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45
145화.
오후에 의 임형원 기자를 만나기로 한 까닭에 윤은 정언과 이른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기 무섭게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는 재희가 눈에 들어왔다. 또 식사를 건너뛴 모양이었다. 무슨 책인가를 읽고 있던 재희가 인기척에 눈을 들더니 정언에게 물었다.
“아, 어제 이종규 팀장 만났다며. 어떻게 됐어?”
정언이 자리에서 가방을 챙기며 대답했다.
“그 사람 아무것도 몰라요. 시간 끌길래 무슨 변명거리 준비하는 줄 알았더니, 위에서 그냥 담당자 개인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끝낼 생각인가 봐요. 증거 다 있다고, 혼자 책임지겠냐 하니까 대답을 못 하더라고요. 기다릴 테니까 연락 달라고 하고 왔어요.”
“연락 오겠어?”
“모 아니면 도지. 오늘 상생변에서 박기율 변호사 온다면서요?”
정언의 물음에 재희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응. 우리하고 속기록 분석하기로 했어. 국선 출신이라 형사 사건 전문가라는데 메일로 미리 자료 보냈더니 자기가 변호사 인생에 그런 건은 처음 봤다고 그랬다던데. 서 피디는 김 피디랑 간다고? 경찰서에선 아직 연락 없고?”
정언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대답했다.
“네. 뭐 수배 내렸다니까 잡히기 전까지는 별말 없겠죠. 안심환경시민연대 현장 조사 건은?”
“분석 결과 다음 주에 나온대. 결과 나오는 대로 슬슬 방송 일정 맞춰 보기로 했어.”
“어제 황형두 의원 만났다며. 뭐라고 해요?”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손을 휘적거린 재희가 의자를 반 바퀴 빙글 돌려 창가를 보고 앉았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정언에게 삿대질을 했다.
“아, 내일 출근하지 말고 집 보러 가고. 출근하기만 해 봐, 가만 안 둘 테니까. 숙직실에서 일주일 살더니 꼴을 못 봐 주겠다.”
정언이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메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선배가 내 꼴 안 봐 줘도 봐 줄 사람 많으니까 신경 끄시죠.”
그 말에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한 재희가 되물었다.
“그래? 나 말고 누가? 어떤 자식이야, 내 허락도 없이?”
“선배하고 나 사이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되는 사이였어요?”
“그럼 그 정도도 말 못 할 사이였어?”
“아니, 선배가 나한테 그렇게까지 내적 친밀감 엄청난 줄 이제 알았네.”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 재희에게, 정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냉소적인 농담으로 대꾸했다.
정작 공연히 찔린 건 옆자리의 윤이었다. 재희가 뻔히 다 알고 묻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난번 한밤중에 함께 현장 취재를 나갔을 때 재희가 던진 질문의 의도는 분명했다. 윤은 그 대화로 재희가 자신의 감정을 눈치챘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짐작한 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정언을 좋아한다는 걸 누가 알든 상관없었다. 남들 앞에서 티를 내지 않는 건 오로지 정언이 곤란해지는 게 싫어서였다.
윤은 정언이 자신에 대한 태도를 아직 분명하게 결정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받아 주지도 못하는 모호한 관계. 괴로울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요즘은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정언의 안에서 뭔가 확실해질 때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남들이 아는 건 그다음이었으면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최대한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까닭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선배, 가시죠.”
차 키를 집어 든 윤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되도록 빨리 재희가 있는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재희가 갔다 와, 하며 손을 흔들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 얼굴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온 윤은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나란히 선 정언이 핸드폰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연락 온 거 있어요?”
“성이진 교수님이 다음 주 화요일이나 수요일쯤 수아 한 번 만나 봤으면 하셔서. 이희경 씨한테 그때 시간 되냐고 물어봤어.”
“수아는 좀 어떻대요?”
“뭐 비슷한가 봐.”
정언이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윤은 문득 어제저녁의 일을 떠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풀가동중인 정언에게 자신이 더 부담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정언의 선을 넘는 건지 아닌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정언을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뜨끔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간 윤이 시동을 걸자 조수석에 앉은 정언이 먼저 내비게이션에 신문사 주소를 입력하고는 시트에 등을 묻었다.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 부근을 두어 번 문지르던 정언이 눈을 감았다.
“캐나다 병원에 인터뷰 요청하라는 건 어떻게 됐어?”
“어제저녁에 메일 보내 놨어요. 아직 안 봤더라고요. 이따 취재 끝나도 수신 안 된 것 같으면 전화해서 다시 확인할게요.”
윤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대답했다. 오후의 햇살이 전면 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윤은 재빨리 손을 뻗어 정언 쪽의 선바이저를 내려 주었다. 주차장 출입구 근처로 시민단체 회원인 듯한 사람들 몇몇이 ‘방송장악 중단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윤은 잠깐 거기 시선을 두었다가 물었다.
“시간 얼마나 남았죠?”
“이렇게 오래 취재하는 아이템 잘 없는 편이긴 한데…… 진행 상황하고 회사 돌아가는 거 봐서 스케줄 조절해야지. 오전에 원 기자 잠깐 만났는데 그쪽 얘기로는 정보원 통해서 임대주택 현장에 문제 있는 거 이미 다 확인했다고 하더라고.”
“빠르네요.”
“원진솔, 이도하면 거기서도 투톱 에이스니까.”
눈을 감은 채 대답한 정언이 짧은 숨을 뱉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스트레스 받아서 죽겠네, 진짜. 이사는 또 언제 하냐.”
“내일 저하고 같이 가시죠. 제가 아침에 회사로 올게요.”
그 말에 정언이 뭐라고 대꾸하려 했으나, 윤은 그보다 더 빨리 선수를 쳤다.
“싫으시면 강 피디님이나 송 작가님한테 얘기할까요? 선배가 혼자 가신다고 그랬다고?”
그 말에 으으, 하고 머리를 감싼 정언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했다. 재희나 민혜에게 말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한 탓이었다.
“김 피디, 많이 늘었다? 나 협박도 할 줄 알고?”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투로 내뱉는 정언에게 윤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협박 아니라 뭐라도 할 건데요.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시면 계속 저 떼어 놓으려고 해 보세요. 진짜 선배 집 문 앞에서 밤새고 앉아 있는 거 보실 수도 있을 테니까.”
말한 내가 잘못이다, 하는 얼굴로 윤을 쳐다보던 정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창가로 시선을 주었다. 씩 웃은 윤은 앞을 보았다.
농담처럼 주고받는 단어들 사이는 때로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졌다.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정언의 선 안일 것 같은데, 손을 대면 아주 얇은 유리로 만들어진 벽에 가로막히는 감각. 무방비하게 자신의 접근을 허용했다가도, 다음 순간이면 바로 다시 벽을 치는 정언을 느낄 때마다 윤은 이제 화가 나기보다 궁금해졌다.
정언이 끊임없이 자신을 밀어내려 애를 쓰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었다.
사내 연애는 사절이라든지, 남들의 눈이 무섭다든지, 하다못해 좀 억울하더라도 연하가 싫다든지. 물론 무슨 핑계를 대든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정언은 늘 자신에게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문제가 적히지 않은 시험지에는 어떤 답도 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춘 사이 윤은 슬쩍 정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개를 약간 돌린 채 눈을 감은 정언의 목덜미 부근으로 오후의 햇살이 아롱졌다.
처음 정언과 함께 진송신도시 취재를 갔을 때, 차 안에서 잠시 잠이 든 정언의 무방비한 얼굴에 눈을 사로잡혔던 것이 떠올랐다. 정언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그 최초의 순간. 시작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부터였다.
만약 정언도 자신에게 그런 순간이 있었다면, 그건 언제였을까.
떠올린 질문을 지우며 건물 앞에 도착한 건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오래된 빌딩의 두 층을 빌려 쓰는 건물 바깥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좁은 주차장에 꾸역꾸역 차를 세우고 올라가자, 별도의 보안 장치조차 없는 사무실 문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문가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오셨죠?”
“YBS 입니다. 임형원 기자님하고 약속이 돼 있는데요. 지금 자리에 계십니까?”
정언의 물음에 남자가 아, 하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위층으로 올라간 남자는 작은 휴게실로 두 사람을 안내하며 말했다.
“임 선배 잠깐 나가셨는데 금방 오신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시죠.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신입 기자인 모양이었다. 정언이 사양하자 남자가 네, 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휴게실을 나갔다. 윤은 쿠션이 꺼진 낡은 소파에 자세를 고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소한 이십 년쯤은 썼을 듯한 낡은 책장에는 변색된 책들이 가득 꽂힌 채였다.
블라인드를 걷어 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희미한 먼지들이 떠돌았다. 반대편 벽에는 연표와 함께 역대 국장과 편집장의 이름이 빽빽하게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윤이 촬영 준비를 하는 사이 십 분쯤 지나 한 남자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옆구리에는 조그만 상자 같은 것을 하나 끼고 있었다. 40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싶었으나, 머리칼은 이미 반백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호락호락한 느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본 남자는 테가 동그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먼저 정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 맞으시죠? 제가 임형원입니다.”
“연락드렸던 서정언입니다. 이쪽은 김윤 피디고요. 일단 앉아서 얘기하실까요?”
형원의 손을 맞잡았다 놓은 정언이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형원은 아이고, 하고 중얼거리며 창을 반쯤 열더니 자리에 앉아 셔츠를 펄럭거렸다. 더운 듯 손수건을 꺼내 땀이 맺힌 얼굴을 닦은 형원이 들고 온 상자를 한쪽에 밀어 놓고는 멋쩍게 웃었다.
“아이, 이거 죄송합니다. 한국 도착하자마자 경찰에서 연락받고 그랬더니 시차 적응도 안 됐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그, 조창식 계장 관련해서 취재 중이신 거 맞죠?”
“맞습니다. 조창식 씨가 죽은 건 알고 계신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