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야, 강재희!”
새벽녘에야 잠깐 잠들었던 것 같은데, 숙직실 문을 열며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재희는 즉시 얕은 잠에서 끌려 올라왔다. 물에 빠진 듯 무거운 머리를 감싸며 부스스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누군가 양어깨를 움켜쥐어 흔들었다. 어두운 숙직실에서 들이치는 복도의 빛에 재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휘적였다.
“잠깐만, 잠깐만. 머리 울려요.”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눈을 몇 번 깜박이자 흐려졌던 시야가 돌아왔다. 눈가를 손끝으로 비비자 희미하게 낯익은 윤곽이 들어왔다. 충민이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고개를 두어 번 흔든 재희는 몸을 바로 일으켰다.
“어, 선배. 지금 몇 시예요? 나 많이 잤나?”
잠긴 목소리로 묻자 충민이 다급하게 다그쳤다.
“많이 잤을 리가 있냐? 지금 자는 게 문제가 아니고, 너 시보국 3부 CP로 최영직 발령 난 거 봤어?”
그 말은 귀에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들이 웅웅거리며 머릿속에서 잡히지 않고 멀리서 떠돌았다. 아무래도 선잠에서 막 깨어난 탓인 듯했다. 재희는 한쪽 머리를 감싸며 다시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됐다고요?”
충민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네 CP 새로 발령 났다고, 인마! 뭐 얘기 들은 거 있었어?”
“아, 네. 국장님이랑 얘기할 때 이사회에서 그렇게 하겠다더라 그러시긴 하던데…….”
거의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재희는 순간 정신을 번쩍 차렸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의식이 명료해졌다. 재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충민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발령이 났다고요?”
충민이 어이없어하며 재희의 어깨를 툭 쳤다.
“뭘 들었어, 이게. 잠 덜 깼냐? 빨리 세수하고 와, 이 새끼야.”
“아니, 나 정신 들었어요. 누구? 최영직?”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최영직이라면 사회부 기자 출신으로 현재 미디어기획센터 기획실 실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정언의 아버지인 서현국 기자와 함께 명콤비로 이름났던 기자였다. 그러나 기자직을 그만두고 관리직으로 옮긴 지 오래라, 재희도 직접 그를 만나 본 일은 없었다.
“미디어기획센터는 어쩌고 여기 CP로 발령을 냈대요? 그거 좌천급 인사 아닌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들며 침대에 걸터앉은 채 묻자 충민이 얼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였다.
“겸직으로 처리한 것 같아. 사규에서 불가능하다고 돼 있지는 않으니까. 근데 이 새끼들이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어. 그 사람 보통내기 아닌데 그런 사람을 왜 너네 팀에 CP로 붙이려고 들지?”
충민은 정말 모르겠다는 투였다.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희는 미간을 좁혔다.
“실무 떠난 지 오래됐잖아요. 선배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데요?”
충민이 기억을 더듬다 대답했다.
“뭐 한 십 년 넘었지.”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닐 수도 있지, 그럼.”
재희의 말에 충민이 반신반의하는 얼굴을 했다.
“에이, 그래도 최영직 하면 딱 그런 게 있는데…….”
“백 국장님이나 전한동 부장님 같은 분 안 흔한 거 선배도 잘 알면서 왜 그래요.”
그 말의 함의를 충민 역시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변절하는 건 언제나 쉬웠다. 어제 함께 신념을 지키자고 약속한 동료가 오늘은 그렇게 멍청한 짓 아직도 하느냐고 훈계하는 건 이미 하루 이틀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할 말을 잃고 있던 충민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씨발, 진짜 이게 뭐냐. 감을 못 잡겠네.”
“두고 보죠. 무슨 꿍꿍이인지 서로 뚜껑 까기 전에는 모르는 거니까.”
재희의 차분한 대답에 충민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속 편해서 좋겠다, 인마.”
“제가 편하고 싶어서 편합니까. 우리 팀 일이니까 일단 제가 알아서 할게요. 새벽부터 열 내지 말고 선배도 가서 더 쉬어요.”
대꾸하며 침대에서 일어난 재희는 기지개를 켰다. 충민의 드넓은 등짝을 떠밀어 보낸 재희는 샤워실에서 대강 물을 뒤집어쓰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머리를 털며 무심코 거울로 시선을 주자, 짙은 피로감 어린 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비쳤다.
세면대를 짚으며 긴 한숨을 쉬자 서늘한 입김이 흩어졌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들며 얼굴을 대강 닦은 재희는 사무실로 올라왔다. 사무실 앞 시사보도국 게시판에 인사이동 공고문이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인사발령 공고, 부서 변경 인사발령, 하기와 같이 인사발령 되었음을 통보함, 성명 최영직, 보직 CP, 부서 변동사항, 미디어기획센터▷시사보도국 3부.
사무적인 글자들은 선명했다. 한동안 그 앞에 서서 공고문을 뚫어지게 보던 재희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이미 와 있던 피디들이 일제히 재희 쪽을 쳐다보았다. 재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불안한 얼굴로 눈알을 굴리던 호형이 먼저 물었다.
“복도에 공고문 붙은 거 보셨어요? 혹시 잘 아는 분이에요?”
“시보국 최영직 기자 하면 그래도 알아주긴 했는데…… 실무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이라 내가 가타부타 말을 못 하겠어. 미디어기획센터 쪽에서는 별 존재감이 없었는지 딱히 무슨 얘기 들은 게 없어서. 오기 전에 이충민 선배 만났는데 선배도 현장 뛸 때 보고 그 이후로는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심각한 표정을 한 찬수가 재희의 말을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사회부 서현국 기자 직속이었다며. 자기가 본 게 있는데 설마 우리한테 뭐 어떻게 하기야 하겠어? 다들 여기 CP 안 하려고 그래서 보낸 거 아닌가? 센터 쪽에 아는 사람 있어서 물어보니까 거기 기획실 실장하고 겸직으로 갖다 놓은 거 같다던데.”
호형의 책상에 걸터앉아 초콜릿 바를 우적거리던 예준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폐지할 프로그램 뭐가 겁나서. 길어야 두 달이나 갈까 싶은데, 그사이에 우리 눈치 보겠다고 그런 사람 가져다 놓는다고? 백 퍼센트 이유 있겠지. 예전엔 멀쩡했다가 맛 간 사람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심석건도 백선경 국장님 현역일 때 직속이었던 거 몰라요?”
석건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찬수가 침울해졌다. 하긴, 하고 중얼거리는 찬수의 얼굴에 혀를 차던 재희는 문이 열리는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부터 구겨진 정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서 피디.”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자 정언은 본체만체하며 턱짓으로 문 밖을 가리켰다.
“저 공고문 뭐예요? 우리 CP가 최영직 선배라고?”
재희는 대답 대신 정언에게 가방 내려놓으라는 손짓을 하며 물었다.
“잠깐 커피 마시러 갈래?”
“왜 서정언하고만 마셔, 우리도 입 있는데. 서정언 입은 입이고 우린 주둥이냐?”
찬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루퉁하게 내뱉자 예준이 곁에서 질색을 했다.
“어우, 저 둘이 커피 마시는 데 끼고 싶어요? 난 끼워 준대도 싫어.”
“주 선배, 같이 가시죠. 난 싫다는 사람 보면 꼭 같이 가고 싶더라고.”
가방을 자리 뒤에 던져 놓은 정언이 고개를 까딱이자 예준은 먹던 초콜릿 바를 입 안에 욱여넣으며 양팔을 휘저어 온몸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피식 웃은 정언이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재희는 정언과 나란히 서 있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최영직 선배가 아버님 직속이었다며. 아는 사람이야?”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정언은 재희가 따라 타기 무섭게 닫힘 버튼을 누르며 대답했다.
“어릴 때 집에도 자주 놀러 왔었고…… 아빠 돌아가셨을 때 제일 먼저 연락해 준 것도 아저씨였어요. 그러고 입사하기 전까지는 뭐 볼 일 없었고, 나 입사했을 때는 이미 현장 떠났고. 굳이 CP로 붙인 거 좀 찝찝한데.”
“그럼 서 피디 당연히 기억하겠네.”
“그럴걸요. 예전에 에도 잠깐 있었다고 그러던데 맞아요?”
앞을 보며 묻는 정언에게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들어오기 전이야. 아직 지금 포맷 정해지기 전에. 그때는 지금처럼 피디 저널리즘, 이런 말 없었을 때니까. 저널리즘이라고 하면 기자들 전유물이라고 생각할 때라 탐사보도 프로그램에 기자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고. 그래서 기자들이 직접 나와서 진행했었는데 그 시절에 2년인가 했을 거야.”
“그럼 프로그램 이해가 아주 없진 않겠네. 아는 사람이라 더 불편한데…… 위에서도 알고 일부러 박은 건가?”
“윗선에서야 뭐 이력서만 봐도 서 피디 아버지 누군지 다 아니까. 어차피 국장님 얘기도 그렇고 CP 들어오는 거 자체를 막을 방법은 없는데, 그게 굳이 최영직 선배인 게 좀 걸리네. 당근인지 채찍인지 감이 안 오니까.”
재희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로비에 내려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킨 재희는 구석 자리에 정언과 마주 앉아 잠깐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커피도 이른 아침부터 내려앉은 무거운 기분을 떨어내기엔 부족했다. 재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는 정언의 옆모습을 보고 있다가 말을 돌렸다.
“아, 어제 그 저수지에서 차 침수됐다는 거 어떻게 됐어? 연락 있었어?”
“어제저녁에 연락 왔던 거니까 빨라도 낮이나 돼야 하지 않겠어요?”
정언이 눈썹 위를 긁적였다. 어제 저수지에 침수된 차 안에서 조창식을 죽인 걸로 추정되는 용의자 두 사람이 발견됐다는 정언의 말을 듣자마자 재희 역시 살인일 거라고 직감한 터였다.
“알았어. 오늘 임 선배 종편 있으니까 제보 자막 넣어 달라고 얘기할게.”
재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으나 정언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정언이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괜히 나한테 직접 연락 와서 설득하려고 하는 거 아닌지 좀 걸리고 그러네. 무슨 말 할지도 모르겠고.”
“혹시 뭐 다른 소리 하면 서 피디 선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나한테 보고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고.”
재희의 말에 정언이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선배라고 무슨 뾰족한 수 있어요?”
“기어오르게 내버려 두니까 강재희가 아주 만만하지, 이제?”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