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기제국 친구 통해서 들었는데, 걔네 팀장 박지영 피디님이 그분하고 몇 년 있었대요. 보기보다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목소리 높이거나 하는 일 잘 없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는 스타일인데 속에 구렁이 천 마리는 들어앉은 사람이라고 조심해야 될 거라고 그랬다는데요.”
“그래?”
정언은 기억을 더듬었다. 영직에 대한 이미지는 아주 어릴 적부터의 기억 속에서 단편적으로 떠도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윤이 말하는 영직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영직이 참 괜찮은데, 하고 어머니한테 지나치듯 말하던 장면이 뇌리를 지났다. 아버지가 사람을 잘못 봤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언의 속을 알 리 없는 윤이 말을 이었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얘기하는데 돌아서면 얼굴 싹 바꾸는 타입이라고, 한 번 눈 밖에 나면 피곤할 거라고 했다던데요. 혹시 선배는 전혀 모르는 분이에요?”
“개인적으로 좀 알긴 하는데, 오래전 일이라 뭐…….”
“개인적으로요?”
말을 얼버무리며 시동을 걸자 윤이 되물었다. 영직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자면 필연적으로 아버지 얘기를 꺼내야만 했다. 그러나 윤에게 구구절절 그런 내용을 읊고 싶지는 않았다. 정언은 대답 대신 백미러에 비치는 뒷좌석의 쇼핑백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저건 뭐야?”
쇼핑백의 로고가 대형 장난감 전문 쇼핑몰 로고라는 것을 알아차린 건 직후였다. 쇼핑백 입구 위로 비닐에 싸인 커다란 인형 꼬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고래 꼬리같이 생겼네,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윤이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애들 주려고 산 거예요.”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던 정언은 생각도 못 한 대답에 다시 한 번 백미러를 흘끔 보았다. 정언의 표정이 뭔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윤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변명하듯 말했다.
“장 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일요일에 마트 갔었거든요. 매장 앞 지나가는데 생각이 나서요. 지난번에 리아한테 고래 가져간다고 약속했는데 잊어버리면 속상해할 것 같아서…….”
정언은 그제야 지난번 희경의 집에 갔을 때의 일을 상기했다. 헤어질 때 윤이 리아에게 고래 이야기를 했던 것이 퍼뜩 지나쳤다.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여태까지 기억하고 있었나 싶어 조금 놀란 기분이 되었다.
“요샌 애들 인형 같은 것도 비싸던데.”
무심히 중얼거린 말에 윤이 웃었다.
“비싸 봐야 술 한 번 안 마시면 되는데요, 뭐. 원래 안 마시고 요샌 누구 만날 시간도 없어서 괜찮아요.”
“사람 만날 시간 없는 거 내 탓이라고 돌려 말하는 건 아니지?”
“전 사무실에서 선배 만나는 게 더 좋은데요.”
농담처럼 되묻자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통에 아 또 괜히 말했네, 하고 얼굴에 써 붙인 표정을 하자 윤이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게 뻔히 보여,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언은 잠시 갈등했다. 이런 순간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윤에게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대응하는 걸 포기한 정언은 손을 뻗어 라디오를 켰다.
자동으로 맞춰진 채널에서는 가수도, 제목도 모르는 최신 가요가 흘러나왔다. 아마 여자 아이돌의 노래인 듯했다. 윤 쪽으로 슬쩍 시선을 주자 윤이 무릎 위에 놓인 손끝을 까딱이며 박자를 맞추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하는 걸그룹인가, 하고 생각한 정언은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남자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싶으면서도 묘하게 신경이 당겨졌다.
“이 노래 좋아해?”
무심코 던진 물음에 윤이 멈칫하더니 곧 아뇨, 하고 대답했다. 얼굴에는 아직 웃음기가 남은 채였다. 잠깐 정언을 빤히 보던 윤이 되물었다.
“왜요?”
“아니, 그냥.”
“저 아이돌 관심 없어요.”
윤이 웃었다. 이거 혹시 초능력인가 하는 되도 않은 생각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어떻게 알았어,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정언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간신히 그 말을 입 안에서 붙드는 데 성공했다.
윤이 가끔 이렇게 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굴 때면, 정언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머릿속이 하얘지곤 했다. 옆얼굴을 보는 시선이 느껴져 귀 끝이 화끈거렸다. 윤이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한동안 머물러 있던 시선을 거둔 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물었다.
“이 노래 요새 자주 나오는데, 못 들어보셨어요?”
“원래 음악 잘 안 들어서.”
애써 최대한 태연한 척 대답했으나 속으로는 핸들에 머리를 박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남이야 아이돌을 좋아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말이 튀어나온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입을 다문 정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운전을 했다. 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때마침 눈에 익은 차가 뒤따라 들어왔다. 규형의 차였다. 차 안에서 정언과 윤을 알아본 희경이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며 차를 세웠다.
얼른 달려간 윤이 먼저 뒷좌석 문을 열고 카시트에서 두 아이를 하나씩 안아 내렸다.
“얼굴이 안 좋으신데요. 몸은 괜찮으세요?”
정언이 말을 건네자 희경이 애써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억지로라도 잘 먹으려고 하고 있어요. 피디님도 지난번에 뵈었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지신 거 같아요. 안 그래도 너무 마르셨는데…….”
“저희야 뭐 워낙 바빠서 그렇지 괜찮아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리아가 희경의 옷자락을 붙들고 당겼다. 수아는 희경의 한쪽 손을 잡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로로 멘 빨간색의 동그란 에나멜 백이 눈에 들어왔다.
줄에 때가 타 지저분했으나, 수아는 가방끈을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아마 규형이 사 주었다는 그 가방인 듯했다. 정언의 차에서 가져온 쇼핑백을 꺼내 온 윤이 몸을 숙여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아, 삼촌 누군지 알아?”
리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씩 웃은 윤이 쇼핑백 안에서 고래 인형을 꺼냈다. 리아가 한 품에 가득 안고도 남을 정도로 큰 인형이었다.
“리아 못 본 사이에 많이 컸네. 저번에 삼촌이 고래 가져온다고 했지? 이거 리아 선물.”
인형을 보자마자 리아의 입이 벌어졌다. 화들짝 놀란 희경은 팔을 뻗어 인형을 받으려는 리아를 잡아당기며 손을 내저었다.
“피디님, 아니에요. 뭘 드려도 제가 드려야지 왜…… 이런 거 주시면 안 돼요. 애들 버릇 나빠져요.”
“제가 리아한테 약속한 건데요. 약속한 거 안 지키면 애들이 어른을 어떻게 믿겠어요.”
윤은 리아에게 손짓을 했다. 쭈뼛거리는 리아에게 인형을 안겨 주자 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희경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해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맸다.
“아휴, 이런 거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가격 알려 주시면 제가 드릴게요, 피디님. 저 이거 그냥 못 받아요.”
“진짜 그냥 제 조카 같아서 주는 거예요.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시면 제가 더 서운한데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윤은 무릎을 접어 앉아 고개를 숙인 수아와 눈을 맞췄다. 윤을 흘끔 본 수아가 희경의 뒤로 몸을 반쯤 숨겼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수아를 물끄러미 보던 윤이 짐짓 서운한 표정을 했다.
“수아는 삼촌하고 인사 안 할 거야?
수아가 빨개진 얼굴로 안녕하세요, 하고 웅얼거리더니 고개를 더 집어넣었다. 희경의 뒤에서 한쪽 눈만 내놓은 수아가 흘끔거리며 윤과 정언의 눈치를 살폈다.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문득 CCTV 속 수아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부근이 선뜩해졌다.
윤이 수아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삼촌이 처음에 수아 만났을 때 수아가 너무너무 예쁘게 웃어 줬는데, 삼촌한테 한 번만 더 웃는 거 보여 주면 안 돼?”
머뭇거리던 수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희경이 아휴 참, 하고 속상한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기분 아냐? 알았어, 그러면 수아가 그럴 기분 되면 웃는 거 보여 줘. 약속.”
윤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희경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려 있던 수아가 눈을 굴렸다. 희경이 슬쩍 수아의 등을 두드리자 수아가 멈칫멈칫 손을 뻗어 윤의 손가락을 쥐었다가 놓았다. 씩 웃은 윤이 몸을 일으키며 곁에 놓아두었던 쇼핑백 안을 뒤적였다.
“삼촌이 수아 선물도 가져왔는데, 잠깐만.”
윤이 안에서 꺼낸 것은 요즘 유행하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인형이었다.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은 인형 상자를 흔들어 보이며 수아의 표정을 살폈다.
“수아 이거 좋아해?”
수아가 대답 대신 눈만 깜빡였다. 윤이 손짓으로 수아를 부르자 수아가 희경의 눈치를 보았다. 윤이 희경 대신 괜찮아, 하며 다시 한 번 손짓하자 수아가 주춤거리며 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윤이 내민 인형 상자를 두 손으로 쥐고 들여다보던 수아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맙습니다,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 동안이나 포장 위를 만지작거리던 수아가 품에 상자를 꼭 안았다. 윤은 그러는 동안 내내 수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맘에 들어?”
윤이 묻는 말에 수아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한 표정을 한 윤이 팔을 뻗어 수아를 번쩍 안아들었다.
“오케이, 그러면 이제 선생님 보러 가자.”
한 팔로 수아를 안은 윤이 정언에게 손가락으로 센터 안을 가리켜 보였다. 먼저 그리로 걸어가는 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희경이 민망하다는 얼굴로 정언에게 죄송합니다, 하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정언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김 피디가 수아하고 리아 예쁘다고 그런 거라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귀찮으실 텐데 괜히…….”
“진짜 괜찮아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들어가시죠.”
희경이 고래 인형을 꼭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적대는 리아의 손을 잡았다. 정언이 희경과 함께 센터 상담실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성이진 교수가 인사를 건넸다. 수아는 이미 검사실 안에 앉아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