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그 중에 한 명이 자기가 천승욱 팀장이다, 그러면서 자기 조건 못 받아들이겠다면 보상금 전부 없던 걸로 하겠대요. 소송 걸 거면 한 번 걸어 보라고, 개인이 대기업 상대로 이긴다는 거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얘기하니까…….』
정언은 개새끼들, 하고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타인의 삶과 죽음조차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믿음은 늘 견고했다. 돈과 권력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은 정언에게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요?”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사측에서도 저 고소할 수 있대요. 애들 자라는데 돈 혼자서 댈 수 있냐고, 기업에서 저를 상대로 고소하면 파산하는 거 순식간이라고…… 시댁에도 연락이 갔나 봐요. 어젯밤에 애들 삼촌한테 전화가 와서 저보고 끝까지 가지 말자고, 자기도 형 일 너무 힘들고 분한데, 그렇다고 저하고 남은 애들까지 힘들어지면 어떡하냐고요.』
희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애써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정언은 잠깐 침묵했다. 희경에게 진정할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핸드폰 건너편에서 크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정언은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혹시 녹취는 하셨어요?”
『네. 핸드폰으로 녹음했어요. 녹음하겠다고 미리 얘기하고 했는데 신경 안 쓰던데요. 그런 건 증거가 못 된다면서…….』
“알겠습니다. 파일 보내 주시고요, 저희가 사측하고 접촉해 보죠. 혹시 다음에 이런 일 또 생기면 직접 상대하지 마시고 저한테 바로 알려 주세요. 자문 가능한 분 찾아봐 드릴게요. 아, 수아는 좀 어때요?”
수아 이야기가 나오자 희경의 목소리에 더 풀이 죽었다.
『아직 그냥 그래요. 리아도 수아가 그러니까 눈치만 자꾸 보고…… 저희 언니가 같이 봐주니까 그래도 혼자인 것보다는 좀 나아요.』
“수요일에 저희가 성이진 교수님하고 스케줄 잡아 둔 거 기억하시죠? 혹시 나오기 힘드시면 저희가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피디님. 계속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죠. 요새는 제가 괜한 일 시작했나 그런 생각이 자꾸 들고 그래서 좀…… 그냥 나만 덮고 지나가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 생각이 계속 들어요.』
희경이 얼마나 지쳤을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결코 드문 경우가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정언은 거대한 힘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철저히 무력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그렇기에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건 정언에게도 답답한 일이었다. 에 따라다니는 그 수많은 수식어는 팀원들이 모여 만들어 낸 것이었지만, 정작 자신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수많은 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정언은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희경이 애써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해요. 수요일에 뵐게요.』
전화가 끊어졌다. 정언은 통화 종료 화면을 내려다보다 짧은 한숨을 뱉었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는지 윤이 몸을 뒤로 젖혀 파티션 너머로 물었다.
“이희경 씨예요?”
“응. 돌아 버리겠다, 진짜. 천승욱한테 연락이 와서 제안 안 받아들이면 기존 보상금도 없던 걸로 하겠다고, 이거 계속 진행한다면 사측에서 고소할 수도 있다고 그랬다네.”
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가능해요? 블랙 컨슈머 상대로도 기업이 고소 쉽게 못 하잖아요.”
“그렇지. 불가능하다고 봐야 돼. 기업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 어떻게든 사내 왕따, 과로 자살 이런 걸로 몰아가고 싶은 건데, 그런 걸로 소송 걸어 봐야 기업 이미지만 나빠져. 사람들이 박규형 씨 쪽에 이입하기 너무 쉽다고. 더구나 대기업이 개인 상대로? 자살 행위야. 언론 플레이 아무리 해도 사측에 무조건 불리해.”
“그쪽에서도 알면서 그러는 거죠?”
어이없다는 투로 묻는 윤에게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보상금 얘기하면서 입막음하려는 거지. 이 일 커지는 거 제일 싫어하는 게 서온건설인데 유가족한테 소송을 건다니 말이 돼? 그냥 협박이야. 시댁에까지 연락했는지 시동생이 전화해서 그만하면 안 되겠냐고 그랬다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대요?”
“이희경 씨는 포기할 생각 없는 것 같아. 일단 송 작가님 오면 상생변 쪽 변호사 중에 자문 받을 수 있는 분 좀 알아봐 달라고 그래야겠어.”
상생변 얘기를 꺼내자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금요일에 재희가 상생변의 박기율 변호사와 허주경 사장의 공판 기록을 살펴본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언은 재희에게 물었다.
“선배, 박기율 변호사랑 공판 기록 분석한 건 어떻게 됐어요?”
재희는 읽고 있던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 그거. 변호사 인생 20년에 이런 건 처음 본대. 자기가 보기에는 뭐 거의 변호인의 의무 위반 수준이라고 하더라고. 공론화되면 공윤승 밥줄 끊겨도 할 말 없을 정도라던데. 오늘 안으로 경찰대 쪽에서 당시 검찰 측에서 제출한 영상 분석 결과 보내 준다고 했대. 그거 받으면 송 작가가 평진 측에 질의서 정리해서 보낸다고 했어.”
“오케이.”
정언은 파티션 위로 손을 짚으며 윤을 내려다보았다.
“김 피디, 지금 서온건설 홈페이지에서 그 사원행복문화팀 연락처 좀 찾아봐. 출근 시간 지나면 바로 전화해서 천승욱 팀장하고 인터뷰하고 싶다고 요청하고.”
“인터뷰 응할까요?”
“하든 안 하든 상관없어. 녹취 파일도 있다고 하니까 말 바꾸기는 못 할 거야. 이희경 씨 건드리지 말라고 우리 쪽에서도 경고하는 거지. 이희경 씨가 스스로 포기한다면 모를까, 본인이 의지가 있는데 누가 그걸 막아.”
“알겠습니다.”
인터넷 창을 켜고 서온건설 홈페이지를 검색하던 윤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참, 저 어제 최창묵 씨하고 통화했어요.”
“누구하고 통화를 했다고?”
뜻밖의 이름에 정언이 되묻자 윤이 대답했다.
“최창묵 씨요. 어제 집에 있다가 생각나서 연락해 봤는데 외부 기고도 해서 그런지 모르는 번호도 받는 것 같더라고요. 인데 인터뷰 좀 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더니 어려울 것 같다고 얘기는 하는데, 말하는 투가 좀 걸려요.”
“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게 많은데 말을 못 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엄대진 때문이냐 물어보니까 가타부타 말은 안 하는데 아무래도 직접 가까이서 본 사람이니까…….”
윤이 말끝을 흐렸다. 정언은 파티션 위에 턱을 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만약 창묵과 직접 만나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금 이상의 고급 정보를 획득할 것은 자명했다.
무조건 인터뷰는 안 하겠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하고 싶은 게 많은데 말을 못 한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면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정언은 윤에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계속 푸시 넣다 보면 응하게 돼 있는데. 일단 계속 연결해 봐. 한 번만 만나 보자고. 자기 일하던 데에도 정보 더 안 주는 이유 있을 거야.”
“네.”
윤의 대답을 들으며, 정언은 벽 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주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출근하고도 남았을 민혜가 아직도 오지 않아서였다. 혹시 저게 고장이라도 났나 싶어 손목에 찬 시계를 한 번 더 내려다보았으나, 벽시계는 정확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늦나,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민혜였다. 속을 읽었나 싶을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정언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안 그래도 연락해 보려고 그랬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정언이 묻자 잠깐 사이를 두고 민혜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정언, 나 오늘 회사 늦을 거 같아.』
정언은 바로 그 목소리가 묘하게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늘 발랄한 하이톤이 가라앉아, 누가 들어도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즉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남편과 대판 싸우고 나서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적이 없는 민혜였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 정언은 바로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왜 그래요? 아파요?”
『아냐. 정언, 강 피디 지금 있어? 있으면 내가 전화한다고 얘기 좀 해줄래?』
“선배한테?”
『응.』
정언은 손끝으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까슬거리는 감각이 스며들어 신경을 당겼다. 워킹맘인 민혜의 사정을 뻔히 아는 재희는 민혜가 언제 출근을 하든 퇴근을 하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출근 한두 시간 늦는 걸로 굳이 재희와 통화를 하겠다는 게 이상했다.
정언은 다시 한 번 민혜에게 물었다.
“작가님, 진짜 괜찮아요?”
『금방 갈게.』
정언이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 전화가 끊어졌다.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정언은 미간을 좁히며 재희에게 말했다.
“선배, 송 작가님이 오늘 집에 일 있어서 좀 늦게 나오겠대요. 선배한테 전화하겠다는데.”
“송 작가가 나한테?”
재희도 의아한 듯 물었다. 정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희가 왜 그러지,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채 몇 분이 지나기도 전 재희가 자리에서 응 나야, 하고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민혜인 모양이었다. 잠깐 핸드폰을 귀에 대고 말이 없던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잠깐만. 듣고 있으니까 계속 얘기해 봐.”
재희가 핸드폰을 든 채 사무실을 나갔다. 안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지났다. 정언은 재희가 나간 문을 빤히 보았다. 때마침 출근하던 지혁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말고 정언과 눈이 마주쳐 화들짝 놀라며 가슴 부근을 부여잡았다.
“어우, 선배! 간 떨어질 뻔했어요!”
“내가 본다고 떨어질 간이면 우 피디는 간 백 개쯤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지혁에게 농담처럼 내뱉으며 다시 자리에 앉은 정언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민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손에 든 핸드폰의 꺼진 액정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 표정은 굳어 있었다. 뭔가 유쾌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