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앞서가던 아주머니가 한 집의 문을 열었다.
“이 집이에요. 입주 처음이라 상태야 말할 거 없지. 솔직히 근처 신축 중에는 여기가 제일 괜찮아요. 낀 집이라 따뜻하고 남향이라 결로도 없어요. 오피스텔에 이중창 드문 거 알죠? 이중창이라 단열 잘 되지, 소음도 덜하지.”
집 안으로 먼저 들어선 윤은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싱크대 수전을 올렸다. 물이 기세 좋게 쏟아졌다. 벽을 두드려 보고는 붙박이장 안까지 하나하나 열어 본 뒤, 욕실 구조와 수압까지 꼼꼼히 체크한 윤은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CCTV 복도에도 다 있는 거죠? 여긴 방음 괜찮은 것 같은데, 수압도 좋네요. 에이, 아까 이 동네 다 그렇다고 하시더니 아니네. 옵션은 당장 다 사용 가능하고요?”
“길 하나만 건너도 동네가 다르니까 그렇지.”
아주머니가 지레 뜨끔한 듯 변명을 하고는 후다닥 말을 돌렸다.
“CCTV는 주차장이랑 입구, 복도마다 다 있어요. 옵션은 전부 새 건데 당연하죠. 여기만큼 옵션 많은 집 없어. 텔레비전에 화장대에 책상까지 다 들어와 있는데, 진짜 몸만 오면 된다니까. 혹시 작동 안 되는 거 있으면 관리실 얘기하면 바로 처리해 줄 거예요.”
“경비는 24시간 상주하고요?”
“그러니까 관리비가 세지. 요즘 세상 워낙 무섭잖아요. 배달도 무조건 내려와서 받아야 돼요, 여긴. AS 같은 것도 관리실에서 다 동행하고. 그래서 여기가 주변 신축 중에 제일 빨리 나갔다니까요.”
“옆집에는 누구 들어와 있는지 혹시 아세요?”
옆에 서 있던 정언이 슬슬 민망한 표정으로 딴청을 부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으나 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혀를 내두르며 대답했다.
“이 라인은 다 일하는 여자들 혼자 들어와 있어요. 남자도 젊은 사람들만, 아마 한 서너 집 있을 건데 워낙 조건도 좋고 하니까. 위치 따지면 진짜 조용하고 괜찮은 집이라고요, 이게.”
“저 너무 별거 다 물어보죠?”
윤이 멋쩍은 척 묻자 아주머니가 면박을 주었다.
“아니, 그럴 거면 그냥 데리고 살아요. 불안해서 여자 친구 혼자 어떻게 살게 하려고 그래.”
“저야 당연히 그러고 싶은데…….”
다음 순간 뒤에서 정언이 옆구리를 꽉 꼬집었다. 입 다물라는 뜻이었다. 바로 입을 틀어막아 비명이 터지려는 것을 참은 윤은, 아무래도 멍이 들었을 것 같은 옆구리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고는 말을 돌렸다.
“혹시 오늘 바로 들어올 수 있나요? 아니면 내일 오전이라도.”
“계약서만 쓰면 들어오는 거야 뭐…… 그런데 왜 그렇게 급하게 이사를 해요?”
“집주인이 일이 있다고 갑자기 나가 달라고 그래서요.”
흔한 오지랖에 솜씨 좋게 둘러대자 아주머니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렇구나. 집 괜찮으면 그냥 해요. 관리실에서 조금 있다가 이 집 다른 데서 또 보러 온다고 그러던데. 몇 군데 봤다니까 알겠지만 맘에 드는 집 딱 찾기가 쉽지 않아요. 갔을 때 맘에 들면 그게 내 집이라니까.”
윤이 정언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요?”
정언은 집 안을 더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지금 계약하죠.”
아주머니가 그 말에 반색하며 손짓을 했다.
“그러면 내려가요. 사무실 1층에 있으니까, 계약서 바로 쓸 수 있어요.”
그새 마음이 변할까 걱정됐는지 재빨리 빠져나가는 아주머니를 보던 윤이 정언에게 물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보셔도 돼요?”
“김 피디가 실컷 봤는데 내가 뭘 더 봐.”
정언은 됐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집 구할 때 부동산 한 군데 이상은 절대 안 간다며 첫 집에서부터 계약하려고 드는 걸 뜯어말린 윤이 몇 시간을 사방팔방 끌고 다녔으니 질릴 대로 질린 모양이었다.
사무실로 내려간 정언이 자리에 앉아 계약서를 적는 사이, 곁에 서 있던 윤은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사장님, 용달업체 전화번호 갖고 계시죠? 오늘 오후에 바로 되는 업체 있는지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청소업체도 지금 가능한 데 있으면 알려 주시고요.”
그 말에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윤을 쳐다보았다.
“청소까지 업체 불러서 다 하고 들어가게요? 공실이고 집 크지도 않아서 아가씨 혼자 해도 금방 할 거 같은데.”
“여자 친구가 너무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어서요. 연애할 시간도 없다고 하는 걸 절대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닿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만났거든요. 안 되면 제가 하죠, 뭐.”
정언이 그 말에 펜을 멈췄다. 앉아 있는 정언의 정수리를 슬몃 내려다본 윤은 짐짓 모르는 척 먼 산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할 말이 아주 많은 표정으로 윤을 올려다본 정언이 한숨을 쉬었다. 남의 속을 알 리 없는 아주머니가 부럽다는 얼굴로 정언에게 말했다.
“어머, 아가씨는 너무 좋겠다. 남자 친구가 잘생겼지, 키 크지, 다정하지. 전생에 무슨 좋은 일 많이 했나 봐요. 나도 이런 아들 있으면 안 먹어도 배부르겠네.”
“예, 뭐…….”
고개도 들지 않고 어물쩍 대답한 정언이 그새 다 적은 계약서를 내밀었다. 사무실 직원이 정언에게 보증금과 첫 달 치 관리비를 미리 입금할 계좌 번호를 적어 주며 설명하는 동안, 잠시 나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보던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아가씨, 짐 많아요? 1톤에 다 될 거 같으면 이따 네 시에 한 군데서 시간 빈다고 그러는데. 짐 포장돼 있으면 12만 원, 반포장이면 20만 원 부르는데. 청소업체도 지금 되는 데 있는데, 30분 있다가 올 수 있대요. 신축 공실에 아무것도 없다니까 아줌마 하나만 써서 5만 원에 해 줄 수 있다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복비 입금까지 마친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짐은 거의 없어요. 반포장으로 하죠. 청소업체도 바로 불러 주실 수 있나요? 오시면 연락 좀 부탁드릴게요. 저희 점심 먹고 와야 될 것 같아서요.”
“그래요, 그래요.”
혹여 윤이 무슨 소리를 또 할까 싶었는지 아주머니가 얼른 갔다 오라는 손짓을 했다. 사무실을 나온 정언이 어우 힘들어, 하고 중얼거리며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돌아다닌 탓인 듯했다.
“선배, 괜찮아요?”
윤이 몸을 숙이며 정언을 들여다보자 손을 휘적거린 정언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전 아무거나 좋은데요.”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빼고 얘기해.”
정언이 내뱉은 말에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 저녁 식사가 어지간히 어색하긴 했나 보다 싶었다. 두어 번 헛기침을 한 윤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탈리안 싫으시면 프렌치는…….”
“아직 나한테 덜 혼났지?”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정말 길 한복판에서 때리기라도 할 기세로 정언이 눈을 치켜떴다. 윤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이사하는 날은 원래 짜장면 먹잖아요. 중국집 어떠세요?”
정언이 대답 대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방송국 근처의 2층 건물에 자리한 작은 중국집은 윤도 잘 아는 곳이었다. 평일 점심이면 계단까지 줄을 설 정도로 인기가 많은 집이었으나, 주말이라 그런지 식당 안은 한산했다.
창가 자리에 앉은 정언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1번 세트요, 하고 주문을 하고는 팔짱을 끼며 잠시 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김 피디, 진짜 이러는 거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요?”
윤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정언이 아이 씨, 하고 중얼거리며 뭔가 민망하다는 듯 눈썹 위를 문질렀다. 잠시 사이를 두었던 정언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매번 성질 더럽게 구는 거 속 안 상하냐고. 뒤끝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냐?”
항상 선을 그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생각하자 심장이 묘하게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 지났다. 내심 조금 당황한 윤은 어,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차 안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감정을 터트려 버린 걸 내내 후회하던 참이었다.
“안 속상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긴 하죠.”
그 대답에 정언이 재차 물었다.
“나한테 맨날 그런 소리 들으면서 자존심은 안 상해?”
“자존심 생각할 거 같으면 벌써 그만뒀어요. 자존심 챙겨 가면서 어떻게 누굴 좋아해요.”
정언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는 소리를 냈다. 그때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짜장면 두 그릇과 탕수육을 올려놓았다. 윤은 드세요, 하고 정언에게 권하며 멋쩍게 말했다.
“뭐 성질 더러운 건 저죠. 선배가 그렇게 밀어내셔도 죽어라 들이대고 있잖아요.”
“이유가 뭐야?”
“선배가 안 믿으실 거 알고, 이런 말 몇 번 한 거 같은데 진짜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에요. 솔직히 누구 만날 때 이 정도로 노력해 본 적 없었고요.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말끝을 흐리던 윤은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정언의 표정에 씩 웃었다.
“저 방금 좀 재수 없었어요?”
정언이 젓가락으로 탕수육을 찍으며 내뱉었다.
“아니라고는 안 할게.”
쿡쿡거린 윤은 짜장면을 돌돌 말았다.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가 옅은 김에 섞여 확 올라왔다. 후각이 자극되는 것과 동시에 뒤늦은 허기가 밀려들었다.
윤은 입 안으로 잘 말아 놓은 면을 밀어 넣으며 정언에게 연신 눈을 주었다. 말없이 음식을 먹던 정언이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봐?”
“선배 뭐 드실 때 보는 거 좋아서요. 되게 깔끔하게 잘 드시잖아요.”
그 말에 정언이 손을 멈췄다.
“나 먹는 것까지 관심 있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윤이 웃기 시작하자 정언이 얼굴을 찌푸렸다. 한참 웃던 윤은 멋쩍게 말했다.
“저 솔직히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 정말 안 좋아하거든요. 열 번 찍어야 될 정도면 그냥 싫은 건데, 싫다는 사람한테 왜 그러나 맨날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선배한테 그러고 있으니까 이상해요.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정언이 입을 열었다.
“김 피디.”
“네.”
“계속 말로는 대답 안 해도 된다면서 행동은 안 그렇게 하는 거 알지?”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특유의 읽기 어려운 표정은 약간 불안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지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윤이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가만히 정언을 마주 보자, 정언이 다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거야?”
“저한테 어떻게 해 주실 수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