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회의실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윤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파일 하나를 들고 들어온 정언이 탁자 위에 파일을 툭 던져 놓으며 윤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심환경시민연대 분석 결과 들어온 거야. TF에서 기본적인 팩트 체크는 이미 다 했대. 민주영 의원실에서 기존 자료 보내 주기로 했고, 민 의원님이 우리하고 인터뷰하겠다고 얘기하더라고. 오상근 교수님 팀 자문 붙일 거니까 일단 먼저 읽어 봐.”
윤은 파일을 열었다. 이공계 출신은 아니었으나, 잘 정리된 그래프 덕에 유해 물질 수치가 기준치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는 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발암 물질인 포름알데히드 성분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해 물질과 중금속 수치가 기준치 이상이었으며, 확인할 수 있는 마감재나 바닥재의 경우 분양 시 제시한 제품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제조사나 브랜드를 속인 건 당연했다. 소음 감소를 위한 최소한의 두께나 인장 강도조차 확보되지 않은 저가 제품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수치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 입주민 조합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사측에서 자재 수급 문제를 이유로 시공 시 제시한 문서와 동질의 제품으로 변경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 역시 거짓말이었다. 당시 본래 문서에 기재된 제조사들에게 확인한 결과, 장원지구 건축 시기 제품 수급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건축한 지 채 십 년도 되지 않은 건물에서 균열이 일어나는가 하면, 균열부를 확인한 결과 시멘트 조성에서부터 확연한 문제가 드러난다는 의견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게 일부 가구 조사한 결과예요?”
자료를 보던 윤의 물음에 정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응.”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을 감안해도 수치가 높은 거죠?”
“새 가구나 리모델링 같은 변인으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는 최대한 배제하고 낸 수치래. 변인이 없다면 더 심각할 수도 있지.”
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정언을 마주 보았다.
“샘플만 이 정도면 전수조사 하면 엄청나겠는데요.”
정언은 턱을 괸 채 들고 있던 펜을 돌리며 대답했다.
“프리미엄 라인에서 원가 절감하려고 유해 자재 사용한 거 알려지면 보상액 천문학적으로 올라갈 거야. 그리고 작년 지진 이후로 경상도 지역에서 특히 내진설계 민감한데, 경상도 혁신도시 개발 때 서온건설이 수주 딴 거 많다고. 이것도 한선당하고 연관 있겠지. 내진설계 공법 제대로 적용 안 됐을 가능성 높아서 알려지면 재건축 요구 들어갈 수도 있어.”
“혁신도시면 신축 건물일 텐데, 재건축이 가능해요?”
“현실적으로 안 돼. 내진설계 보강하거나, 이사 비용 전액 보전하고 추가 비용 보상하는 게 최선이야. 어느 쪽이든 서온건설은 회사 브랜드 가치 바닥으로 처박히는 거 감수해야지. 한선당도 혁신도시 지역 젊은 사람들 표 잃는 건 당연할 거고.”
윤은 흠, 하며 생각에 잠겼다. 정언의 말대로 이 일이 공개된다면 서온건설과 한선당 양쪽 모두의 타격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양쪽에서도 필사적일 게 분명했다.
정언이 생각났다는 듯 윤에게 물었다.
“아, 천승욱하고 연결해 봤어? 뭐래?”
“직원이 일단 팀장님한테 전달하겠다고 얘기는 하더라고요. 연락처는 남겨 놨어요. 황정률 목사님 쪽은 시차 때문에 저녁때 통화하고 싶다고 했고요.”
“알았어. 이것저것 챙길 거 많아서 정신없겠네.”
무심한 듯 툭 뱉은 단어들의 온도가 평소보다 따뜻하다는 게 아마 착각은 아닐 터였다. 토요일의 일 때문일까. 윤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말해 봐야 정언이 펄쩍 뛰며 부정할 게 뻔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게 더 빤하고 귀여워 보인다고 한마디 덧붙였다가는 이 자리에서 멱살을 잡혀 끌려갈 것 같았다. 공연히 헛기침을 한 윤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송 작가님 아직도 안 오신 거예요?”
“그런 거 같은데. 진짜 무슨 일 있나?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그러지?”
정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윤 역시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지만, 아침에 민혜에게 온 전화가 심상치 않다는 건 대충 눈치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때 민혜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멘 채 회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 작가님! 안 그래도 지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반색을 하던 정언이 민혜를 보더니 말을 멈추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얼굴 왜 그래요?”
윤 역시 반사적으로 민혜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달리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였다. 밤샘을 하고 왔다는 날도 저런 얼굴을 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자 민혜가 손을 휘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아냐, 아냐. 이따 얘기할게. 나 경찰대 쪽에서 허주경 사장 공판에서 나온 CCTV 영상 분석 결과 받았는데 일단 이것 좀 볼래?”
민혜가 가방에서 프린트 뭉치와 노트북을 꺼냈다. 노트북을 연 민혜는 프린트 뭉치를 정언과 윤 사이로 밀어 두었다. 정언이 먼저 손을 뻗어 프린트를 집어 들었다. 턱을 괴고 뚜껑을 닫은 펜 끝으로 줄을 그어 가며 프린트를 읽던 정언이 곧 고개를 번쩍 들어 민혜를 보았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검찰 측이 영상 조작했다는 거예요?”
민혜가 자기 노트북 화면이 두 사람에게 보이도록 돌려놓았다. 모니터에는 사건 당일 주경이 혼자 운전했다는 증거라는 CCTV 화면을 캡처해 크게 확대한 사진이 떠 있었다. 민혜는 마우스로 조수석 쪽에 크게 원을 그렸다.
“영상 분석과에서 이거 확인했는데, 영상을 확대해 보면 픽셀을 만진 흔적이 있대. 신우령 교수님이 전화로 얘기하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거기 동승자가 보이는 부분을 지운 걸로 추측된다는 거야.”
“있는 사람을 지워 버렸다고?”
“야간 CCTV 화면은 사실 전문가가 아니면 봤을 때 바로 형체를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잖아. 이거 보면 조수석이 거의 새까매. 공판 기록 보면 검사 측에서는 동승자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그림자가 진 거라고 주장했다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그냥 동승자 부분을 지우고 거기를 적당히 까맣게 덮은 것 같대. 광원 방향 보면 조수석에 그런 식으로 명암이 생기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
윤은 몸을 조금 더 내밀어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무채색의 픽셀이 이루는 흐릿한 형체는 본래 그 자리에 있었을 사람이 누군지를 감추고 있었다. 어둡게 수정된 픽셀 뒤로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민혜가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 위를 긁적였다.
“그리고 이게 화질이 되게 떨어지는데 도로교통부 쪽에 한 번 확인해 보래. 그 당시에 용인휴게소 인근 CCTV 전수 교체돼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고. 교수님이 비슷한 시기에 분석했던 영상들하고 화질 차이가 너무 심하다는 거야.”
심각한 얼굴로 민혜의 말을 듣고 있던 윤이 물었다.
“조작 흔적 없애려고 일부러 화질 떨어뜨려 구분 어렵게 했다는 거죠?”
“교수님 생각에는 그렇다고 본대요.”
민혜의 대답에 정언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웃는 소리를 뱉었다.
“완전 미친놈들이네, 이거. 이 영상 증거로 제시할 때 전문가 증인으로 불렀을 거 아냐. 영상 분석 전문가로 나온 사람 누군지 알아요?”
“한국영상애널러시스라는 영상분석 업체 대표라는데, 이름은 이현교. 그런데 이 업체 정체를 모르겠어. 검색도 전혀 안 되고 우리 DB 뒤져 봐도 뉴스고 인물이고 걸리는 게 없어.”
“실존 업체가 아닐 수도 있겠네?”
민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가 신 교수님하고, 법영상분석연구소 주 소장님한테 연락해서 물어봤는데 자기들은 모르는 사람이래. 한국에서 법영상 분석하는 사람들 빤한데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
“증거도 가짜, 업체도 가짜. 그러면 그 이현교라는 사람도 아예 전문가가 아닌 거 아냐? 검찰이 증거 조작했다는 거 알려지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공윤승한테 질의서 보낼 거라면서요? 이 내용도 포함돼요?”
“응. 일단 내용 대강 정리했어. 상생변 내부에서도 얘기 듣고 다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라고 그랬대.”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정언이 팔짱을 끼며 민혜를 빤히 보았다.
“근데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강 피디 오면 얘기하자.”
민혜의 목소리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별일 없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재희가 오면 얘기하겠다니,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정언 역시 그 대답을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민혜를 재차 다그쳤다.
“대체 뭔데 왜 선배 와야 얘기할 수 있는데요?”
이따가 이따가, 하고 민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때마침 회의실 문이 열리며 재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은 재희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왜들 표정이 그렇게 심각해?”
“송 작가님 무슨 일이길래 선배 와야 얘기하겠다고 그래요?”
정언이 따지듯 묻자 재희가 대답 대신 자기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더니 탁자 위로 밀어 놓았다. 정언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게 뭔데?”
“일단 봐.”
뭔데 그래요, 하고 투덜거리며 재희의 핸드폰을 보기 무섭게 정언의 표정이 굳었다. 그 얼굴에 멈칫한 윤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자기 쪽으로 돌려 보았다. ‘발신번호 없음’으로 표시된 문자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 YBS 강재희 피디 19시 32분 보문동 민권당 황형두 접촉 22시 47분 해산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한 메시지였다. 이런 일이 있다고 듣기는 했어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재희를 쳐다보자, 재희가 눈썹 위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번 주에 전 부장님하고 황 의원님 만났을 때 부장님 보내고 대리 부르려고 기다리는데 이런 걸 보냈더라고.”
“사찰입니까?”
윤의 물음에 재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법 고전적이긴 하지.”
재희는 태연해 보였으나 정작 열이 받은 건 정언 쪽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언이 재희에게 삿대질을 했다.
“제정신이에요? 아니, 나 미치겠네. 나보고는 말 안 했다고 그렇게 펄펄 뛰던 사람이 이건 왜 며칠을 말을 안 해? 역지사지 안 돼요? 선배는 그래도 되고, 나는 안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