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아, 좋아. 젊은 사람이 희망적인 태도 갖는 거 아주 좋은 거야. 이런 말이 있어. 젊은 사람들은 심장이 왼쪽에서 뛰는데, 나이가 들수록 오른쪽으로 옮겨 간다고. 항상 심장이 왼쪽에서 뛸 순 없는 거야. 아직 젊어서 내 말 이해 못 하겠지만…….”
재희는 즉시 그의 말을 끊었다.
“프레이밍하지 마십시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언론인은 선민의식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일반 대중도 쉽게 저널리즘에 편입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수준 낮은 대중을 수준 높은 우리가 계몽한다, 이런 태도 뻔히 보이죠. 언론이 대중 우습게 보는지 아닌지 요즘은 대중들이 가장 잘 압니다.”
영직은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눈 앞머리를 몇 번 누르던 영직이 고개를 들었다. 약간 충혈된 듯 피로감 어린 그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무표정하게 재희를 응시했다.
“강재희, 이상주의자 같은 얘기는 집어치우자고. 내가 실무 왜 그만뒀을 거 같아? 이 일 오래 하는 사람 다 천 년 묵은 여우 될 수밖에 없어. 인간들 속이 빤하다고. 구역질나지. 내가 기사 몇 줄 쓰는 거 가지고 조종할 수 있는 멍청한 놈들이 서로 밥그릇 놓고 싸우는 거 보면 웃기잖아. 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신 같은 기분 들 때도 있지. 남자, 여자. 호남, 영남. 보수, 진보. 기사 몇 줄이면 편 가르는 거 쉽잖아.”
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었다.
영직 같은 타입은 언론계에 널리고 깔린 부류 중 하나였다. 펜 끝으로 세상을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믿음이 아집이라는 걸 모르는 부류의 인간들.
영직은 재희의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왜 왔다고 생각해? 나 도와주러 온 거야. 권력이 언론 다루려고 하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으라고. 똑똑하잖아. 그거 못 하겠어? 적당히 가려운 데 긁어 주면서 주는 거나 받아먹고, 원하는 대로 해 주라고. 그러다 보면 알게 된단 말이야. 사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저 새끼들이 움직이는구나. 내가 뭐라고 주둥이 놀리는지 눈치 보는구나. 위로 더 올라가고 싶은 생각 없어?”
부러뜨리는 것보다는 휘게 만드는 편이 쉽다는 것일까. 재희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런 것을 생각했다. 셔터를 내리고 싶지 않다,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으면 된다…… 당의정 같은 말이었다. 입 안에 넣었을 때는 달콤하지만, 겉면이 녹으면 쓴맛만 남아 버릴 게 분명한. 그럼에도 그 일시적인 달콤함에 속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터였다.
재희는 문득 팀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말에 타협하느니 차라리 프로그램이 없어지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정규직인 피디들은 프로그램을 옮기든 부서를 옮기든 하면 그만일 수 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인 작가들이나 일반 스탭들은 상황이 달랐다. 신념만으로 삶을 책임질 수는 없었다. 재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저희보고 그쪽 이용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속에서 끓는 감정을 누르며 애써 누그러진 척 되묻자 영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말이 통하네. 기는 척하라고. 시사 프로 아예 없앨 수는 없어. 그래도 공중파인데 구색은 갖춰야 할 거 아냐. 언론 탄압, 이런 얘기 나오는 거 솔직히 위에서 신경 안 쓴다면 거짓말이야. 그러니까 날 보낸 거고. 나 강압적으로 어떻게 하고, 이런 거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광고 완판 나는 시사 프로그램 포기할 이유가 뭐야?”
영직이 내려놓았던 전자담배 스틱을 다시 쥐었으나 전원을 넣지는 않았다. 영직은 손끝으로 스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고분고분한 척만 하면 된단 말이야. 강 피디가 그게 안 되니까 위에서 협박하는 거 모르겠어? 윗대가리들이야 당장 자기 기분 거슬리니 없애라고 난리 치지만, 우리 브랜드 이미지에 크게 일조하는 거 라고. 정권 영원하지 않아. 어차피 지금은 청와대랑 엄대진 딜 끝났어. 아니라 뭐가 와도 못 뒤집는 게임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한 3, 4년. 레임덕 오기 전까지만 비위 맞춰 주자고. 그게 뭐 어려워?”
권력과 언론의 제로섬 게임이라는 건가, 속으로 생각한 재희는 침묵을 지켰다. 서로가 서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게임이 끝났을 때 그 자리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게 분명했다.
고통 받고 지워지는 건 결국 가장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삶이었다. 재희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원한 적 없었다. 영직이 스틱 끝을 탁자 위에 천천히 톡톡 두드리며 입매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강재희 탐내는 사람들 많아. 정치하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고, 이대로 한 십 년 하면 국장 자리도 그냥 맡아 놓은 거고. 계속 눌러앉아 있으면 사장은 못 되겠어? 평피디로 평생 할 거야? 꿈 크게 가져. 거기 만족하기엔 강 피디 그릇이 너무 크잖아. 강 피디처럼 머리 좋고 인물 좋고 이미지 좋고, 그렇게 다 갖춘 캐릭터 드물다고. 겨우 시사 프로 하나에 연연하는 거 진짜 바보 같은 거야. 돈, 권력, 여자, 세상에 좋은 거 많잖아. 원하면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래. 즐기면서 살자고. 내 말 알겠어?”
돈, 권력, 여자. 그 중 어떤 것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그들의 자만심이 가시처럼 속을 긁었다. 입술 안쪽을 이 끝으로 누르며 재희는 애써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재희를 빤히 보던 영직이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대답만 고분고분하게 하는 거 같지만, 뭐 좋아. 신념 중요하지. 그런데 기본적으로 이거 직업이라는 사실 잊지 마. 본인 신념 지키자고 팀원들 밥그릇 엎을 수 있나? 그게 강 피디가 생각하는 대중을 위한 저널리즘이야? 아닐 거 아냐.”
순간 속을 꿰뚫린 듯한 감각이 지났다. 그건 재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 방심하는 사이 급소를 찔러 놓고, 영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스틱을 쥔 손으로 시선을 흘끗 내리며 툭 뱉었다.
“와신상담이란 말이 있잖아. 기다리면서 지키는 것도 좋은 전략일 수 있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재희는 최대한 감정을 누르며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영직이 좋아, 하며 말을 돌렸다.
“위에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 미방분 아이템하고 관련 있다고 들었는데, 기획안 제출할 수 있나? 내가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은데.”
어르고 달래다 뺨치는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실무에서 떠나 관리직으로 간 지 오래인데도 말이 나오지 않았던 건 처세가 뛰어난 사람이라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재희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방분은 이미 백선경 국장님이 전부 승인하신 건입니다. 기획은 담당 피디 고유 권한이고, 승인된 기획안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재열람이나 수정 권한 없는 게 원칙입니다.”
안경을 다시 집어 쓴 영직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그러나 영직은 그 이상 요구하는 대신 한걸음 물러났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좋아, 일단 위에 유지안 제시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조만간 술 한 잔 하면서 남은 얘기나 마저 하자고. 바쁠 텐데 내려가 봐.”
“다음에 뵙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인 재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가던 재희는 잠시 멈춰 난간을 움켜쥐었다. 손에 뭐라도 들고 있었다면 당장 집어 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숨을 고른 재희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기 무섭게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초조한 표정들이었다. 수십 개의 눈동자에 심장이 조이는 듯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나침반을 잃어버린 채 낯선 곳을 헤매는 사람처럼 문득 눈앞이 막막해졌다.
자리에 앉아 있던 정언이 물었다.
“뭐래요?”
“이따가 얘기하자.”
내뱉으며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재희는 테이블 앞에 앉아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대었다. 개새끼들, 소리 없이 중얼거린 욕으로는 속이 풀리지 않았다. 영직의 입에서 나온 수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키는 건 언제나 바치는 것보다 어렵기 마련이었다. 무릎을 꿇고 개가 되기를 선택하면 모든 게 쉬웠다. 그러나 쉬운 길을 택할 수 없는 건, 결국 이 길이 인간적이라고 믿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희생을 통해 신념을 지키려는 행동 역시 인간적인 것일까.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에 재희는 눈을 감았다. 내려앉는 침묵의 무게가 머리 위를 짓눌렀다.
정언은 차 안에 앉아 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이진 교수의 상담 센터에서 희경을 만나기로 했는데, 윤이 놓고 온 게 있다며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한 까닭이었다. 정언은 시트에 등을 묻은 채 어제 일을 떠올렸다.
새 CP로 발령받은 영직을 만나고 온 재희는 혼자 뭘 생각하는지 회의실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유를 알 리 없는 팀원들은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더니 나중에 얘기하자며 나간 재희는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하고 중얼거린 정언은 핸드폰의 연락처 화면을 켜서 하릴없이 스크롤을 하다 손을 멈췄다. 최영직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십 년도 전부터 저장돼 있던 번호였기에 아직도 이 번호를 쓰는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자신이 방송국에 입사한 걸 알았을 텐데도 입사한 뒤로는 영직과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굳이 먼저 연락할 성격도 아니었던 데다, 영직의 입장에서도 죽은 선배의 딸에게 공연히 특별대우 같은 걸 하고 싶지는 않은가 보다 하고 막연히 짐작했던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혹시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정언은 핸드폰으로 포털 사이트의 뉴스 탭에서 ‘최영직’이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오래된 순으로 기사를 정렬하며 내리던 정언의 눈이 문득 한곳에서 멈췄다.
‘YBS 서현국·최영직 기자 올해의 언론인상 수상’…… 이십 년도 더 된 기사의 제목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이름에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때마침 윤이 조수석 문을 두드렸다. 퍼뜩 현실로 돌아온 정언은 서둘러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도어록을 열었다. 윤이 뒷좌석에 커다란 쇼핑백을 밀어 넣고는 조수석에 타 문을 닫았다. 저게 뭐냐고 묻기도 전 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영직 CP님 있잖아요.”
윤의 입에서 영직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잠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윤이 안전벨트를 당겨 채웠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