸다. 윤에게는 모든 게 단순한 것 같은데, 왜 자신은 그럴 수 없는지 답답해졌다.
“방송 나간 다음에 좀 한가해지면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파스타 해 드릴 테니까. 먹어 본 사람들이 다 가게 차리라고 그랬다니까요. 선배도 드셔 보시면 완전 놀라실 걸요.”
윤이 말했다. 그 미소에 퍼뜩 낯선 감각이 마음을 그었다. 은성한 테이블 위로 따뜻한 조명과 부드러운 음악, 여상한 단어들이 떠돌았다. 어떤 순간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다면, 기꺼이 이런 순간이기를 바라는 자신을 깨닫자 심장이 가라앉았다.
정언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더 놀라고 싶지도 않아. 빨리 먹어.”
지금 이후의 삶을 생각한다는 건 언제나 낯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