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짐짓 엄한 얼굴을 한 재희는 목소리를 낮췄다.
“어차피 타깃 정해져 있잖아. 다른 피디들은 상관없어. 회사 입장에서도 광고 수익 포기하기 쉽지 않을 거고. 굳이 몇 주 안 남은 방송에 CP 붙여 관리하려는 거 일단 나 찍어 내고 나머지 남겨서 컨트롤하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지. 서 피디가 골치 아프게 굴면 곤란하니까 최영직 선배 보내서 어떻게 좀 해 보라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선배 없으면 그게 예요?”
정색하는 정언에게 재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위에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누가 하든 똑같다고 보는 거지. 그리고 사실 내가 없어도 프로그램이 똑같이 유지돼야 맞는 거기도 하고.”
“그런 소리는 은퇴할 때나 하시고요.”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은퇴할 때 그런 소리를 하래? 몇 년이나 더 현역 있으라고?”
“은퇴할 때까지 하기로 했잖아요. 벌써 오락가락해요?”
웃지도 않고 다그치는 정언의 얼굴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재희는 소파에 등을 묻었다.
“아주 선배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그러네. 김 피디는 별일 없었대?”
윤의 이야기가 나오자 정언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요?”
“아니, 혹시 모르니까. 아직 한 번도 얼굴 팔린 적 없긴 한데, 취재도 워낙 붙어 다녔고 그래서 좀 걱정되네.”
최근 팀원들에게 연이어 벌어진 위협 이야기라는 걸 알자, 정언이 굳었던 표정을 약간 풀었다. 하여튼 빤하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재희는 커피를 마시는 척 웃는 표정을 감췄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 정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하라고 말은 했는데 자기가 당해 본 적 없어서 그런가, 실감을 잘 못하는 거 같긴 하더라고요. 뭐 우리도 다 그랬으니까. 그런 일 안 생기는 게 최선이긴 하지.”
“서로 케어 잘해. 팀원 말고 믿을 사람 없으니까.”
정언에게 당부하던 재희는 문득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아침부터 누군가 싶어 핸드폰을 꺼내자 성옥의 이름이 액정에 선명했다.
“뭐지? 이 작가네. 여보세요?”
전화를 받기 무섭게 성옥의 다급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피디님, 지금 CP실에서 전화 왔거든요. 피디님 부재중이냐고, 사무실에 있으면 오라고 하시는데 뭐라고 할까요?』
“지금 간다고 해.”
대답한 재희는 바로 전화를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던 정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희를 쳐다보았다.
“뭐래요?”
“새 CP님이 나 보셔야겠다는데. 뭐라고 하는지 일단 들어나 봐야겠다. 커피 마시고 올라가. 갔다 와서 다시 얘기하자고.”
정언에게 더 앉아 있으라고 손짓을 한 재희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CP실은 시사보도국 한 층 위였다. 복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끝에서 두 번째 방 앞에 서자 그사이 언제 바꿔 달았는지, ‘최영직 CP’라는 글자가 선명한 문패가 눈에 들어왔다.
재희가 문을 두 번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와,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재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희미한 담배 냄새 같은 것이 방 안에 배어 있었다. 커다란 책상 앞에 안경을 쓰고 앉아 신문을 펼쳐 들고 있던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접었다.
재희는 그 신문이 인 것을 즉시 알아보았다. 원칙주의자 같은 깐깐한 인상은 기자라기보다는 학교 교감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재희는 문가에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재희입니다.”
영직이 소파를 가리키며 물었다.
“앉지. 뭐 한 잔 줄까?”
“아닙니다. 방금 커피 마시고 왔습니다.”
대답한 재희는 자리에 앉았다. 음 그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 영직이 접은 신문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재희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단 내가 강 피디에 대해 들은 얘기가 굉장히 많고, 개인적으로도 참 괜찮다 생각하던 친구인데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까 좋네.”
물론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들은 얘기가 많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재희는 조금 웃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윗사람들에게 들어갈 만한 자기 얘기 중 좋은 것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인 탓이었다.
영직의 웃는 얼굴은 교본처럼 보였으나, 그렇기에 마치 얇은 가면을 뒤집어씌운 듯 딱딱했다. 재희는 불현듯 그 가면 아래의 진짜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저도 선배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적당한 답례를 골라 건네자 영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 옛날 얘기지, 뭐. 나도 예전에 좀 있었는데, 지금 보면 상전벽해야. 그때는 이런 프로그램 될 거라고 생각 못 했으니까. 그것도 다 강 피디 작품이라며.”
“팀원들이 워낙 재능 있고 열정적입니다. 저 혼자서는 절대 못 하죠.”
재희의 대답에 영직의 입매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얇은 입술 끝이 그리는 그 선에서 재희는 뜻밖의 냉소를 보았다. 찰나였으나 숨길 의지조차 없는 그 표정은 서늘했다. 영직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에 남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겸손하네. 그런데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 본인 잘난 거 잘 알잖아.”
유들유들하게 농을 치는 듯한 말투였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재희는 거의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충민이 그 사람 보통내기가 아닌데, 하고 이야기하던 것이 뇌리를 스쳤다.
대답 대신 영직을 빤히 마주 보자 영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피디 저널리즘, 이거 아주 재밌는 말이야. 프로듀서가 저널리즘의 주체가 된다? 우리 때는 생각 못 하던 거지. 피디가 어떻게 언론인이야. 그냥 기획자지. 그런데 이후로 그런 게 가능해졌다고. 강재희 피디가 한마디 하면 젊은 사람들 다 넘어가잖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재희는 그의 말을 끊으려 했으나 영직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기존 언론 신뢰 안 하니까. 목숨 걸고 취재한다, 팩트만 방송한다, 권력에 타협 안 한다. 멋있지. 애들 표현으로 간지 난다고 하나? 연예인하고 똑같아. 강재희 말은 그 사람들한테 다 팩트잖아. 팬덤이란 게 그렇지 않나? 연예인이 뭐라고 한마디 하면 그대로 다 믿어 버린다고. 스타들이 왜 거만해지는지 알아? 그게 당연해지니까 그래.”
담백한 말투의 밑바닥에 깔린 조소는 명백했다. 재희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안으로 말아 쥐며 표정을 감췄다. 빤한 수 싸움. 그 잘난 강재희가 어떤 놈인지 보겠다는 게 틀림없었다.
재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저 연예인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영직이 웃는 소리를 냈다.
“본인은 아니라도 대중은 그렇게 생각하잖아. 아니면 요즘 잘 쓰는 말로 셀러브리티라고 할까? 뭐, 좋아. 그런 거 비난하려는 생각 아니니까. 파워가 있는 사람이 그거 잘 쓰는 거 굉장히 중요하지. 나도 예전에 그런 과정 다 겪었어. 그런데 그거 하다 보면 어떤 지점에서 회의감이 온다고. 이게 전부 무의미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야.”
재희는 순간 그의 마지막 말에서 뜻밖의 감정을 느꼈다. 착각인가 싶을 정도의 찰나에 지나친 그 감정은 분노라 해야 할지, 무기력이라고 해야 할지 명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게 뭔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영직이 말을 이었다.
“혹시 담배 피우나?”
“끊은 지 오래됐습니다.”
“아, 그래. 대단하네. 나도 요새 금연하려고 전자담배로 바꿨는데 쉽지가 않더라고.”
영직이 주머니에서 전자담배 스틱을 꺼내 물며 전원을 넣었다. 몇 모금 빨아들였다 숨을 뱉을 때마다 옅은 증기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잠시 말없이 끽연을 즐기던 영직이 스틱의 전원을 끄고 내려놓으며 팔짱을 끼었다.
“우리 좀 솔직해질까? 지금 한 지 십 년 넘었지? 방송할 때마다 사람들 난리 나고, 신문 방송 도배되고, 그러는 거 보면 좋을 거야. 그런데 돌아서면 이게 아닌데 싶지 않아? 대중들은 학습 능력 없잖아. 박정희, 전두환 시대 겪고도 아직 그 시절이 좋았다면서 독재자 원한다고. 전쟁 난 지가 반백년인데, 아직도 노인네들 귓속에 북한 빨갱이 소리만 속닥거리면 경기를 하면서 수구 정당 찍으러 달려가고. 안 그래?”
기묘하게도 그의 말에는 짙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재희는 그제야 조금 전 그에게서 느꼈던 그 복잡한 감정의 층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드문 경우는 아니었다. 자신의 젊음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의 시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특유의 염세주의. 영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강 피디같이 의식 있는 사람들이 백날 세상 바꾸려고 해 봐야 소용없어. 대중 수준이 겨우 그 정도야. 세상은 안 변해. 젊은 사람들한테 희망 있다고 생각해? 극우주의적 우경화가 전 세계적 대세야. 대중은 날이 갈수록 더 멍청해져. 미래가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굉장한 회의주의자시네요.”
재희의 말에 영직이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강 피디는 아니고?”
“일반 대중의 힘을 불신하면 저희 방송은 의미 없습니다.”
의외라는 듯 영직이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세웠다.
“그거 재밌네. 아주 시니컬한 친구라고 들었는데. 진짜 회의감 안 느낀다고 하면 그거 자기기만일 수 있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본인이 대중 마음대로 휘두르는 게 재밌는 거 아닌가. 어느 정도 선민의식 있는 거 사실이잖아. 우매한 대중들 계몽시키는 거 사명으로 삼고.”
어디까지나 적당히 받아넘기는 게 최선임을 알고는 있었으나, 속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재희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영직을 마주 보았다. 안경 너머의 차가운 눈이 시선을 맞받았다. 언뜻 이지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눈이었으나 거기에는 인간적인 감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선민의식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 안 합니다. 제가 일반 대중과 다르다는 생각도 안 하고요. 어디까지나 대중의 상식에서 방송 만들자는 게 저희 원칙입니다. 언론인이 선민의식 가지면 언론은 망가집니다. 우매한 대중을 가르친다는 태도 아주 시대착오적인 겁니다. 대한민국 일반 대중들이 정보에 대한 가치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투가 날카로워지자, 영직이 장난스러운 태도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