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얼마 없는 옷을 옷장에 가지런히 걸고 화장대와 욕실에 물건들을 정리한 정언은 바닥 구석에 접어 둔 커튼을 집어 들었다. 책장과 찬장 정리를 끝낸 윤은 얼른 정언의 손에서 접힌 커튼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이거 제가 달아 드릴게요.”
그 말에 정언이 재미있다는 듯 툭 내뱉었다.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정언의 말투가 어린애 놀리는 투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윤은 씩 웃고 창가에 스툴을 가져다 놓았다. 위로 올라가 커튼을 달기 시작한 윤은 정언에게서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선배는 가끔 저 엄청 어린애라고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저도 내일모레면 서른이에요.”
그 말에 정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특유의 피식 웃는 얼굴이 그려지는 건 아마 착각이 아닐 터였다. 윤이 커튼을 달고 매무새를 정리하자, 정언이 습관적으로 냉장고를 열어 보다 민망한 듯 웃는 소리를 냈다. 원래도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빈 냉장고 안이 오늘은 정말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마실 거라도 하나 주려고 했는데 뭐가 없네.”
“커피나 한 잔 주세요. 생각해 보니까 오늘 아직 한 잔도 못 마셨어요.”
윤의 말에 정언이 그러든지, 하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캡슐 머신에 캡슐을 넣고는 버튼을 눌렀다. 컵 안으로 커피가 떨어지는 소리와 향이 동시에 감각을 자극했다.
정언은 커피가 찬 컵을 윤 쪽으로 밀어 놓고 한 잔을 더 내렸다. 스툴을 도로 아일랜드 식탁 앞에 가져다 놓은 윤은 거기 걸터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기 잔을 들고 선 채 벽에 기대 윤을 내려다보던 정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선배가 포항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봤다며.”
그 말에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그날의 일을 아는 건 재희와 자신 둘밖에 없었다. 정언이 그 일에 대해 안다는 건, 결국 재희에게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재희가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생각하기 무섭게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윤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사이를 두고 커피를 마시다 대답했다.
“네.”
정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에 입이 말랐다. 한동안 정적을 지키던 정언이 다시 물었다.
“선배한테 나 여자로 생각한 적 없냐고 물어본 의도가 뭐야?”
그 말투는 미묘하게 화가 난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혹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쩌면 양쪽 모두일 수도 있었다.
윤은 말없이 잔에 남은 커피를 들여다보았다. 얕게 찰랑거리는 수면 위로 작은 동심원이 번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언을 앞에 두고 그 일에 대해 다시 얘기하는 건 조금 창피했다. 자신이 재희 앞에서 지나치게 어린 티를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윤은 한동안 시선을 내리고 있다가 눈을 들었다. 정언이 빤히 내려다보는 눈빛이 낯설었다. 윤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어떤 남자든 선배 옆에 있으면서 안 좋아한다는 거 말도 안 된다고.”
“그건 본인 생각이고.”
“어쨌든 전 그렇게 생각하니까, 강 피디님이 만에 하나라도 선배 여자로 본다면 저한테 가망 있을까 싶었던 거죠.”
“선배가 그렇다고 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냥 궁금했던 거예요.”
설령 재희가 그때 정언을 여자로 생각한다고 말했더라도, 윤은 자신이 절대 물러날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희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정언이 오래 전부터 재희를 좋아했다는 전제는 그대로였다. 출발선부터 불리한 걸 알고 시작한 게임이었다. 자신에게 더 불리한 요소가 한두 개쯤 추가된다고 해도 이제 와서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윤의 대답을 들은 정언이 기가 찬다는 듯 내뱉었다.
“시보국에서 감히 강재희한테 그런 소리 할 수 있는 거 김 피디밖에 없을걸. 선배한테 얘기 듣고 난 진짜 김 피디 미친 줄 알았어.”
정말 별놈 다 보겠다는 투였다. 그 얼굴을 보니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표정을 가리기 위해 황급히 두어 번 헛기침을 했으나, 이미 윤의 표정을 알아차린 정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본인이 여러 가지로 강심장인 거 알긴 해?”
“저 심장 약해요. 선배랑 둘이 있으니까 지금도 심장 터질 거 같은데요.”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기는 말에 정언이 이마를 짚었다.
“내가 그렇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얘기하는데 계속하는 이유는 뭔데. 그냥 말을 안 듣는 거야, 아니면 무딘 거야? 그런 말 하면 내가 또 화낼 거 뻔히 알잖아.”
“지금은 화 안 내시잖아요.”
“김 피디.”
대답 대신 웃는 윤의 얼굴을 본 정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젠 그만하라는 말 하기도 지쳐.”
“그건 좋은데요. 제가 선배 좋아한다는 말 오늘처럼 길게 들어주신 거 처음이거든요.”
그 말에 정언이 약간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윤은 아직 온기가 남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으나 커피를 더 마시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커피 향에 섞여 낯익은 향의 입자가 스쳐 지났다. 이 계절에 내릴 리 없는 눈의 냄새 같은 것. 이제는 눈을 감아도 그 서늘하고 희미한 향을 그릴 수 있었다. 정언과 가까이 있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윤은 쥐고 있는 컵으로 시선을 내렸다.
“선배가 저 계속 밀어내시는 거 알지만, 요샌 가끔 제가 선배 선 안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정언이 사이를 두었다가 대꾸했다.
“그거 착각이라고 하면 상처 받을 거면서 왜 그래?”
“저한테 선배 엄청 무방비하니까요. 아무한테나 이러시는 거 아니잖아요.”
어떤 의도였든, 먼저 자신의 집에 윤을 초대한 건 정언이었다. 정언이 팀의 누구에게도 그러지 않는다는 걸 이제 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정언이 그랬던 이유가 뭐였을까 종종 궁금해지는 건 당연했다.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마주 앉아 있는 시간이 처음이 아니라는 건, 어떤 의미로든 자신이 정언에게 특별하기 때문은 아닐까. 윤은 테이블 위에 턱을 괴며 정언을 쳐다보았다.
“제가 여기서 선배한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 안 하세요?”
물론 윤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언이 그런 생각 따위를 할 리 없었다. 그건 정언 역시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미쳐 버릴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때로 머릿속이 녹아 버릴 것 같은 상상을 하면서도 결코 이 자리에서 그걸 실행에 옮길 마음은 없었다. 윤은 한순간의 충동을 위해 모든 걸 망가뜨릴 정도로 경솔하지 않았다. 정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 아주 재밌네.”
“선배는 저 더 경계하셔야 돼요.”
윤이 씩 웃는 얼굴에 정언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고 입술로 까딱이던 정언은 약간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내뱉었다.
“그래서, 무슨 짓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듣고 싶으세요? 말하기 싫은데요, 저도 남자니까.”
대답한 순간 공기가 잡아당겨졌다. 끊어질 정도로 팽팽해진 실 같은 긴장감이 고작 자신과 정언 사이의 몇 뼘 되지 않는 틈으로 스며들었다. 정언이 필터를 문 채 눈썹 위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초조함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어떤 경계에 있는 듯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층위들이 그 무의식적인 행동에 묻어났다.
문득 정언의 목소리가 뇌리를 지났다.
― 절대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정언은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분명 진심인 것이다. 단정할 수 없는 감정들. 자신이 정언의 선 안에 있다는 생각이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라고 증명하는 이런 순간들.
지금의 긴장감이 조금만 더 유지된다면, 정언은 다시 자신을 밀어내려 할 게 뻔했다.
거기 생각이 미친 즉시 윤은 컵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가 저 편하게 생각하시는 게 좋은 건지, 의식하시는 게 좋은 건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요. 저 진짜 선배 옆에 있는 거 좋으니까. 그만 갈게요. 쉬세요.”
언제나처럼 무해한 얼굴로 돌아가는 건 쉬웠다. 그건 정언을 더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다. 정언과 자신 사이의 얇은 유리벽을 깨뜨리고 싶어 손을 댔다가도 곧 물러나는 건, 그 조각에 정언이 다치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몇 달 치는 될 고백을 쏟아 낸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그 수많은 단어들은 도리어 제각기 무게를 가지고 내려앉았다.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순간이 실체를 가지게 된다는 걸 윤은 새삼 깨달았다. 말로 뱉어 낸 감정들은 진한 핫 초콜릿처럼 달고 무거웠다.
“김 피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부르는 목소리에, 현관을 나서던 윤이 뒤돌아보았다.
“네?”
문 앞에 선 정언이 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서늘한 눈동자가 깊었다. 길어진 햇살이 정언의 등 뒤에서부터 스며들었다. 윤은 역광이 흐리는 그 표정을 정확히 읽지 못했다. 짧은 침묵을 지키던 정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오늘 고마웠다고. 조심해서 들어가.”
윤은 그 말에 웃는 소리를 냈다.
“냉탕 온탕 번갈아 빠지니까 심장마비 걸릴 거 같은데요.”
“냉탕에만 있고 싶어?”
“아뇨, 어지간하면 온탕에…….”
반 장난 같은 되물음에 눈치를 보며 대답하자 정언이 필터를 문 입술 끝을 슬몃 비틀었다.
“됐고, 빨리 가. 내일은 하루 쉬고.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 테니까.”
“아무 일 없어도 연락해 주시면 안 돼요?”
“하루 종일 화 안 내니까 또 끝까지 가지?”
툭 내뱉은 정언이 윤의 등을 떠밀었다. 못 이기는 척 복도로 나선 윤은 씩 웃었다.
“월요일에 만나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인 정언은 문을 닫았다. 조용히 닫히는 문 안으로 곧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던 윤은 거기 등을 대고 기대섰다. 한 겹의 셔츠 너머로 차가운 냉기가 스몄다.
그러나 눈을 감자 온몸이 그대로 녹아 버릴 것 같은 열기가 머릿속을 감돌았다. 윤은 심장 부근에 손을 대고 가만히 눌렀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감각이 거기에서부터 번져 나갔다. 윤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