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
16화.
윤이 되묻자 정언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진송신도시 자살 사건 시작할 거야. 송 작가님하고 이희경 씨 미리 얘기됐다고 하니까. 카메라 잡아 본 적도 없는 건 아닐 테고, 캠 쓸 줄은 알지?”
대학생 아르바이트도 이렇게는 안 다룰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웃자, 정언이 파티션 옆으로 목을 뽑아 윤을 빤히 보았다. 웃음기라고는 흔적도 없는 얼굴에 윤은 서둘러 헛기침을 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언은 뭐라고 더 말을 보태지도 않고 얼굴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제 팀에도 조금씩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악명에 비해 괜찮다는 생각까지 드는 중이었다. 일단 팀원들이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들이라 더 그랬다.
그 유명한 강재희는 물론이고, 다른 선배들도 의외로 유쾌하고 무던한 편이었다. 막내라는 지혁은 입사 선배인데도 윤에게 선뜻 형, 형 하며 살갑게 굴었다. 작가들도 활력 있고 싹싹했다. 물론 그런 성격들이 아니라면 버티기 쉽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다만 단 한 사람, 정언은 예외였다. 차갑기가 시베리아 벌판에 북풍 부는 수준이었다. 원래도 말이 많은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지만, 정말 용건 이외의 대화는 일 분을 잇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실 기억하는 한 자신이 타인에게 접근하는 게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어디서나 잘 웃고, 성격 좋고, 사교성 괜찮은 놈이라는 평이었다. 겸양을 좀 섞어 그럭저럭 괜찮은 얼굴 덕분에 여자들에게는 더 그랬다. 그런데도 유독 정언에게는 말 한마디 붙이는 게 힘들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이유를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정신을 팔다 차 들이받은 놈이라 더 밉게 보이는 건가 싶어, 지혁을 붙들어 몰래 물어보기까지 했다.
「선배 혹시 나 싫어하셔?」
그 말을 들은 지혁은 배를 잡고 웃었다.
「정언 선배 원래 남자들한테는 진짜 얄짤없어요. 그나마 나나 형은 후배니까 봐주는 거지, 선배들한테는 더해요. 임 피디님 짬이 얼만데 정언 선배가 뭐라고 하면 찍 소리도 안 하시잖아요. 강 피디님도 정언 선배한테는 지고 들어가는데.」
후배니까 봐주는 게 이 정도라니, 선배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하자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까마득한 선배인 찬수나 재희조차 그럴 정도라면 이 상황을 감지덕지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정말 괴로웠다. 앞으로 최소한 몇 달 동안 사수와 부사수로 붙어 지내야 할 텐데, 이렇게 눈치만 보며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못 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사실 정언에게 관심이 좀 생긴 터라 더 그랬다. 정언은 의 유일한 여자 피디인 데다 이례적인 초고속 입봉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뒷말이 나올 법도 했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실력이라는 게 더 흥미로웠다.
어지간한 남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겁이 없고, 사생활도 없이 완전히 방송에만 미쳐 산다는 평도 파다했다. 정언 자신도 그런 평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는 듯했다. 서정언이라는 사람이 점점 더 궁금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이왕 일하는 거라면 폐지할 때까지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기는 싫었다. 인사위에서 엿 먹으라고 여기 가져다 박아 놓은 거라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엿이나 먹으면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민혜의 말대로 정언에게 배울 게 많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윤은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정언과 친해지는 게 우선이었다. 며칠 동안 정언을 관찰하며, 이 추운 날씨에도 정언이 꼭 아침마다 벤티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는 건 파악한 뒤였다.
아까 들어올 때 손이 비어 있었으니 아직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것 같았다. 방송국 로비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고, 자신의 몫으로는 따뜻한 카페라떼를 산 윤은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정언은 자신이 들어오든 나가든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다이어리를 펼쳐 놓고 일정을 체크하고 있었다. 가방에 늘 비축해 두는 에너지 바를 하나 꺼낸 윤은 커피와 에너지 바를 정언의 책상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뭔가 적던 손을 멈춘 정언이 고개를 돌려 윤을 쳐다보았다.
“뭐야?”
“아침 안 드셨을 것 같아서요.”
윤은 최대한 상냥하게 대답했다. 정언이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을 하더니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매번 이렇게 사람을 관찰하듯 보는 건 습관일까, 아니면 직업병일까. 입이 말랐다.
약간 긴장한 윤은 얼른 한마디를 보탰다.
“아침마다 항상 커피 드시더라고요. 그래서…….”
“김 피디, 원래 그렇게 남 일에 관심 많아?”
정언이 말을 자르며 물었다. 화가 난 건지 웃음을 참는 건지 헷갈리는 말투였다. 둘 중 어느 쪽인지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윤은 일단 웃었다.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겠냐 싶어서였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한테는 다 관심 많지 않나요?”
윤은 그 말을 꺼낸 즉시 후회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런 소리를 했더니 아무래도 수작 부리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어떤 면에서 수작을 부리는 건 사실이긴 했지만,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정언에게 또 점수가 깎일 듯한 예감이 들었다.
정언이 윤을 빤히 쳐다보더니 바람 새는 소리로 픽 웃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 누가? 내가?”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윤이 머뭇거리다 네, 하고 대답하자 정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생각 잘못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윤이 입을 떼기도 전 정언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잘 마실게. 그리고 지난번에도 그렇고, 나 선배 대접 받고 싶어 하는 사람 아니니까 굳이 이런 거 안 사와도 돼.”
“아뇨, 아니에요. 선배,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윤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선배 눈치 보면서 알아서 기려고 커피를 상납한 건 아니었다. 지난번에 정언에게 레몬티를 사다 준 건 나갔다 들어오자마자 재채기를 하길래 혹시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돼서였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아부하는 놈이라고 오해하는 건 곤란했다.
“아니면 다행이고.”
정언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다지 다행인 것 같지 않은 말투였다. 그래도 대기업과 방송국을 거치며 꽤 다양한 타입의 선배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정언 같은 스타일은 정말 처음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기분이라 윤은 입을 다물었다.
“뭐가 아니면 다행인데?”
그때 문가에서 재희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재희가 손을 휘적거렸다.
“일어나지 마. 무슨 조폭들도 아니고, 선배 온다고 그렇게 인사하면 부담스러워. 근데 서 피디는 뭐가 아니면 다행이야?”
“아침부터 커피 상납하길래 하지 말라고 했어요.”
정언이 대답하자 재희가 오, 하며 팔짱을 끼었다.
“김 피디 같은 남자가 아침부터 커피 사 주는 거 드문 일인데, 왜. 잘생긴 남자가 사 주는 커피가 더 맛있지 않아?”
아무리 들어도 농담 반, 진담 반의 말투라 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정언이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코웃음을 쳤다.
“예쁜 여자가 사 준 커피도 맛있고? 그거 아주 정치적으로 불공정한 발언인 거 알죠?”
“아, 인정. 내가 실수했어.”
재희가 순순히 두 손을 들어 보이자 정언이 눈을 흘겼다.
“하여튼…….”
정언이 말끝에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거의 들리지 않았다. 재희가 소리를 내어 웃고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정언의 얼굴에 잠깐 미소 같은 표정이 머물렀다 사라졌다. 윤은 파티션 위로 나온 재희의 머리통을 흘끔 보다 다시 정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희도 정언에게 한 수 접어준다고는 했으나, 확실히 정언이 재희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 부드러웠다. 물론 그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시청자 카페에서 읽은 제작진 인터뷰를 통해, 윤도 이미 재희와 정언이 이 팀에서 가장 오래 함께 일한 동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팀에서 몇 년을 같이 일했다면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사람인 이상 유대감이 강한 상대에게 벽이 낮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약간 미묘해졌다. 자세를 고쳐 앉은 윤은 에너지 바를 하나 뜯어 먹으며 커피를 마셨다. 단맛과 쓴맛이 번갈아 혀를 감고 넘어갔다.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지만 어쩐지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야 할까. 말하자면, ‘나에게 이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그러나 윤은 다음 순간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서둘러 털어 냈다. 설마 자신이 그렇게까지 유치하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윤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정언처럼 공과 사가 칼 같은 사람이 본 지 며칠 되지도 않는 후배에게 스스럼없이 군다는 게 더 이상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고 기분이 대단히 좋아지지는 않았다.
윤은 얼른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정언이 재희를 보다 잠깐 웃던 그 얼굴이 이상하게도 잊히지 않았다. 그 차가운 눈매가 순간적으로 부드러워지던 찰나가 착각일 리 없었다. 웃으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하며 상상만 해 보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윤이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있을 리 없는 정언은 열 시 정각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윤은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소스라쳤다. 정언이 뒤에 놓인 캠코더 가방을 가리켰다.
그제야 열 시에 인터뷰 나가자고 했던 정언의 말이 떠올랐다. 서둘러 카메라를 챙기는 사이, 정언이 재희에게 인터뷰 다녀옵니다, 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정신없이 정언을 따라나선 윤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무심결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 키를 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진짜 정신머리 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 더욱 초조해졌다.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지금이라도 중간에 내려서 뛰어갔다 올까, 오만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이 결국 자진납세를 한 건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였다.
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앞서 걸어가는 정언을 붙들었다. 정언이 이건 또 뭔가 하는 얼굴로 윤을 돌아보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배, 죄송해요. 제가 차 키를 놓고 왔는데…… 다시 올라갔다 와도 될까요?”
새파란 신입이 선배와 외부 스케줄을 나가는데 차 키를 잊어버리고 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교양국에서 이랬다면 진수가 3박 4일쯤은 두고두고 생각날 때마다 쟤 진짜 정신없는 놈이야, 하고 손가락질을 할 게 분명했다.
윤이 안절부절못하며 허락을 기다리는 사이, 정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정언은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폴딩 키의 버튼을 눌렀다. 근처에 세워진 검은색 SUV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정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