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윤이 묻자 정언이 눈을 덮은 채 대답했다.
“글쎄. 조창식 녹취 파일에도 돈 안 들어오는 거에 대해 불만 상당했잖아. 여기서도 엄대진이 먼저 돈 얘기부터 꺼내는 거 보면 조창식 상황이 안 좋았던 건 확실해. 이러고 엄대진 만난 뒤에도 돈이 안 들어온 거겠지. 그래서 기자님 앞으로 이거 남겨 놓고 손경일하고 딜 하려고 했던 거고. 조창식이 손경일하고 하루 이틀 일한 거 아니니까, 자기도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 들었을 거야. 최후의 수단으로 쓰려고 했겠지.”
“자기 죽일 거라고 짐작하고요?”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을 수도 있고. 진짜 죽일 거라는 생각 들었으면 도망쳤을 텐데, 손경일이 돈 보냈다고 생각했으니까 조직원들한테 문 열어 준 거 아니겠어? 서로 폭탄 하나씩 안고 있잖아. 막 건드리진 못할 거라고 믿었겠지. 손경일은 손경일 대로 조창식이 진짜 이런 거 남겼다고 생각도 안 했을 것 같은데.”
정언이 눈가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어쨌든 우리한테는 호재야. 박규형 씨 관련해서도 그렇고, 진송신도시 현장에 직접적으로 엄대진이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특산물 배달 얘기 하는 것도 우리가 이미 박규형 씨가 특산물 이름으로 기록한 장부 가지고 있고, 계좌 금액하고 다 맞춰 보는 중이니까 빠져나갈 구멍 없을 거고.”
“그러면 엄대진 대포통장 관련된 부분만 찾아내면 그림은 대충 다 완성되는 거네요.”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나머지 디테일은 어차피 선빵 친 뒤에도 증명할 수 있어. 사장님하고 국장님 얘기하는 거 보니까 엄대진이 밑밥은 다 깔았네. 그게 우리 압박하고 있다는 증거도 되고. 조창식이 남긴 증거 뭔지 그쪽에서는 아직 모를 테니까 우리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지.”
“안 그래도 아까 기자님이 대선 레이스 시작하면 자기들하고 공조해서 투웨이로 가면 어떠냐고 얘기하긴 하더라고요. 여기가 규모가 작으니까 특종 터트려도 묻히면 답 없다고.”
윤의 말에 정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도 그 얘기 하더라고. 지면으로 나가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방송할 수 있는 소스 받아서 일정 조율하고 우리하고 같이 터트리면 좋을 것 같대. 여기서 나온 소스면 일단 주요 일간지에서도 무시 못 하거든. , , 세 군데서 동시에 터지면 아무리 엄대진이라도 힘들어. 한선당이 지금 제일 주력하는 게 수도권 2040 표심 잡는 건데, 거기서 이 매체들 신뢰도가 높으니까.”
“다행이네요.”
대답 대신 소파에 등을 기댄 정언이 목을 뒤로 젖혀 잠시 천장을 보았다. 허공에 대고 낮은 한숨을 뱉은 정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형원이 돌아온 건 십 분쯤 지난 뒤였다.
자리에 앉은 형원이 입을 열었다.
“강재희 피디님하고 얘기를 해 봤는데, 저희가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 피디님하고 내일 얘기하기로 했으니까 자세한 건 그 뒤에 협의를 하죠.”
“감사합니다.”
정언이 인사를 하자 형원이 에이, 하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 입장에서도 혼자인 것보단 훨씬 든든하니까요. 우리도 목숨 걸고 하는 건데, 그냥 묻혀 버리면 그때부터 진짜 위험하거든요. 동종업계 종사자들끼리 서로 도와 가면서 하면 좋죠. 강 피디님이 이 영상 줄 수 있겠냐고 얘기하던데, 지금 복사해서 가져가시겠습니까?”
“아, 네.”
얼른 대답한 윤은 핸드폰의 메모리카드를 뽑아 창식의 핸드폰에 넣고 서둘러 영상을 복사했다. 정언은 그사이 형원에게 물었다.
“저희가 혹시 최창묵 씨하고 직접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을까요?”
형원이 그 말에 난감하다는 기색을 하며 웃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이후로 사람 만나는 거 자체를 딱 끊어서…… 말은 한 번 해 볼게요. 우리도 사실 정보 여러 가지로 더 얻고 싶어서 여러 번 연락했는데, 직접 만나거나 이런 건 잘 안 하려고 해요.”
“연락처도 알 수 없고요?”
“사무실에 명함 있으니까 드릴게요. 근데 전화를 받을지 안 받을지, 그건 최 주필 마음이니까.”
윤이 복사가 끝난 메모리카드를 다시 빼자 형원이 창식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이 장비를 정리하는 것을 기다려 준 형원은 두 사람을 데리고 아래층 사무실로 내려갔다. 자기 책상 서랍을 열어 뒤적이다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넨 형원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이, 이게 일이 너무 커져서 좀 당황스럽네요. 아무튼 잘 부탁합니다.”
“저희가 드릴 말씀이죠. 또 뵙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정언은 윤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윤이 주차장에 세워 둔 차 문을 열자, 조수석에 탄 정언이 입을 열었다.
“지금 그 영상 먼저 바로 선배한테 보내 줘.”
“어차피 사무실 다시 들어갈 건데 그때 보여 드려도 되지 않아요?”
“자료는 즉시 공유하는 습관 들여. 무슨 일 생길지 모르니까. 사고 나거나 죽어도 자료는 보호해야 돼.”
끔찍한 소리를 하면서도 정언의 말투는 늘 그렇듯 별것 아니라는 투였다. 재희의 메일로 동영상을 보내려던 윤은 그 말에 손을 멈췄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돼요?”
“이런 소리 몇 년째 하는데 씨가 안 되더라고.”
핸드폰으로 메일을 확인하며 대답하는 정언에게 윤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안 생길 일도 생기겠어요.”
“아무리 말해도 안 생길 일은 안 생겨.”
“그럼 선배 볼 때마다 선배가 저 좋아하게 되실 거라고 얘기해 볼까요? 어떻게 되는지?”
농담처럼 내뱉은 말은 당연히 진심에 가까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얼굴을 번쩍 든 정언이 굳은 표정으로 윤을 마주 보았다.
다음 순간 눈에 들어온 건 정언의 새빨개진 목덜미였다. 몇 달 사이 조금 길어진 머리칼이 가늘고 예민한 목선 위에서 흩어졌다. 윤은 저도 모르게 잠시 거기에 시선을 붙들렸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정언은 곧 포기했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진짜 왜 그래?”
“뭐가요.”
“지금 이게 재밌어?”
되묻는 정언의 표정은 언뜻 화가 난 것 같았으나, 실은 당혹감에 가까워 보였다. 윤은 대답 대신 정언을 빤히 응시했다. 시선을 어슷하게 비껴 피한 정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이런 거 아주 안 좋아해. 서로 불편해지기 싫다고.”
평소였다면 그대로 물러났겠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윤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이유가 뭔데요. 제가 싫어서 불편하신 거예요?”
“지금 김 피디랑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은데.”
정언이 이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 건 명백했다. 그러나 내내 속으로 눌렀던 감정은 그 순간 손을 놓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선배가 저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에요?”
“김 피디.”
“저한테 선배가 저 절대로 좋아할 수 없는 결격 사유 있어요? 선배한테 제가 죽어도 남자로 안 보일 이유가 있냐고요. 외모가 싫다든지, 성격이 싫다든지, 말하는 거, 옷 입는 거, 행동하는 거 다 싫다고 하시면 저도 포기할게요. 제 어디가 그렇게 싫으세요?”
윤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정언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좋고 싫고 그런 문제 아냐. 그렇게 말하지 마.”
“매번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까 제가 이러는 거잖아요. 제가 멋대로 선배 좋아하는 거 인정해요. 그러니까 저 계속 이렇게 내버려 두기 싫으시면 이유 말씀해 주세요. 고칠 수 있으면 제가 고칠게요.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노력할게요. 만약에 제가 무슨 짓 해도 안 된다고 하시면 선배 더 불편하게 안 할게요. 제가 이러는 거 싫으시면 납득할 수 있게 해 주셔야죠.”
“김 피디, 제발 좀.”
정언이 거의 사정하듯 윤의 말을 끊었다. 잠시 침묵하던 윤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말끝이 얼핏 떨렸다. 최대한 괜찮은 척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눈썹 위를 문지르던 정언이 윤을 물끄러미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어려운 깊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답답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정언은 한숨처럼 물었다.
“본인 취향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안 좋아하는 남자가 이상한 거죠.”
윤은 즉시 대답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선을 넘는 걸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어도, 이건 정도가 지나친 행동이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때로 넘치는 마음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정언이 좋았다. 이유를 설명해야 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정언 같은 사람을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정언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필사적으로 감추면서도 타인의 상처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냉철하지만 섬세하고, 강하지만 가혹하지 않았다. 그건 존경과 동경, 호기심과 보호본능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왜 그거 모르시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요, 전. 선배 안 좋아하는 거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남자든지. 선배를 아는 사람이면, 저처럼 이렇게 가까이 있는 사람이면…….”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윤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말아 쥐었다.
“……그래서 가끔 더 미칠 것 같아요.”
포항에서의 밤이 뇌리를 스쳤다. 작은 싱글 룸, 고작 두어 걸음이면 닿을 수 있었던 자신과 정언의 거리. 옅게 물기 어린 머리칼에서 지나던 습한 향의 입자와 단호한 뒷모습.
그때 윤이 그 자리를 벗어났던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정언에게 닿고 싶어질까 두려워서. 자신이 분명히 그 이상을 원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상상한 적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늘 무해한 얼굴을 한 채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절대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미칠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언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뒤엉켰다.
속사포처럼 뱉어 버린 단어들을 돌이키자 뒤늦게 얼굴로 열이 몰렸다. 한여름 땡볕 아래 서 있는 것보다 얼굴이 더 화끈거려, 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입을 다물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언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가는 손가락 사이마다 스치고 떨어지는 새까만 머리칼에 창으로 들어온 빛의 입자가 맺혔다.
“……죄송해요.”
긴 침묵을 깬 윤은 겨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재희의 메일로 서둘러 동영상을 보낸 윤은 시동을 걸었다. 잠시 눈을 감자 마음이 아득해졌다. 입술을 깨문 윤은 창을 열었다. 바깥에서 불어드는 바람이 뜨거워진 얼굴과 목덜미를 스치고 지났다. 당장이라도 핸들에 머리를 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창에 기대 턱을 괸 정언이 말없이 앞을 보았다. 그 침묵이 마음에 무겁게 얹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묻는 대신 윤은 액셀을 밟았다. 제발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