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아, 이거…… 아까 수아가 아이스크림 덜 먹었던데 거기서 묻은 건가 봐요.”
정언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글로브 박스 안에 든 물티슈를 꺼냈다. 윤에게 물티슈를 건네자 윤이 감사합니다, 하고는 서둘러 옷에 묻은 얼룩을 닦았다.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왜 의식할까, 하며 속으로 자책을 한 정언은 이마 부근을 긁적였다.
차 안에 흐르는 정적이 부담스러워 라디오라도 틀까 생각하던 찰나, 때맞춰 정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하며 재빨리 핸드폰을 집어 든 정언은 미간을 좁혔다. 액정에 뜬 글자가 선명했다. ‘고원 이종규’.
“고원종합기술공사 이종규 팀장?”
중얼거린 말에 윤이 손을 멈추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 왔어요?”
정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통화를 연결했다.
“네, 서정언 피디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너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저 고원 이종규 팀장입니다. 제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아무래도 말씀드려야 될 게 있어서…….』
“제가 지금 외부에 있는데요, 혹시 만나서 얘기하실 수 있을까요?”
『아뇨, 아뇨. 저, 전화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가 몹시 떨고 있다는 건 전화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언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어 녹음이 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즉시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펼친 정언은 볼펜을 빼 들었다.
“네, 말씀하시겠어요?”
『저기, 피디님. 제가 여기 온 게 일 년 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감리에서 문제 있었다, 이거 지적하시는 거라면 저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청에서 말 나오는 부분, 그것까지는 전부 제 관할이 아닙니다.』
어딘가에 숨어서 전화를 하고 있는 건지,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에서 묘하게 울리는 공간감이 느껴졌다. 정언은 메모를 하다 그에게 되물었다.
“하청에서 말 나오는 부분이라고요?”
『에서 허주경 사장 만난 거 알고 있습니다. 청명토목하고 노경건설, 금목건설, 이런 데서 저희에 대해 투서 들어가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하청에 대한 서온건설의 갑질과 비리 문제는 아직 언론에서 보도한 적도 없었고, 민권당 사반위 쪽에서도 공론화한 적 없었다.
제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서온건설에서 이미 알고 있고, 더구나 어떤 업체가 제보하는지까지 알고 있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정언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본사에서 투서 내용도 알고 있습니까?”
『본사라면 어느 쪽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기, 저희 쪽도 있고 서온 쪽도 있는데, 아무튼 양쪽에서 다 이 사실 알고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시청 공무원들한테 증거 없애라고 연락 갔어요. 주경건설 허주경한테도 손쓴다고 했습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이건 위험했다. 정언은 다이어리에 ‘선배한테 바로 허주경 사장 연결해 보라고 해 지금’이라고 휘갈겨 쓰고는 그것을 윤에게 보여 주었다. 메모를 읽은 윤이 바로 차에서 내려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언은 서둘러 재차 물었다.
“그리고요?”
『자재 관리 부분, 그런 건 윗선에서 직접 지시 내려오는 겁니다. 녹취도 있고 제가 받은 메일, 메시지 캡처, 이런 거 다 있습니다. 증명할 수 있어요. 메일로 자료 보내겠습니다. 만약에 이거 문제가 된다면 저는 빠져나갈 수 있게, 아니 빠져나가지는 못해도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좀 해 주십시오.』
사태가 나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정언은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를 썼다. 제보가 들어가는 부분을 서온건설에서 알고 있다는 건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이종규 팀장이 연락을 해 온 건 자신이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분명했다. 이런 케이스는 결코 드물지 않았다.
정언은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시고요, 저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팀장님도 저희 계속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길게 얘기를 못 하겠습니다. 제가 애들도 아직 어리고, 장모님이 암 판정을 받으셨어요. 일 생기면 저도 그렇고 가족들도 정말 곤란합니다. 일단 제가 자료 바로 보내 드릴 테니까, 나중에 다시 연락 주십시오.』
멀리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정언은 그가 현장 어딘가에서 전화했음을 직감했다. 네, 하고 대답하기 무섭게 종규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정언은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문질렀다. 장모님이 암 판정을 받았다는 종규의 말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은 진짜였다. 그가 마음을 돌린 이유가 어쩌면 그것일 수도 있었다.
재희와 통화를 마친 윤이 다시 차에 타며 문을 닫았다.
“바로 알아보겠다고 하시는데요. 허주경 사장은 갑자기 왜요? 이종규 팀장이 뭐래요?”
“느낌이 안 좋네. 하청에서 투서 들어가는 거 이미 자기들하고 서온에서 다 알고 있다는데. 허주경 사장 건도 그렇고. 담당 공무원들한테도 증거 없애라고 연락 돌리는 중이래.”
정언의 말을 들은 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어떻게 하죠?”
“일단 사무실로 들어가서 얘기해 보자고.”
정언은 즉시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머릿속이 더 어지럽게 뒤엉켰다. 잠깐이라도 머리를 비워야 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정언은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계기판 위에서 속도계의 숫자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닫힌 창 너머로 공기가 빠르게 흘렀다.
방송국 근처의 카페 2층은 식사 시간이 지난 뒤라서인지 조용했다. 노트북을 펼쳐 놓은 윤은 맞은편에 앉아 초조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는 정언을 흘끔 보았다. 이종규 팀장의 연락이 온 뒤부터 정언은 내내 저런 상태였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한 손에 커피를 든 재희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윤의 곁에 앉았다.
“뭐래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정언이 재희를 다그치자, 커피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린 재희가 대답했다.
“허 사장 지난주에 이감 신청해서 옮겼다는데.”
“어디로요?”
“아니, 그게 좀 이상해. 원주교도소로 이감됐대. 그런데 여주교도소가 시설도 그렇고 환경도 그렇고 교정시설 중에 제일 괜찮은 편이라 굳이 이감 신청을 할 이유가 없거든. 수도권에서 가깝기도 하고. 그리고 이렇게 빨리 이감되는 경우 드물어. 신청하자마자 옮긴 모양인데 위에서 누가 손쓴 거 같아. 허 사장 취재하고 싶다고 공문 넣었더니 나 만나는 거 거부했다고 바로 연락 오더라고.”
윤은 눈썹을 좁혔다. 주경은 와 차세진 의원실로 억울하다는 편지를 수십 통씩 써서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 누명이 벗겨질 기회를 코앞에 두고 만남을 거부한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주경 사장이 안 만날 이유 없지 않습니까?”
윤의 물음에 재희가 고개를 까딱였다.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못 만나는 거지. 협박당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취재 요청 자체가 전달이 안 되는 걸 수도 있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죠?”
재희는 팔짱을 끼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내가 일단 계속 컨택은 해 볼 거야. 신변상 문제 있는지도 체크할 거고. 가족들한테 연락했더니 이감된 것도 아직 모르고 있더라고. 박기율 변호사님이 도와주겠다고 하셔서 우선 그쪽하고 연결해 줬어. 변호사님이 바로 조치 취하겠다고 하셨으니까 무슨 수가 있겠지.”
“담당 변호사가 공윤승이었는데 문제 생기지 않을까요?”
“나오기 전에 송 작가하고 얘기했는데 평진에서 아까 답이 오긴 왔대. 그런데 의뢰인의 민감한 개인 정보가 포함된 사항이라 자기들은 우리가 보낸 질의서에 대해 답변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네.”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기가 차 웃는 소리가 났다. 재희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허주경 죽이려고 검찰하고 짜고 친 고스톱인 거 인정하는 거지. 평진 정도 되는 로펌에서 공윤승 급 변호사가 의뢰인 저렇게 방치했다는 거 알려지면 타격 장난 아닐 텐데, 그거 감수하고라도 이 일에 대해 함구하겠다는 거 아냐. 무조건 입을 다무는 게 능사가 아닌데, 자기들도 지금 이거 어떻게 막아야 될지를 모르는 거라고. 아, 서 피디, 도로교통부에 당시 CCTV 기종 확인해 본다고 한 거 어떻게 됐어?”
재희가 정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언은 앞에 놓아 둔 자기 노트북 화면에 눈을 둔 채 대답했다.
“도로교통부에서 회신 왔는데, 당시에 용인휴게소 인근 CCTV 전수 교체된 상태 맞아요. 몇 년 전에 용인휴게소 인근 CCTV 대부분이 심각한 저화질이라고 기사 난 적 있는데 그 뒤에 교체했대요. 검찰에 제출된 CCTV 고유번호 확인하니까 이미 교체된 위치고. 스펙 검색해 봤는데 야간에 얼굴 인식 가능한 고화질 기종이더라고요. 일부러 영상에 손댄 거 확실하지.”
재희가 그 말을 듣고 혀를 찼다.
“이거 봐. 이거 진짜 기본적인 사항이고 전화 한 통 걸면 바로 알 수 있는 건데 확인도 안 해 본 거잖아. 이현교인가, 그 검찰 출석한 영상 분석 전문가 누구인지도 알아봐야겠네.”
미간을 찌푸린 정언이 펜 끝으로 이마 부근을 긁적였다.
“그나저나 하청에서 공무원들 받아먹은 거 증거 없애는 중이라는데 괜찮겠어요?”
재희가 걱정 말라는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손을 휘적거렸다.
“그쪽은 벌써 TF가 싹 쓸었어. 하청에서 계좌로 돈 입금한 내역 제보 다 받아서 확인 끝났대. 접대 들어간 데 인근 CCTV까지 걷어서 자료 화면도 상당수 확보했고. 원진솔 기자 얘기 들어 보니까 서온 간부들 성 접대 나간 룸 아가씨 인터뷰도 땄다고 하던데. 이종규 팀장이 보낸 자료는 뭐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