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네. 아니, 진짜 깜짝 놀랐어요. 박규형 과장 죽었을 때도 제가 엄청 놀랐거든요.”
도리어 놀란 건 이쪽이었다. 형원의 입에서 나온 규형의 이름에 정언이 멈칫했다.
“박규형 과장님하고도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애초에 제가 조창식 계장 알게 된 게 박 과장 통해서였는데요. 저희가 엄대진 관련해서 작년부터 계속 취재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엄대진 취재하려면 서온건설 당연히 걸려 나오니까, 진송신도시 부지 선정이랑 그런 거 취재하러 갔다가 거기서 박 과장하고 안면을 텄죠.”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뜬 정언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희가 박규형 과장님 부인 되시는 분한테서 남편이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 제보를 받고 진송신도시 현장에서부터 서온건설 취재 시작한 지가 몇 달 됐거든요. 에서는 어떤 부분을 취재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 그래요? 그러면 박 과장 일 의심스러운 건 이미 알고 계셨던 거네요.”
콧등을 긁적인 형원이 잠시만요, 하고 나가더니 바깥의 자판기에서 캔 음료 세 개를 뽑아 들고 돌아왔다. 자리에 다시 앉기 무섭게 캔을 따서 몇 모금 마신 형원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엄대진이 조성한 비자금을 추적하고 있거든요. 이게 꽤 됐습니다. 어쩔 수가 없는 게, 이게 뭐 저희 쪽에서는 사적인 원한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게 있으니까.”
그 말을 하며 형원이 웃는 소리를 냈다. 사적인 원한이라는 건 이 자리에서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여겨졌다. 윤이 의아한 표정을 한 것을 알아차렸는지, 형원이 두 사람의 앞에 놓인 캔을 가리키며 좀 드세요, 하고 권하고는 팔짱을 끼었다.
“서온건설 게이트 때 모가지 날아간 최창묵이 우리 주필이었다고요. 혹시 아시나?”
윤이 저도 모르게 정언 쪽을 보자, 정언은 미간을 좁혔다.
“언론정보학과 교수였죠? 기자 출신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렇죠. 그거 하면서 우리 주필 겸직이었어요. 원래 에서 초고속으로 정치부 부장까지 갔다가 우리 주필로 온 사람인데, 젊을 때 아주 날렸었죠. 최 주필이 비례대표로 들어간 과정 자체가, 당시에 한선당에서 언론 플레이 위해서 기자 출신 끌어모으면서 그 사람이 정치에 발을 들인 거거든요. 나름대로 기자 시절에 상황 판단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중이 제 머리 못 깎아요. 정치 막 시작하고 엄대진 따라다니면서 받아먹을 땐 좋았는데, 일 터지니까 그렇게 바로 줄 딱 끊어 버릴 줄 몰랐던 겁니다.”
정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언은 거의 속기사처럼 메모를 하며 형원에게 물었다.
“그러면 최창묵 씨 때문에 취재를 시작하셨다는 겁니까?”
“뭐 딱 그렇다, 이건 아니지만 최 주필이 그때 타격이 정말 엄청났어요. 교수직은 바로 해임됐고 우리 쪽에서도 뭐 더 이상 쓸 수 있나요. 우리가 규모는 작아도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데, 언론사 신뢰도하고 직결이 되니까. 최 주필 완전 그때 한 반 년 절 들어가서 세상하고 연 끊었다고요. 저러다 어떻게 잘못되겠다 싶어서 우리 쪽에서 설득해서 필명 쓰고 논설위원 일 하자 했죠. 문재(文才)가 아까운 사람이니까.”
“지금 최창묵 씨가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우리 쪽 논설 나가는 거 보면 그냥 무명인(無名人)이라고 있어요. 그게 최 주필 필명입니다. 그 필명으로 기고도 몇 군데 넣고 블로그도 하고. 최 주필 그 이후로 오피스텔 하나 얻어 놓고 혼자 살면서 글 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합니다. 사람도 거의 안 만나요. 부인하고 애들한테 돈만 부치고. 가족들 볼 낯이 없다 그거지. 그때 그 사람 정치에 완전 신물 난 거죠. 자기가 뭘 몰랐다, 나중에 그래요.”
메모한 내용 위를 펜 끝으로 되짚어 보던 정언이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어떤 정보를 받으신 거죠?”
“그게 그러니까, 처음부터 얘기를 합시다. 작년에 우리 중부라인
사스마리
가, 2년 차 된 앤데. 얘가 남대문서 갔다가 아주 재밌는 걸 봤다는 겁니다. 환갑 다 된 여자분이 경찰서 쫓아와서 대성통곡을 하더라는 거예요. 부가세 3억을 내라고 날아왔다는데, 자기는 지금 3억이 아니라 3만 원도 없다 이거죠.”
“3억이요?”
듣고 있던 윤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형원이 씩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들어보니까, 야, 이게 정말 그 여자분 입장에서는 아주 미치고 환장할 일이에요.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인간이 젊을 때부터 도박하고 술 마시고 바람피우고 뭐 안 한 게 없었죠. 애들 다 크고, 부인도 이제 하다하다 지치니까 아예 돈줄을 딱 끊었어요. 그러니까 이 인간이 집을 나갔다는 겁니다. 가족들은 뭐 찾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실종 신고도 안 하고 살았고.”
“혹시 대포통장 넘긴 것 때문에 문제 생긴 겁니까?”
정언이 뭔가 감을 잡은 듯 끼어들자 형원은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기며 그렇죠,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죠, 그렇죠. 남편이 집 나가서 노숙자가 됐는데, 그 과정에서 대포통장을 개설해서 넘겼어요. 그런데 대포통장 일제 단속을 하면서 그게 걸린 겁니다. 집에 연락이 갔죠. 아들이 그걸 알고 바로 자기 아버지 명의로 된 계좌를 다 조회했는데, 은행 다섯 군데에 그 명의로 법인 계좌가 개설이 돼 있었습니다. 몇 달 사이에 입금된 금액만 30억이 넘었어요.”
“노숙자가 법인 계좌를 어떻게 개설했죠?”
정언의 물음에 형원이 종이 위에 볼펜으로 그림을 그려 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보이스피싱, 대출 사기에 쓰는 수법이에요. 일단 사기꾼이 있잖아요. 얘들이 대출 광고를 내요. 신용등급 낮은 사람들한테 1금융권 대출 가능하게 해 준다는 광고입니다. 절박한 사람들이 광고 보고 올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 사람들한테 사업자 등록을 시키고 유한회사하나 설립하자 합니다. 말이 유한회사지 그냥 유령회사죠. 얘들이 입을 뭐라고 터느냐. 회사 설립했으니 회사명의 법인통장 만들어라. 자기들이 거기다 입출금해 줄 테니까, 기다리면서 실적 쌓으면 신용등급 올라가서 1금융권에서 대출 가능해진다 이거예요. 한두 달이면 된다, 시간은 좀 걸려도 확실하지 않냐, 이러면서 입 털면 거의 다 넘어갑니다. 이렇게 얻은 계좌로 자기들이 서류 조작해서 대출받고 튀는 놈들도 있고, 보이스피싱 계좌로 쓰는 놈들도 있어요. 어쨌든 나중에 덮어쓰는 건 명의자란 말입니다.”
듣고 있던 윤이 눈을 크게 뜨자, 형원이 윤 쪽을 슬쩍 보고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걸 노숙자 가지고 한 거죠. 돈 얼마 주면서 명의 빌려서 사업자 등록한 뒤에 계좌 만들게 하고, 자기들이 그 통장 쓰다가 걸릴 것 같으면 없애고 이렇게 한 겁니다. 아무튼 아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아버지하고는 연락도 안 되고. 일단 그래서 아버지 명의로 된 회사 폐업 처리하고 계좌를 다 해지했는데, 당연히 이게 명의는 회사니까. 회사 폐업하는데 무슨 증빙 자료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자료가 있습니까. 애초에 있지도 않은 회사인데.”
형원의 말에 정언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폐업 과정에서 부가세 10퍼센트가 부과 된 거군요. 매입이나 매출 증빙이 안 되니까, 세무서에서 계좌 입금 내역 까 보고 명의자에게 잔존 재화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까?”
형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경찰서 쫓아온 거죠. 정작 통장에 돈은 한 푼도 없는데 그게 무슨 미칠 노릇이에요. 우리는 사스마리한테 그 얘기 듣고 어, 그러면 대포통장 꼭지 하나 따자. 그거 사례로 하나 넣지 뭐. 그렇게 가볍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 케이스를 취재하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이게 뭔가 이상하다, 이런 낌새를 챈 거죠.”
“어떤 부분이 이상했던 겁니까?”
정언의 물음에 형원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국세청 내부 자료 입수해서 검토하니까 유령 유한회사 설립하고 돈 세탁 이루어지는 사례가 쏟아졌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사 계좌들을 통해서 상당한 금액이 해외로 나가는 거예요. 자금 흐름 추적해 보니까 그 계좌 명의자들이 죄다 실종자 아니면 이미 죽은 사람인 겁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렇게 대규모로 같은 수법의 사기가 일어난다? 이거 아주 이상하거든요. 그래서 우리 취재팀이 지역별로 매핑(mapping)을 하면서, 이 사례가 나온 은행들 지점이 죄다 한선당 지역구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잡은 손이 떨려, 윤은 숨을 들이쉬었다. 형원이 말을 이었다.
“우리 쪽에서는 정치 비자금 세탁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면서 최 주필한테 우리가 이 사실을 물어봤죠. 알고 있었냐. 그러니까 자기는 정확히 그런 방식인 건 몰랐다,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아, 한선당에서 돈 받는 걸 몰랐다는 소리는 아니고요. 본인도 받았으니까. 비례 당선되고 처음 접대 받는 자리에 서온건설에서 축하금을 보냈다는 겁니다.”
“관행적인 거였나요?”
“그랬죠. 현금으로 가지고 왔다는데, 그때 전달책이 윤대석인가, 검찰 측 증인 하려다 죽은 사람. 그 사람이었던 걸로 압니다. 아무튼 그거 받고 어, 이거 어쩌나, 그러고 있으니까 신차훈이 넌지시 얘기를 하더라는 거죠. 엄 의원이 국토위 꽂아 줄 거고, 앞으로 이런 돈 받을 일 많으니까 아는 사람 이름으로 차명계좌 하나 개설해라. 그리고 실제로 국토위 들어갔죠.”
“왜 굳이 아는 사람 이름으로 차명계좌를 개설하라고 했죠? 그게 추적 훨씬 쉽지 않습니까?”
윤이 묻자 형원이 실없이 웃고는 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미 서온 게이트 터지면서 증명이 됐잖아요. 엄대진계라고 해도 언제든 꼬리 자르기가 가능하다는 거. 가족이나 지인 이름으로 차명계좌 개설해 놔도 다 덮어 주는데 그게 양날의 칼이에요. 일부러 안심시켜 놓고, 나중에 간단하게 잘라 내려고 일부러 추적 쉬운 계좌 쓰게 하는 거죠. 최 주필이 자기가 당하고 나서 그걸 알았다고요. 그 사람이 보기에 서온 게이트 터졌을 때 엄대진이 자기만 잘라 낸 건 일단 수도권 지역구 지키려고 그런 게 아닌가 하더라고요. 누구든 그런 방식으로 다 자를 수 있다는 얘기지.”
다이어리에 메모를 하고 있던 정언이 연신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최창묵 씨는 비례에 초선이라 힘이 없으니까 잘라 내기 쉬운 상대였던 거군요.”
“그렇죠. 사람이라는 게 엄대진한테는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입니다. 뭐 최 주필 똑똑한 사람이지만 그만한 언론인 없는 거 아니잖아요. 또 나머지 놈들은 일단 검찰에서 차명계좌 싹 덮어 줬으니까.”
“그러면 최창묵 씨는 세탁되는 비자금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