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생각해 보니, 정말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재희에게 사귀자는 말 따위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선배를 좋아한다고, 내 자리는 없는 거 안다고, 이대로도 상관없다고 한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정언은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건 재희가 욕심을 낼 수 없는 상대였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연수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건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희의 말대로 어쩌면 그건 겁이 많아서였는지도 몰랐다. 좋은 선배로서의 강재희와 남자로서의 강재희 중 자신은 언제나 기꺼이 전자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이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자 심장 어딘가가 뜨끔해졌다.
재희가 벤치에 등을 기댔다. 커피를 몇 모금 홀짝이던 재희는 손을 깍지 끼어 뒷머리를 받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정적을 지키던 재희가 먼저 침묵을 깼다.
“김 피디한테는 그런 적 없다고 했지만, 진짜 솔직히 얘기하면 나도 몰라.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내가 몇 년 동안 제일 오래 같이 있었던 게 서 피디니까.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다고 확신은 못 하겠어. 감정이란 게 경계가 항상 분명하진 않잖아.”
“사람 설레게 왜 그래요?”
농담처럼 되물었으나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그 단어들을 발음하는 재희의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재희가 짧게 웃었다.
“그런데 나도 아는 거지. 서 피디는 나랑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거. 내가 처음에 연수 만났을 때 그랬거든. 이 여자가 정말 좋은데, 놓치면 안 될 것 같은데 말을 못 하겠더라고.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 같으니까. 계속 그냥 동료로 남아 있으면 평생 이대로 지낼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런데 그러다 다른 사람한테 뺏긴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미칠 것 같고.”
재희가 스스로 연수의 이야기를 하는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연수가 살아 있을 때도 딱히 어떻게 연애하는지 말하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연수가 죽은 뒤로 재희가 먼저 연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더 드물었다. 재희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렇다고 해도 좋아하는 건 숨길 수가 없잖아. 연수가 결국 눈치를 챘어. 둘이 술 마시는데 나한테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강재희, 너 왜 나한테 사귀자는 말 안 해? 내 인생에서 진짜 그렇게 당황한 거 처음이었다니까. 남들이 다 나보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새끼라고 그러니까 그런 줄 알고 살았는데 그때는 정말 아무 말도 안 나오더라고.”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지, 문득 그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두 손을 깍지 끼어 무릎 위에 둔 재희가 몸을 조금 숙이며 말을 이었다.
“연수가 넌 만나기도 전부터 헤어지는 거 생각하지? 하고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데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 내가 가만히 있다가 야, 너 무당이야? 이랬어. 너무 당황하니까 아무 말이나 막 나온 거지. 그러니까 연수가 엄청 웃었어. 그러고 사귀기로 했거든. 그런데 사실 사귀는 동안 되게 불안했었어. 너무 대단한 애라 내가 잡아 두려고 노력하는 게 의미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항상 관대한 남자인 척했지. 사실은 미칠 것 같았는데.”
재희의 시선이 허공 어딘가에서 배회했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그림자를 좇는 듯 잠시 한곳을 응시하던 재희가 두 손을 모아 입가에 댔다.
“숨기려고 해도 잘 안 됐나 봐. 연수가 그걸 알고 나한테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자기는 항상 언제든지 마지막에는 나한테 돌아온다고. 잃어버리는 걸 두려워하면 가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대. 그게 무슨 말인지 나중에 알았어. 연수가 가고 나서도 한참 뒤에.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말 걸, 시간을 딱 한 번만 되돌릴 수 있으면 영원히 모르는 사이로 살 걸, 그런 생각 할 때마다 진짜 죽고 싶었거든. 그땐 정말 사는 게 뭔지 모르겠더라고.”
웃는 듯한 표정이 스치더니 곧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담은 채 빈틈없이 닫혀 버린 재희의 얼굴에서 언뜻 깊은 고통이 스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기 위해 재희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깨닫는 건 정언에게도 마음 아픈 일이었다.
“선배, 그만 얘기해도 돼요.”
정언은 서둘러 재희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재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어. 내가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지연수라는 여자가 내 옆에 있었던 시간조차 없었던 게 돼 버렸을 거 아냐. 살면서 내 삶이 완전하다고 느낀 건 딱 그 몇 년이야. 난 인생에 그런 순간이 여러 번 찾아온다는 생각 절대 안 해. 운명이라는 말 싫어하는데, 솔직히 그런 경험은 다른 말로는 표현이 안 돼.”
나지막한 목소리는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멈칫한 정언은 재희를 보았다.
“무슨 말 하고 싶은 건데요.”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그냥 그렇다는 거지. 서 피디나 나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잖아. 잃어버리는 게 무서워서 시작도 못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만약에 난 서 피디가 여자로 느껴진다고 해도 절대 말 안 할 거라고. 지금이 좋으니까. 서정언 똑똑하고 멋있고 진짜 완벽한 후배인데, 내가 내 욕심으로 옆에 뒀다가 잃어버리는 거 생각만 해도 무섭거든. 그런데 김 피디는 그게 아닌 거지. 더 알고 싶고, 더 가보고 싶고. 지금 이상으로 뭔가 있다는 걸 아니까.”
재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담백한 단어들이 밤공기 사이로 배회했다. 정언은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고는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재희의 말처럼 자신과 재희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워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선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엄청난 용기를 내야만 하는.
정언은 애써 재희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투덜거렸다.
“나 엄청 재미없는 인간인 거 몰라요? 있긴 뭐가…….”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지. 난 서 피디 인생에 그런 사람 아니잖아.”
씩 웃은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든 커피를 마저 마신 재희는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정언의 머리 위를 한 번 꾹 눌렀다.
“생각 너무 많이 하면 잠 안 온다. 적당히 하고 자.”
“선배는요.”
정언이 머리를 만지며 재희를 올려다보자 그새 돌아선 재희는 대답 대신 내려간다,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가는 재희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한동안 그 닫힌 문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정언은 긴 한숨을 뱉으며 얼굴을 감쌌다.
정언이 기억하는 한 재희는 절대 운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삶이 완전해지는 순간, 그건 운명이란 말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던 재희는 확고했다.
인생에서 유일한 단 한 번의 경험, 고작 그 몇 년의 기억이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을 지배한다는 건 정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윤이 더 알기를 원하고 더 가보고 싶어 하는 그 너머에, 자신이 알지 못하던 삶의 퍼즐 조각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정언은 문득 생각했다. 인생의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을 걸어도 좋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순간.
정말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걸 운명이라는 단어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정답을 확신할 수 없는 질문이 부유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밤이었다.
* * *
“여긴 왜 이렇게 수압이 낮죠? 방음도 너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에이, 수압이야 이 동네 다 그래요. 방음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지. 요새 건물주들 벽 그렇게 두껍게 안 넣어요. 원룸 살면서 아파트 바라려고 그래요?”
“그러면 일단 다른 데 보여 주세요.”
웃는 낯짝에 침 못 뱉는다고, 이미 몇 번째 퇴짜를 놓으면서도 생글거리는 윤의 얼굴에 공인중개사 아주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통은 여자들이 까다롭게 보는데, 남자 친구가 엄청 꼼꼼하네요.”
“제가 원래 걱정이 많아서요.”
정언이 대답하기 전 윤은 재빨리 선수를 쳤다. 곁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정언이 뭐라고 말하려는 얼굴을 하다 곧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었다.
날이 밝기 무섭게 방송국으로 달려와 정언과 함께 근처 부동산을 돌아다닌 게 벌써 다섯 시간째였다. 이번 부동산에서 본 집만 해도 이미 네 곳이었다.
금액은 상관없다고 하는데도 무조건 당장 이사할 수 있게 공실이어야 하고, 보안이 철저해야 하고, 도보로 출근 가능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하는 집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도 지금처럼 수압이니 방음이니 채광이니 위치니 구조니 하는 걸 따지면 선택의 폭이 더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내려가며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정언이 윤의 등을 툭 치며 조그맣게 말했다.
“적당히 하지, 김 피디.”
“제 집이면 적당히 하죠.”
이걸 그냥, 하고 이마에 써 붙인 얼굴로 윤을 쳐다본 정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피스텔 앞에 세워 둔 차에 시동을 건 아주머니가 두 사람이 타는 것을 기다리다 말했다.
“이번에 보여 주는 게 진짜 마지막이에요. 우리는 매물 가진 거 이게 끝이라.”
“제가 너무 까탈스럽죠? 죄송합니다.”
한껏 예의 바름을 장착하며 애교 섞인 말투로 사과를 건네자 아주머니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휴, 뭐 집 보는 게 다 그렇죠. 남자 친구가 자상해서 좋겠어요, 아가씨는.”
정언은 불 위에 올라간 오징어 같은 얼굴을 하며 아 예, 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침부터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정언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마도 애인이, 남편이, 남자 친구가, 일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 실은 직장 후배인데 사정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하기를 포기한 듯, 정언은 그럴 때마다 지금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게 고작이었다.
차로 한 블록을 돌아 아직 분양사무실 현수막까지 붙어 있는 신축 오피스텔 앞에 차를 세운 아주머니가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미리 연락이 된 듯 1층의 사무실에서 한 남자가 나와 입구를 열어 주었다. 아주머니가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여기 5층에 엊그제 계약 파기돼서 공실 난 거 딱 하나 있어요. 관리비가 다른 데보다 좀 세긴 한데, 뭐 금액 상관없이 본다고 하시니까. 어제저녁에도 집 보러 온 사람 있었는데, 엄청 마음에 들어 해서 오늘 오후에 다시 온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안 보여 주려다가 남자 친구가 잘생겨서 보여 주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사람 대하는 직업 특유의 듣기 좋은 빈말이라고 생각했으나, 칭찬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싹싹하게 감사 인사를 건넨 윤은 정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정언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윤을 흘끔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