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는 날씨였다. 수아가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린 듯, 윤이 수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수아, 아이스크림 먹을래? 먹고 싶어? 무슨 맛 좋아해?”
잠시 고민하던 수아가 윤에게 말했다.
“딸기.”
“딸기? 금방 갔다 올게. 여기 잠깐만 있어.”
윤이 뛰어간 사이 정언은 수아를 데리고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제법 걸은 탓인지 뽀얀 이마에 땀이 송골거렸다. 정언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수아의 이마와 뺨을 닦아 주었다.
그사이 양손에 아이스크림 세 개를 사 들고 돌아온 윤이 수아에게 분홍색의 딸기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정언에게는 바닐라 맛을 준 윤은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들고 곁에 풀썩 소리가 나게 앉았다.
아이스크림을 몇 입 먹던 수아가 근처의 그네를 가리켰다. 저거 타고 올래요, 하는 말에 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아는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채 달려가 빈 그네에 앉았다.
수아가 조그만 운동화를 신은 발을 모래 바닥에 구르며 앞뒤로 흔들거렸다. 윤은 거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금방 여름이겠네요.”
“그러네.”
무심히 대답하며 베어 문 아이스크림은 입 안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들었다. 흔한 바닐라 맛의 입자가 혀끝에 달게 남았다가 곧 사라졌다. 잠시 말이 없던 정언은 앞을 보다 물었다.
“원래 그렇게 애들 좋아해?”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윤이 웃는 소리를 냈다.
“그렇지는 않은데, 그냥…… 모르겠어요. 이런 애들 많이 만나 봤으면 좀 무뎌졌을 수도 있는데, 여기 와서 처음 만난 게 수아하고 리아라 그럴 수도 있고요.”
잠깐 사이를 둔 윤이 말을 이었다.
“교양국 있을 때는 이런 사람들 만날 일 없었으니까요. 여기 와서 뭐라고 해야 되나, 제가 세상을 보는 방식 같은 게 변했다는 생각 자주 해요. 예전에는 뉴스 볼 때도 그냥 집에 혼자 있으면 외로우니까 습관적으로 틀어 놨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내용이 뭔지 자꾸 집중해서 듣게 되고 그러더라고요.”
정언은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먹다 말고 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 피디가 외로운 거 느낀다고?”
“저도 사람인데 당연하죠.”
정언의 물음에 윤이 쿡쿡거리며 대답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윤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윤 같은 사람도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잠시 말이 없는 정언에게 슬쩍 시선을 주던 윤이 물었다.
“왜 제가 그런 거 못 느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정언은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색한 정적을 넘기기 위해 무심코 베어 문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차게 녹았다. 굳이 대답을 기다린 질문은 아니었던 듯, 윤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혼자 산 지 꽤 되긴 했는데 익숙해지진 않더라고요. 퇴근하고 현관문 열었을 때 집은 깜깜하고, 아무도 없고, 조용하고. 그럴 때 기분 있잖아요. 그게 항상 쉽게 딱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선배 보면 그런 게 너무 당연해 보여서 이상했어요.”
독백처럼 떨어지는 단어들을 듣고 있던 정언은 마지막 문장에 멈칫했다. 수아에게 눈을 둔 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전 그런 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당연하다는 게 괜찮다는 건 아니잖아요.”
담백한 말투였으나 문득 종이에 벤 상처처럼 선뜩한 감각이 지났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은 불편했다.
정언은 자신의 그 불편함이 무엇 때문인지 곧 깨달았다. 자신조차도 인식한 적 없는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윤의 시선은 늘 명확했다. 마치 강제로 거울 앞에 세워진 사람 같은 기분이 되는 건 그 때문이었다.
윤이 웃었다.
“그러니까 자꾸 선배 옆에 있고 싶은가 봐요.”
바닥을 보고 있던 정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상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는 손안에서 그사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의 결을 닮아 있었다.
당황한 정언의 표정을 짐짓 모르는 체하며 마지막 남은 콘을 입 안에 밀어 넣은 윤이 손을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손으로 그네 줄을 움켜쥔 수아가 허공에 뜬 발을 앞뒤로 흔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아, 삼촌이 그네 밀어 줄까?”
윤이 크게 외치자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로 달려간 윤이 수아가 탄 그네를 뒤에서 천천히 밀었다. 그네는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햇살 사이를 갈랐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정언은 수아의 동그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내내 무채색의 캔버스 같던 그 얼굴에 처음으로 색이 돌아온 듯했다. 윤과 있을 때라면, 누구든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어쩌면 자신도…….
무심코 손끝으로 만진 얼굴은 서늘했다. 정언은 바닥으로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 그림자의 표정이 어떨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덥지 않은데도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정언은 서둘러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며 걷어 올렸다. 얼굴만큼 창백한 팔이 드러났다. 손목에 끼고 있던 머리끈으로 짧은 단발을 당겨 묶자, 미처 묶이지 않은 머리칼이 흘러내려 뺨 위로 스쳤다. 차지 않은 바람이 불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의 입자 사이로 윤이 웃었다. 찰나에 세상이 잠시 정지했다. 정언은 눈을 감았다. 우연히 셔터를 누른 순간처럼, 옅은 어둠 속으로 그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가끔 제가 선배 선 안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윤이 어느새 자신의 선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정언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밀어낼 수 없고 돌려보낼 수도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은, 언젠가부터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생각의 끝이 머무른 지점에서 가느다란 바늘 같은 것이 마음을 뚫고 지났다. 또렷한 감각이었다.
다치게 하기 싫어 먼저 밀어내고, 잃을 것이 두려워 곁에 두지 않으려 하고, 끝을 생각하기에 시작조차 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들. 정언은 그런 비논리성에 익숙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정언에게 불편하고 이상했다.
그 모든 낯선 것들의 귀결점은 단 하나였다.
불러들인 적 없고 인지한 적 없이 스며든 그 존재를 생각하면, 정언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잃는 듯한 기분이 되곤 했다. 때로 심장이 빨라지고 열이 오를 때면 알려진 적 없는 병을 앓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판정 불가능한 병명.
그러나 실은 단 하나의 단어로 이 증상을 설명하는 건 쉬웠다.
좋아한다, 고.
그 말을 떠올린 순간 정언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모든 생각을 문장으로 읽힌 것 같아, 제풀에 놀란 정언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진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 어머니 상담 끝났어요
몸을 일으킨 정언은 윤과 수아를 향해 걸어갔다. 때마침 크게 떠올랐던 수아가 부는 바람에 가느다란 머리칼을 휘날리며 윤에게 되돌아왔다. 정언을 본 윤이 줄을 잡아 그네를 멈춰 세웠다. 정언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교수님이 상담 끝났다고 하시네.”
“아, 그래요? 수아, 이제 엄마 보러 가자.”
윤이 수아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네를 타는 사이 지친 건지, 수아가 윤의 어깨에 조그만 머리통을 올려놓았다. 햇살을 받은 얼굴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생기가 돌아 보여 안심이 되었다.
덜 먹은 아이스크림콘을 꼭 움켜쥔 채 수아가 눈을 감았다. 공원에서 다시 센터로 돌아가는 사이 잠이 든 수아는 윤의 품에 파묻혔다.
센터로 돌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희경이 수아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피디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윤이 입가에 살짝 손가락을 댔다. 고개를 내밀어 잠든 수아를 확인한 이진이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피곤했나 보네요. 다음 주 금요일에 다시 뵙기로 했어요. 어머니, 그 전에라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자세한 검사 결과도 그날 오시면 얘기하죠.”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희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이진이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상담실을 나서자 희경이 먼저 후다닥 주차장으로 뛰어가 차에 시동을 걸고 리아를 뒷좌석에 앉혔다.
희경이 윤의 품에 안겨 있는 수아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자, 잠이 깬 수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희경은 수아를 내려놓고 가방에서 꺼낸 물티슈로 얼굴과 손을 닦아 주었다.
“수아야, 이제 엄마랑 리아랑 같이 집에 갈까? 집에 가서 수아 좋아하는 돈까스 먹자.”
그러자 수아가 고개를 돌려 윤을 쳐다보았다. 동그란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수아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희경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아를 끌어안았으나 수아는 울음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릎을 접어 수아와 눈높이를 맞춘 윤이 희경에게 받아 든 물티슈로 그새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 주며 물었다.
“삼촌 가는 거 싫어?”
수아가 울면서 대답 대신 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기겁을 한 희경이 쩔쩔매며 수아를 떼어 놓고는 윤에게 변명을 했다.
“어머, 얘가 왜 이럴까. 죄송해요, 피디님.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괜찮아요.”
웃으며 고개를 까딱인 윤이 수아를 달랬다.
“삼촌이 회사 일이 무지무지 많아서 오늘은 그만 가야 돼. 수아하고 더 못 놀아 줘서 미안해. 다음 주에 여기 올 때 삼촌하고 또 같이 놀자. 아이스크림도 먹고. 그럼 괜찮지?”
윤이 훌쩍이는 수아에게 몇 번이고 괜찮냐고 묻자 수아가 겨우 네, 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다시 한 번 눈물을 닦아 준 윤은 직접 수아를 데리고 가 희경의 차 뒷좌석 카시트에 앉혔다.
“엄마 말씀 잘 듣고, 리아하고 사이좋게 놀고. 다음 주에 만나, 알았지?”
안전벨트까지 채워 주고는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하자 수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을 닫자 희경이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연신 죄송하다며 윤에게 사과했다. 아니라고 손을 내저은 윤은 희경을 보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마들은 애들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대단하다니까요.”
“김 피디처럼 보겠지. 애하고 잘 놀아 주던데.”
정언의 대답에 윤이 멋쩍게 웃었다. 차 문을 연 정언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얼른 조수석에 앉아 문을 닫는 윤 쪽을 보자, 흰 셔츠 위에 점점이 묻은 분홍색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은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조금 기울이며 윤의 셔츠 칼라 부근을 만졌다.
“여기 뭐 묻었네.”
어, 하고 윤이 고개를 숙여 셔츠 칼라를 내려다보더니 자기 손으로 그 위를 쥐었다. 윤의 손이 정언의 손을 거의 감싸듯 잡아 왔다. 언제나처럼 따뜻한 손이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나, 스친 체온에 정언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움찔하며 손을 떼자 윤 역시 순간 미묘해진 분위기를 의식한 듯 어색하게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