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58
158화.
“그건 미안해. 그런데 일단 이게 이 일하고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없었어. 경선 코앞이고 하다 보니 내가 민권당 의원 만나는 데 민감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긴 뭐가 그럴 수 있어?”
정언이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말을 자르자 재희가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런데 아침에 송 작가한테 전화 받고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든 거지.”
“작가님은 또 뭔데요?”
정언이 민혜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아휴, 하고 한숨을 쉰 민혜가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 다시 묶으며 입을 열었다.
“남편이 어제 회사에 일이 있어서 잠깐 출근했었거든. 이게 미리 정해진 스케줄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런데 남편 자리 번호로 어떤 남자한테 전화가 왔대. 전화 받자마자 갑자기 송민혜 작가 남편 되시죠? 그러더라는 거야. 안 그래도 담 작은 인간이 완전히 기절초풍을 해 가지고 누구시냐고 그러니까 그냥 끊어 버렸대. 그러자마자 남편이 나한테 전화해서 난리가 난 거지. 오늘 아침에도 나가지 말라고 그러는 거 일단 출근해서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그러고 나왔어.”
말을 잃은 윤은 민혜를 마주 보았다. 무서운 일을 당한 사람치고는 담담한 얼굴이었으나, 도리어 그 때문에 그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새삼 느껴져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정언이 진심으로 화가 난 얼굴을 하며 팔짱을 끼었다.
“황당하네. 이거 지금 우리랑 뭐하자는 건데? 어디까지 가나 해보자는 거야? 진짜 끝까지 가자고?”
“그쪽도 이판사판인 거지. 조창식이 갖고 있던 동영상도 그렇고, 송 작가한테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 보니까 아무래도 이거 계속하면 진짜 뭐 어떻게 할 생각인가 싶어.”
재희가 약간 짜증이 묻어나는 투로 내뱉었다. 정언은 민혜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지금이라도 빠질래요? 일단 누구 하나라도 안전해야 할 거 아냐.”
정언의 말을 들은 민혜가 별 웃긴 소리 다 듣겠다는 투로 대꾸했다.
“정언, 뭐라는 거야. 내가 여기 짬이 있어도 정언보다 더 있어. 이런 거 가지고 팀에서 빠지라고? 장난하니?”
곁에 있던 재희가 서둘러 민혜를 만류했다.
“이런 일 있었던 적은 없잖아. 송 작가 혼자면 모르겠는데 남편한테 전화 걸었다는 거 나도 좀 그래.”
“뭐가 그래, 그렇긴. 진짜 협박할 생각 있었으면 나한테 남편 얘기 했겠지, 남편한테 내 얘기를 해? 나보고 그만두라고 고사 지낼 생각인가 본데 그런 거라면 송민혜 잘못 봤어. 내가 이래봬도 올해의 탐사보도상 작가상을 두 번이나 받은 사람이야. 이 얘기 강 피디한테 한 거 팀 빠지겠다고 하려고 그랬겠어? 나한테도 이러는 거 보면 더한 일 벌일 거 같으니까 조심하라고 한 거지.”
민혜가 답지 않게 정색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재희가 턱을 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다들 간이 너무 부었어.”
“간 출납하는 강재희한테 그런 소리 듣기 싫거든?”
콧방귀를 뀌는 민혜에게 재희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되물었다.
“송 작가 간 부은 게 나 때문이라고?”
“그럼 누구 때문이니? 강 피디가 자기 같은 인간들만 여기 남겨 놔서 그런 거 아냐.”
“음, 일리는 있네.”
만담 콤비처럼 재희는 짐짓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정언이 이마를 짚었다.
“이 사람들이 진짜, 지금 농담이 나와요? 작가님, 신고는 했어요?”
“경찰 신고해 봤자 장난전화라고 생각할 거야. 수사 제대로 될지도 의문이고. 일단 황 의원님 쪽에 얘기는 했어. 자기가 비슷한 사례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하더라.”
민혜 대신 재희가 대답했다. 정언이 퍼뜩 생각난 듯 재차 물었다.
“전한동 부장님은? 셋이 같이 있었는데 선배만 그 문자 받았어요?”
“그런 것 같아. 부장님 TF 만든 거 극비니까 아직 모르는 거 아닐까 싶네.”
“아, 진짜…….”
한숨을 내쉰 정언이 얼굴을 감쌌다. 재희가 멍하니 앉아 있는 윤에게 눈을 돌리더니 씩 웃었다.
“그러면 이제 김 피디 혼자 남은 거야?”
“네?”
화들짝 놀라는 윤을 흘끔 본 정언이 재희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고 그래요, 미쳤어요?”
“농담이야, 농담.”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김 피디한테는 너무 셌나?”
재희가 멋쩍게 물었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 정언은 얼굴을 찌푸리며 민혜에게 말했다.
“내가 도로교통부 쪽 연락해서 당시 인근 CCTV하고 증거로 제출된 CCTV 교체 사실 있었는지, 기종 사양 어떻게 되는지 알아볼게요. 작가님은 당분간 출근 안 해도 돼요. 별일 없으면 그냥 집에 있어요.”
정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혜가 팔짝 뛰었다.
“아우, 됐어. 집에 있으면 더 힘들어!”
“하여튼 어떻게 다들 이렇게 말을 안 듣냐, 진짜.”
자포자기한 말투로 내뱉는 정언에게 민혜가 기가 막혀 죽겠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어머, 세상에. 여기 자기소개 하는 사람 왜 이렇게 많아?”
“우리가 이렇게 공감 능력이 없다. 서로 역지사지 하나도 안 되는 거 봐.”
재희가 들으라는 듯 혀를 차자, 민혜가 눈을 흘기고는 말을 돌렸다.
“아무튼 지금 둘이 보던 거 안심환경시민연대 분석 결과지? 그거 나 아직 못 봤으니까 보고 좀 알려 줘. 이거 끝나면 김신옥 관련된 정보 있는지 좀 서치해 볼게. 채기원 걔도 그렇고. 둘 다 조심 좀 하고.”
“작가님이나 잘 해요, 작가님이나. 내가 제명에 못 죽어.”
정언이 손을 내젓자 민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짚었다.
“이제 내 심정 알겠어? 사람이 꼭 자기가 당해 봐야 안다니까.”
“그만 좀 해요, 나 심각해.”
“심각하지 말고 일하자고. 나 박 변호사님하고 여기서 만나서 질의문 최종 점검하기로 했으니까, 공문 보내는 대로 알려 줄게. 정언하고 김 피디도 수고해.”
재희가 나가, 나가, 하며 민혜의 등을 떠밀어 함께 회의실을 나갔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 정언이 손으로 얼굴을 두어 번 문질렀다. 답답해하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송 작가님 괜찮으신 거예요?”
“안 괜찮지. 남편 회사 출근하는 거 알아서 일부러 전화하는 거 보면 진짜 감시 붙인 모양인데.”
“그럼…….”
윤은 무심코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재희와 정언, 민혜까지 감시의 대상이 됐다면 자신도 예외일 리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일하고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정언과 붙어 다니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탓이었다.
자신이 표적이 되는 건 상관없었지만 정언을 타깃으로 삼는 건 문제가 달랐다. 조창식의 핸드폰 속에 남아 있던 엄대진의 영상이 퍼뜩 떠올랐다. 취재를 계속한다면 정언을 다시 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워졌다.
윤은 그런 속내를 들킬까 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가진 장부나 하청업체 제보 통해서 장원지구 공무원들하고 서온건설 커넥션 찾을 수 있겠죠?”
다행히 정언은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
“그건 거의 확실하지, 뭐. 감리가 개입해서 허가 났을 테니까.”
“조창식 동영상에서 엄대진이 진송신도시 공사 서두르자고 하던데 괜찮을까요?”
“일단 우리 방송 나가면 진송신도시 공사는 무조건 스톱이야. 분양권 가격 낮춰서라도 빨리 뿌리라는 거 보니까 일단 사람들이 사고 나면 방법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혹시 대선 전에 서온건설 분양 완료시키고 선거자금 당겨쓰려고 하는 건가?”
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언이 펜 끝을 탁자 위에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높지. 국세청 내사 자료 입수하면 서온건설에서 페이퍼컴퍼니로 들어가는 돈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채기원 관련해서 좀 알아볼 테니까, 스케줄 관리 철저하게 해.”
정언은 다시 프린트 위로 눈을 주었다. 그러나 무엇을 읽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윤은 한참이 지나도 종이 한 장 넘길 기미도 없는 정언을 가만히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언은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종이 위의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윤이 묻자 정언이 퍼뜩 고개를 들어 윤을 마주 보았다. 그 눈동자가 흔들린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기껏해야 몇 초나 될까 싶은 침묵이 사이를 가로질렀다. 정언은 다시 시선을 내리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내 걱정 하지 마. 얘기했지, 본인 잘 지키라고.”
그건 자신이 정언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윤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앞에 놓인 프린트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빨간색과 파란색, 녹색, 노란색으로 표시된 그래프의 눈금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 * *
정언은 민혜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종이를 보았다. 이면지 뒷면에는 연당건설, 남정건설, 남제선, 김신옥, 자회사, 채기원, ECOS 따위의 수많은 단어들이 아무렇게나 잔뜩 쓰여 있었다. 민혜가 빨간 펜으로 ‘연당건설’이라는 단어 위에 동그라미를 치며 입을 열었다.
“연당건설이라고, 남정건설 잘 나갈 때 라이벌 회사라고 해야 될까, 뭐 그런 회사였어. 당시 경북 지역 건설사 매출로는 남정하고 1, 2위. 물론 남정하고 규모 차이는 상당히 있었는데 어쨌든 중간층이 없었으니까. 그때 연당건설 사장이 김연덕인데 딸만 둘 있었다고. 남제선 부인인 김신옥이 장녀야. 동생은 김인옥인데 이십 대 초반에 병으로 죽었다고 하더라고.”
“그러면 딸 하나만 남은 거예요?”
정언이 묻자 민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무래도 시대 생각하면 김연덕이 딸한테 회사 물려주는 거 걱정됐던 것 같아. 그래서 남강웅 사장하고 얘기를 해서 정략결혼을 시켰다고.”
“그러면 결혼을 하면서 남정건설이 연당건설을 인수합병한 건가?”
“어차피 딸한테는 못 물려줄 회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그냥 사위 주고 딸이나 편하게 살게 하자, 뭐 그런 생각도 있지 않았겠어? 방법이야 어쨌든 남제선이 사업 수완은 좋았으니까 결론적으로 친정 아빠 입장에서는 선택 잘 한 거지.”
팔짱을 끼며 민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언은 이마 부근을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까 김신옥은 별 얘기 못 들어본 거 같긴 한데, 어떤 사람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