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5
15화.
“내숭을 떨어?”
푹 웃은 재희가 되물었다. 정언은 찌푸린 눈썹을 긁적였다.
“엄청 얌전한 척하던데요. 성격이 뭐 그런 일을 벌일 애 같지가 않던데.”
“그래? 서 피디가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고?”
재희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냐고 항변하려던 찰나, 내내 자신의 눈치를 살피던 윤을 떠올리자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정언은 빈 종이컵을 구기며 부루퉁하게 내뱉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직 안 한 거 알겠고, 되도록 앞으로도 아무 짓 하지 마. 어떻게 구해 온 신참인데 또 도망가면 어떡해.”
“아, 선배 진짜 좀!”
정언이 성질을 내자,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배를 잡고 웃던 재희가 말을 돌렸다.
“아이템은 뭐 하기로 했어? 아까 송 작가 아래서 만났는데, 정한 거 있다며?”
정언은 곁에 놓아두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는 약간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건설사 현장 과장 사망 건이요. 제보 게시판에 요새 매일 올라오는 글이라고 작가님이 뽑아 왔더라고요. 회사랑 경찰은 자살이라고 하는데 부인은 도저히 못 믿겠대요. 그래서 우리한테 알아봐 달라고 글 쓴 거지. 정황이 좀 수상하긴 하고, 요새 뭐 사내 왕따 문제도 심각하다니까 그런 거랑 관련 있나 싶기도 해서요. 그 정도면 사이즈도 별로 안 클 것 같고.”
“그래?”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둔 재희가 뭔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그럼. 제보자 접촉하고 스토리 나올 것 같으면 기획안 가져와.”
자리에서 일어난 재희가 정언의 정수리 위를 한 번 꾹 눌렀다.
“날 추운데 얼른 내려와. 불도 안 붙인 담배 가지고 폼 잡는 버릇도 좀 고치고.”
“선배가 처음부터 나한테 잘해 줬어 봐. 내가 이런 버릇 생겼나.”
“그래, 그래. 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불퉁한 정언의 말에 재희는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재희가 문을 열고 내려갔다. 정언은 닫히는 문을 보고 있다가 도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잠시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체할 것 같은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 꾸역꾸역 밥을 먹던 윤이 생각났다. 영 얼굴이 안 좋아 내심 걱정되기는 했다. 저러다 점심시간 지나고 바로 사표 내는 거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윤은 사무실에 오자마자 사내 도서관에 잠깐 다녀오겠다더니 편람을 가져왔다. 뭘 하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기획안 좀 봐도 될까요, 하고 묻길래 내심 자세는 됐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다.
최소한 한 달 정도는 버티려나. 자문한 정언은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남의 가족사진 한 장에 바로 눈물을 보이는 심약함과, 고작 2년 차 주제에 겁도 없이 사내 게시판에 이사진을 비판하는 글을 써 대는 대범함이 공존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싶어서였다.
“주제에 깡은 있네.”
중얼거린 정언은 다시 한 번 윤을 떠올려 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게 웃던 무해하고 해사한 얼굴. 아무리 생각해도 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부류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독종 중의 독종 소리를 들어가며 버틴 지 어느덧 7년 차였다. 인간의 선의와 악의, 고통과 슬픔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정언은 여기서 그 어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
자신들은 늘 객관적이어야 하고, 날카로워야 하고, 공정해야 하고, 비판적이어야 했다. 인간이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에도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건 이제 습관이었다. 민혜의 표현대로 모두가 ‘유통기한 지난 닭 가슴살’처럼 퍽퍽한 사람이 되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그렇기에 정언은 때로 실체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자신이 타인의 고통에 점점 둔감해지다, 마침내는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정언을 두렵게 만들었다. 습관이 된 냉정함에 잠식당해, 그저 방송만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인간이 되는 건 정언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었다.
윤의 눈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왜 울어,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가시에 찔린 듯 뜨끔해졌다. 정언은 그 감각이 자신의 뿌리 깊은 두려움과 맞닿아 있었다는 걸 불현듯 자각했다.
민감한 공감.
섬세함은 나약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어쩌면 지금의 자신에게 필요할 수도 있었다. 입술로 필터를 까딱이던 정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다보았다. 더 독해져야 한다, 나약하게 굴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던 시절의 습관이었다.
너구리 잡듯 피워 대는 담배 연기 속에서 꿋꿋하게 빈 담배를 물고 악착같이 사이에 끼어 선 정언을 보면 선배들은 혀를 내둘렀다. 몇 번인가 재희가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했으나, 정언은 그럴수록 더 버텼다.
물론 그것도 오래전의 일이었다. 이제는 그 시절의 선배들이 모두 그만두거나 승진해서 다른 자리로 간 지 한참이었고, 자신이 그 선배들의 위치로 와 있었지만 이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언은 빈 종이컵 안에 담뱃대를 쑤셔 넣었다. 커피가 말라붙은 바닥에 갈색 담뱃재가 조금 흐트러졌다. 한동안 그것을 들여다보던 정언은 쓰레기통에 컵을 던져 넣고는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찬바람을 오래 맞은 탓인지 코가 간질거렸다. 정언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재채기를 했다. 책상에 앉아 예전 기획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메모를 하던 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들어 정언을 마주 보았다.
“추운데 어디 갔다 오셨어요?”
정언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까딱했다. 머뭇거리던 윤이 바로 자리를 떴다.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라, 어지간히 자신이 불편한가 보다 싶었다. 속으로 혀를 찬 정언은 인터넷 창을 켜고 아까 민혜가 보여 준 진송신도시 기사를 검색했다.
몇 개 없는 기사를 전부 출력한 정언은 프린터 앞에 서서 출력된 기사를 하나하나 읽었다. 길지 않은 기사들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몇 분쯤 기사를 확인하다 몸을 돌리자, 그새 윤이 다시 앉아 뭔가 적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자리로 돌아간 정언은 멈칫했다. 책상 위에 테이크아웃 컵이 하나 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없던 것이었다. 컵을 만져 보자 종이 슬리브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스몄다. 컵에 붙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 커피는 아까 드시는 것 같아서요. 감기 조심하세요. 김윤.
단정한 글씨였다. 예상 밖의 행동에 당황한 정언은 그 메모를 응시했다. 스틱이 꽂힌 리드 위로 희미한 레몬 향이 번졌다.
잠시 리드 위를 만지작거리던 정언은 왠지 민망한 기분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단맛이 먼저 혀끝에 닿고 곧 새콤한 레몬 맛이 따라왔다. 입 안에 텁텁하게 남아 있던 믹스커피의 잔상이 지워졌다.
“……잘 마실게.”
파티션을 톡톡 두드린 정언은 한 박자 늦게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든 윤이 정언과 시선을 맞췄다. 흰 얼굴 위로 미소가 번진 건 순식간이었다.
어쩐지 그런 윤이 조금 더 불편해졌다.
04.
668화 ‘시간이 멈춘 방’, 711화 ‘남겨진 결혼반지’, 792화 ‘가짜 성모와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 815화 ‘벽은 알고 있다’, 863화 ‘기울어진 신의 저울’…… 윤은 마우스 휠을 굴리며 그 부제들을 눈으로 읽었다.
모두 시청자 카페에서 매년 선정하는 최고의 50 안에 거의 붙박이로 고정되어 있는 방영 회차였다. 아동 유괴, 장기 실종, 사이비 교단, 미제 살인, 검찰 비리를 다룬 회차들로, 엄청나게 화제가 된 방송이었다. 윤 역시 이 방송을 모두 본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윤의 관심은 그 자체보다도 부제 옆에 붙은 다섯 글자에 있었다.
기획 서정언.
괄호 안의 이름은 선명했다. 윤은 한동안 정언의 이름 위에 시선을 두었다. 그 50개의 목록에 매년 이름을 올리는 피디 중 여자는 아직까지 정언밖에 없었다.
의 악명은 윤도 잘 알고 있었다. 남자들도 줄줄이 떨어져 나가는 프로그램이었다. 거쳐 간 피디들만도 수천 명은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여기서 정언이 몇 년을 버텼다는 걸 곁에서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 실종된 약혼녀를 찾는 남자, 맹목적인 믿음에 미친 사람들, 연기처럼 증발해 버린 범인, 권력의 그림자…… 지금까지 정언이 취재해 온 삶들은 윤이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건물을 써 왔는데도, 이런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며칠 내내 편람과 수많은 기획안, 대본, 시청자 카페에 올라온 제작진 인터뷰까지 꼼꼼히 읽었지만 그럴수록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의 세계는 마치 번화가 안 가로등 없는 좁은 골목 같은 것이었다. 거기 항상 있지만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
“일찍 출근했네.”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던 윤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언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메고 있던 백팩을 의자 뒤에 대충 던져 둔 정언이 자리에 앉았다.
“네, 선배도…….”
“응.”
일찍 출근하셨네요, 라고 채 말하기도 전 정언이 짧게 대답했다. 파티션 너머로 컴퓨터의 전원을 켜는 소리가 났다. 잠깐의 침묵 후 정언이 말했다.
“이따 열 시에 나랑 같이 나가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