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정언은 이진이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교수님, 매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저기 있는 애가 수아고, 이 친구가 리아 맞죠? 여기는 어머님이시고?”
이진이 희경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희경이 두 손을 모으고는 고개를 숙였다.
“네, 이희경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이진이에요. 오늘은 일단 두 친구 다 검사 진행할 거고요, 우리 선생님들이 검사 도와줄 거니까 일단 리아도 검사실로 가죠.”
상담실과 연결된 검사실 문을 열자 앉아 있던 수아가 시선을 돌렸다. 따라 들어간 상담 교사가 리아를 수아의 맞은편에 앉히고는 문을 닫았다. 교사가 검사지를 나눠 주고 뭐라고 말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진은 희경에게 먼저 자리를 권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피디님들도 좀 앉으시죠. 차 한 잔 하시겠어요? 주스 드릴까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희경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진이 상담실 한쪽의 작은 냉장고에서 주스 병 몇 개를 꺼내 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진은 마시던 것인 듯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서정언 피디님한테 대강 이야기는 들었고요, 어머니한테 미리 메일로 설문지 발송해 드린 것도 받아 봤어요. 일단 문제는 남편분이 돌아가신 걸 애들이 아직 모르고 있다는 거죠? 수아가 이상 행동을 보이는 게 혹시 그거하고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지 궁금하신 거고요.”
희경이 주스 병을 감싸 쥔 채 대답했다. 그러나 열 생각조차 없는 듯, 마른 손가락이 차가운 병을 감싼 채 초조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서 오래전 엄마의 모습을 겹쳐 보던 정언은 퍼뜩 스스로 놀라 움찔했다. 곁에 앉아 있던 윤이 이쪽을 흘끔 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진이 말을 이었다.
“남편분이 돌아가신 지가 벌써 몇 달 됐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애들한테 얘기를 못 하신 이유가 뭐죠?”
“애들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충격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싶었어요.”
“애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다, 어머니는 이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희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안으로 움츠러든 어깨는 그렇지 않아도 작은 체구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진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면 언제쯤 얘기하려고 하셨어요?”
“저, 애들이 좀 이해할 나이가 되면…….”
“그게 언제일까요?”
희경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일 거라고 정언은 생각했다. 만일 평생 동안 그 사실을 숨길 수 있다면, 누구라도 굳이 말하기를 선택하지 않을 터였다.
금테 안경 너머에서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진은 손끝으로 탁자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바닥에 못 박고 있던 희경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진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마음이신지 저도 충분히 이해해요. 그런 거 애들한테 쉽게 말할 수 있는 분들 없어요.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니까, 내가 잘못한 건가, 내가 여기서 회피하려고 하나, 이런 생각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아주 당연하고 인간적인 선택이에요.”
희경이 하얗게 마른 아랫입술을 이로 지그시 눌렀다. 정언은 자기 앞에 놓인 주스 병의 뚜껑을 따 희경의 앞에 놓아 주었다. 희경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리며 주스를 겨우 한 모금 마셨다.
이진이 몸을 앞으로 조금 숙였다.
“그런데 어머니, 어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실수가 이런 거예요. 애들이라고 그런 걸 모르는 게 아니거든요. 수아 정도면 또래보다 발달도 빠르고 아주 똑똑한 친구인데, 이렇게 우울증이 올 정도로, 그런 게 있다는 건 본인도 뭔가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봐야 돼요. 그게 뭔지 설명 못 할 수는 있어요. 우리 수아가 죽는다는 거, 다시는 누구를 만나지 못한다는 거, 이런 거에 대한 개념이 아직 확실히 없을 수 있으니까요.”
이진은 안쪽 상담실로 시선을 돌렸다. 매직미러를 통해 보이는 상담실 안에서 수아가 자리에 앉아 색연필로 무언가를 그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희경이 잠시 거기에 눈을 못 박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진은 곧 다시 희경에게 주의를 돌렸다.
“제가 얘기를 듣고 가장 문제가 된다고 본 부분은 사실 이 부분이에요. 어린이집에서 수아가 일부러 숨을 안 쉬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연락이 갔다.”
그 일을 생각만 해도 괴로운 듯 희경이 핏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이진이 재차 물었다.
“자기만 없으면 엄마랑 리아가 행복할 거라고 그랬다는데, 수아가 왜 그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세요? 혹시 어머니가 리아한테 신경을 더 많이 쓰셨나요?”
희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솔직히 리아한테 더 신경을 쓰고 그런 건 없었거든요. 차라리 수아한테 신경을 쓰면 더 썼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셨어요? 리아가 더 어리고 손이 많이 가잖아요.”
“리아는 아직 어리고 하니까, 수아는 혹시라도 제가 말 잘못하면 아빠에 대해서 눈치를 챌까 봐 조심하게 되는 게 있었어요.”
희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희경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이진이 희경을 마주 보았다.
“엄마 태도가 자기하고 있을 때 다르다는 걸 수아가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그 말에 희경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희경이 두 손을 모아 입가에 대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가느다란 핏줄이 튀어나온 손등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어머니,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민해요. 어른들은 애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애들도 똑같아요. 엄마나 아빠는 자기 마음 모른다고 생각해요. 어른의 눈으로 애들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잖아요. 애들도 자기 눈으로 어른들을 보면 힘든 거죠.”
희경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눈물이 고였다. 이진이 탁자 위의 티슈를 희경 앞으로 밀어 놓았다.
“저는 어머님이 마음의 준비가 되시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얘기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아가 지금 상황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거든요. 수아는 아빠의 부재에 대해 이게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요. 엄마가 슬퍼하는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님이 괴로운 만큼 아이도 아프고 힘들다는 거 아셔야 돼요. 어머님이 극복을 하시고 아이를 안아 주셔야 아이도 어머님을 안아 줄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겨우 티슈 두어 장을 뽑은 희경이 눈가를 눌렀다. 이진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소리 없이 우는 희경을 한동안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의 상담실에서 문이 열리며 상담 교사가 이진을 불렀다.
“원장님, 수아 검사는 끝났는데 먼저 내보내도 괜찮을까요?”
“그래요.”
이진이 정언과 윤을 돌아보았다.
“피디님, 어머니랑 얘기하는 동안 수아 데리고 산책이라도 좀 갔다 오시겠어요? 뒤에 공원도 있고 놀이터도 있거든요. 리아는 저희 선생님이 더 봐줄 거니까요.”
희경이 우는 걸 수아가 보면 아무래도 좋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한 듯했다. 윤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사실 안으로 들어간 윤은 수아를 안아 들며 물었다.
“수아, 삼촌하고 밖에 잠깐 나갈까?”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수아가 희경을 보지 못하게 자기 품으로 작은 머리를 끌어당겨 안고는 서둘러 상담실을 나섰다. 정언이 그 뒤를 따라 나오며 상담실 문을 닫았다.
윤의 품에 안긴 수아는 가방끈을 꼭 쥔 채 말이 없었다. 센터를 나와 근처 공원으로 통하는 산책로에 들어서자, 수아가 내려 달라는 표시를 했다. 걷고 싶은 모양이었다. 수아를 내려 준 윤은 몸을 숙여 수아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고는 물었다.
“수아는 그 가방이 제일 좋아?”
그러자 수아가 고개를 숙여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메고 다녔는지, 겉면에 인쇄된 그림이 거의 다 지워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까지 거의 말이 없던 수아가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네. 아빠가 줬어요. 빨간색 좋아한다고. 리아가 갖고 싶어 해서 주려고 했는데…… 아빠가 이거는 언니 거니까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이거는 수아 거라고 그랬어요.”
“착하네. 수아가 좋아하는 건데도 리아 주려고 했어?”
한 걸음 뒤에서 걷던 정언이 묻자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없이 그림이 지워진 가방 위를 만지작거리던 윤이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여기 있던 그림 다 지워졌는데 괜찮아? 다음에 삼촌이 더 예쁜 걸로 사 줄까?”
그 말에 수아가 즉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가방끈을 꼭 움켜쥐는 조그만 손에 정언은 시선을 피했다. 이런 건 어쩐지 쉽게 면역이 되지 않았다. 수아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준 윤이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정언은 그 뒷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아버지와 집 근처에서 꼭 저렇게 걸어 다니던 언젠가의 저녁이 뇌리를 지났다.
생각 없이 넘기던 책 사이에서 떨어진 오래된 사진처럼, 그 장면이 따스하고 스산한 감각으로 스몄다. 어쩐지 낯선 기분이었다. 정언은 저도 모르게 가슴 부근을 눌러 보았다.
그때 윤이 정언을 돌아보았다. 무심코 시선이 마주치자 윤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미소가 번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떨어지는 햇살 사이로 눈을 깜빡인 순간 그 얼굴은 마치 폴라로이드처럼 머릿속에 남았다.
정언은 걸음을 멈췄다.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 더 각인되기 쉬운 건 왜일까. 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든 장면들이 늘 여상한 것임을 깨달은 건 직후였다.
가장 평범한 순간, 가장 일상적인 말들. ‘서정언 피디’의 삶에 허락됐다고 생각한 적 없는 모든 순간을 윤이 너무나 쉽게 자신의 안으로 가져온다는 걸 자각하자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고백의 단어들을 쏟아 내던 윤을 보내고 텅 빈 새집에 혼자 남겨졌을 때, 정언은 자신이 느꼈던 그 낯선 감정의 정체를 불현듯 알아차렸다.
그러니 윤을 곁에 둘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결국 그 때문일까. 윤의 말대로 자신은 항상 가장 나쁜 것부터 생각하기에, 언젠가 생길지 아닐지도 모르는 그 빈자리가 두려워서.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런 정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윤은 수아의 손을 잡고 걷다 멈춰 섰다. 근처의 매점 앞에서 돌아가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 때문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