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30.
정언이 사무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본 것은 늘 그렇듯 혼자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던 재희였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재희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눈가를 눌렀다.
“이사는 잘 했어? 괜찮은 집 있었고? 갑자기 이사하느라 고생했겠네. 짐만 먼저 뺀 거지?”
“네. 주인한테 보증금은 되는 대로 달라고 했어요. 뭐 이사야…… 김 피디가 나 끌고 다니느라 고생했죠.”
가방을 던져두며 대답한 말에 재희가 빙글빙글 웃었다.
“고생이라고 생각 안 할 테니까 괜찮은 거 아냐?”
이 인간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싸늘하게 내뱉었다.
“적당히 하시죠.”
“내가 뭘 또 그렇게 적당히 안 했다고 그래.”
느물거리는 재희의 얼굴에, 정언은 바로 도끼눈을 떴다.
“하여튼 선배만 아니면 진짜…….”
“선배 아니면 한 대 치겠네, 아주. 어우, 서 피디 선배로 태어나길 다행이야.”
무서워 죽겠다는 얼굴로 자기 어깨를 감싸며 덜덜 떠는 시늉을 한 재희가 곧 화제를 바꿨다.
“토요일에 쪽하고 얘기했는데 정보가 엄청나더라고. 나도 그쪽 취재력 대단하다고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까 더 장난 아냐.”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임형원 기자님 만나고 놀랐다니까. 그 정도 규모 취재하는데 엄대진이 여태 몰랐을까요?”
“추적당하는 거 모르진 않을 거야. 그런데 뭐 어떻게 할 거냐, 이러고 배짱부리는 거겠지. 시사지 기자들 중에 이런 식으로 장기 취재하는 기자들 상당히 있는데 아무래도 예전만큼 지면 파급력이 없으니까. 방송하고 연계를 해야 특종이 되잖아. 방송은 자기들이 다룰 수 있다는 확신 있고.”
정언이 팔짱을 끼며 그렇죠, 하고 수긍하자 재희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우리하고 , 셋이서 해볼 만할 거 같아. 그쪽은 엄대진 비자금 조성 과정, 우리는 서온건설 게이트, 는 부실공사하고 기준 미달 자재 사용에 공권력 결탁한 부분에 집중해서 삼파전하면 어떨까 싶은 거지. 일단 터트리면 그 뒤는 연합해서 내보내더라도.”
“는 사실 문제가 아닌데 우리가 문제죠, 뭐. 그거 터트리고도 프로그램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가 백업 체제로 전환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될 거 같으니까.”
“일단 방송은 무조건 하고, 셔터 내린 뒤의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자고.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 못 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몇 번 문지른 재희가 정언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쪽에서 취재한 페이퍼컴퍼니 관련 자료들 받았으니까 이따 시간 나는 대로 검토해 봐.”
재희의 말을 듣고 있던 정언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왜 굳이 그리스로 갔지? 그리스가 아무리 택스 리조트(tax resort)라도 한국하고 조세조약 체결돼 있지 않아요?”
“글쎄. 김신옥이나 채기원 쪽하고 관련 있지 않을까? 자기한테 익숙하거나 연고가 있는 장소를 조세피난처로 선택하는 사례도 꽤 있긴 하니까. 그건 일단 알아보자고. 조세조약 체결된 상태니까 국세청 내부 자료 가져오면 증거 찾기는 더 쉬울 거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언은 얼굴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였다.
“대선 시즌이라 반출한 자금을 다시 국내로 들여오려고 시도할 확률도 높겠지?”
“그렇지. 선거자금 써야 할 테니까.”
“반입할 때도 유령회사 계좌 이용하겠네요, 그럼. 어느 쪽이든 안영균이 굉장히 중요하긴 한데…… 대포통장 확보 방법 알아내기가 왜 그렇게 어렵지?”
자문하듯 중얼거리는 정언에게 재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 브로커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거든. 수가 너무 많잖아. 일반적인 보이스피싱 업체 같은 데서 개인 계좌 몇 개 거래하는 거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사업자 등록시켜 유한회사 설립하고 법인 계좌 개설하는 방식인데, 여기 브로커 끼면 그 과정에서 백 퍼센트 걸릴 테니 어떻게든 우회하는 방법이 있겠지.”
“하긴 그냥 차명계좌 써도 되는데 굳이 법인 계좌로 세탁하려면…… 유령회사 통해 드나든 자금 추적 어렵게 하려는 목적일 텐데, 수가 한두 개가 아니면 일일이 확인해야 하니까 시간도 걸릴 거고.”
“그건 일단 국세청 자료 오면 안영균 중심으로 파 보자고. 그리고 그 이종규, 감리업체 팀장. 그 사람 연락 왔어?”
정언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 사이에 즉시 마음을 결정할 거라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아직이에요. 뭐 마음 고쳐먹고 전향한다면 좋지만, 안 한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 그 사람 하나 때문에 팩트 전체가 흔들릴 상황은 아니니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재희가 흠, 하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조창식 죽인 애들은 아직 못 잡았다고 했나?”
“연락 없는 거 보면 그렇지 않을까? 하청 쪽에서는 추가 제보 들어온대요?”
“응. 로 들어오는 제보 꽤 많대. 민권당 사반위 쪽에서 입수한 내부 정보랑 취합해서 이번 주 안에 거기 TF하고 회의 한 번 하기로 했어. 이희경 씨 쪽은?”
“일단 담당 형사한테 연락은 해 놨어요. 요새 안 그래도 유아동 대상 범죄가 많아서 정부 차원에서 지침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주변 순찰 강화하고 용의자 특정하는 대로 연락 주겠대요.”
고개를 뒤로 젖힌 재희는 뒷목이 당기는 듯 목덜미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복잡하다, 복잡해.”
“방송 전까지 확인할 수 있는 건 다 확인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어요.”
“일단 되는 대로 하자고. 우리가 배부른 소리 할 때가 아니니까. 몸조심하고.”
재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두 사람은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윤이었다. 재희와 정언을 본 윤이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김 피디. 일찍 출근했네?”
재희의 말에 윤은 월요일이라서요, 하고 대답하며 자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컴퓨터 전원을 켠 윤이 물었다.
“커피 드실래요? 저 지금 사러 갈 건데.”
“아니, 난 됐어.”
재희가 손을 휘적거렸다. 윤이 정언에게 눈을 돌리자 정언은 공연히 재희 쪽을 한 번 흘끔 보고는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정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윤이 피식 웃었다.
“커피 사다 드릴게요. 앉아 계세요.”
그러더니 정말 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사무실을 나갔다. 재희가 없었다면 분명히 커피 사 드릴 테니 같이 가실래요, 하고 말을 붙였을 게 뻔했다. 양쪽에서 속이 빤히 들여다보여 미칠 지경인 게 자신뿐이라는 걸 깨닫자 어쩐지 분한 기분이 되었다.
내가 뭘 했다고, 하며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어느새 돌아온 윤이 책상 위에 벤티 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올려놓았다. 자기 자리에 앉은 윤은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제는 별일 없으셨어요?”
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턱을 괸 채 마우스를 딸깍이던 정언은 손을 멈췄다. 파티션 너머로도 느껴지는 카페모카 향의 입자 때문일까, 여상한 말인데도 그 말투는 유독 더 부드럽게 들렸다. 정언은 애써 그 낯선 감각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아무 일 없었어.”
“그럼 다행이고요. 아, 김회영 씨 일한다는 병원에서 회신 왔는데 인터뷰 응할 수 없다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그러면 그 건에 대해 제보해 준 황정률 목사, 그분하고 다시 한 번 얘기해 봐. 교포 사회 좁고 한인 병원은 더 드물어서 정보 얻는 거 어렵지 않을 거야.”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는데도 묘하게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날 그렇게까지 윤을 받아 주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고 정언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재희와의 대화 이후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참이었다.
잃어버리는 게 두려워서…… 윤이 돌아간 뒤, 정언은 텅 빈 집에 혼자 앉아 오랫동안 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모든 감정들을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정언으로서는 그 질문의 답을 알 수 없었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정언은 책상 위에 놓아 둔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자 메시지 알림이 들어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액정을 한쪽으로 민 정언의 눈에 들어온 건 이희경이라는 이름이었다.
― 안녕하세요, 피디님. 저 이희경이에요. 시간 나실 때 통화 가능할까요?
정언은 즉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채 서너 번 가기도 전 달칵, 하며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서정언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정언이 묻자 희경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저, 금요일에 회사에서 다시 전화가 왔더라고요. 지난번에 연락한 천승욱 팀장이라고, 그분이 잠깐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희경이 사측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당연히 다시 설득을 하려 들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만나자고 이야기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정언은 펜 끝으로 미간을 누르며 물었다.
“만나자고 했다고요?”
『네. 계속 만나서 얘기를 한 번 해 보자, 얼굴을 보고 얘기해야 될 것 같다 그러더라고요.』
“지금 언니분 댁에 계신 건 모르는 거죠?”
희경이 그 말에 확신이 없는 투로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그건 제가 잘 모르겠어요. 일단 만나서 얘기를 하자고 자꾸 그래서 제가 회사하고는 할 얘기가 없다고 말씀을 드렸거든요. 저는 우리 애기 아빠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거라고, 그 돈 안 받아도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일단 만나자고 계속 그러더라고요.』
“혹시 그래서 만나셨어요?”
『네. 전화를 끊어도 계속 연락이 오니까, 한 대여섯 번을 연락했거든요. 그래서 어제저녁에 강남에서 만났는데…….』
희경이 말끝을 흐렸다. 정언은 책상 위에 초조하게 펜 끝을 두드리다 손을 멈췄다.
“무슨 일 있으셨던 건가요?”
『혼자 나온 줄 알았더니 남자들 서너 명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겁이 덜컥 났죠. 좀 그, 회사 직원들 같지가 않더라고요.』
주말 저녁에 강남 한복판에서 여자 한 사람을 어떻게 하려고 작정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그것이 희경에게 충분히 위협이 되었을 것은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회사 직원들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거기에도 경일용역 인원을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희경이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