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사내 메일로 윗선에서 감리 조작 지시한 거하고 감리 확인서 이중으로 작성한 거. 자기 핸드폰 화면 메시지 캡처한 것도 있는데 주로 공무원들하고 뇌물 주고받은 거 얘기하는 내용이에요. 이종규 팀장이 윗선 지시 받아서 시청 공무원들한테 하청 어디서 얼마 줄 거다 통보하는 게 많은데, 이건 전 부장님한테 다 공유해 드렸어요. 녹취 파일은 아직 다 못 들어 봤고.”
“조작 지시한 윗선이 어딘데?”
“메일 보낸 사람 이름 확인했더니 사외이사예요. 윤양한이라는데 DB 검색해 보니까 서온건설 상무 출신이더라고요.”
윤양한, 하고 입 안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린 재희가 한심하다는 투로 내뱉었다.
“사외이사는 경영진도 아닌데 왜 감리에 간섭을 해. 하여튼 다들 이렇게 얄팍하다니까. 아, 민주영 의원실에서 모레 시간 되면 찾아오라고 하던데, 시간 괜찮으면 김 피디랑 둘이 좀 가 봐. 그리고 김 피디 서온 본사에 아는 사람 있다고 했지? 본사 분위기 한 번 알아봐 줄 수 있나?”
재희가 윤에게 시선을 돌리며 묻자,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재희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 남은 커피를 서둘러 마셨다. 그새 얼음만 남은 빈 컵을 흔들어 본 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오케이. 나 지금 종편실 들어가야 되니까 갔다 와서 다시 얘기하자.”
“아, CP실에서 뭐라고 했는지는 왜 얘기 안 해요? 무슨 소리 했길래?”
정언이 생각났다는 듯 묻자 재희가 웃는 얼굴을 했다.
“그건 내가 생각 좀 해 봐야 될 부분이 있어서. 일단 기다려 줘. 수고하고.”
곁에 앉은 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재희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사라지며, 아래층에서 문에 달린 풍경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정언이 창가에 턱을 괸 채 바깥으로 눈을 주었다. 윤은 무심결에 정언이 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재희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비쳤다. 정언이 한숨을 쉬었다. 윤은 핏기 없는 정언의 얼굴에 잠시 눈을 두었다가 물었다.
“이게 지금 우리 쪽에 안 좋게 돌아가는 거예요?”
정언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손끝으로 눈썹 위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유리한 건 모르겠지만 불리하지도 않아. 일단 제보하는 사람들 계속 나온다는 건 긍정적이거든. 지진 나기 전에 쥐들이 제일 먼저 안다고 하잖아. 사람들도 똑같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상황 나빠지면 제일 먼저 튀어나온다고. 하청업체도 그렇고, 이종규 팀장 같은 사람들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서온건설이나 엄대진 쪽에서는 이 사람들 우습게 보고 신경 안 쓴 거겠지만 중요한 제보는 다 이런 데서 들어오니까.”
아까의 초조해 보이던 표정은 많이 걷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평소처럼 침착한 목소리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시선을 든 정언이 윤을 빤히 보더니 피식 웃었다.
“왜, 걱정돼?”
“조금요. 방송 못 하게 되면 어떡하나 싶어서…….”
속을 들킨 기분에 움찔하며 대답하자 정언이 뒤로 몸을 기댔다. 눈을 조금 가늘게 뜨며 윤을 마주 보던 정언이 말했다.
“김 피디가 걱정할 건 방송 하는지 못 하는지가 아니고 본인 신변이야. 그게 최우선이니까 다른 데 신경 쓰지 마.”
그리 다정한 말투는 아니었으나 걱정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윤 역시 다음 차례는 자신일 수도 있다고 짐작하는 중이었다. 김 피디만 남은 거냐고 묻던 재희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그건 논리적인 추론이기는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였다. 처음부터 늘 그렇기는 했지만, 팀원들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몇 년이나 견디면서 일하고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윤의 말에 정언이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송 작가님이 나보고 퓰리처상도 죽어서 받으면 소용없다고 하긴 하더라. 아, 이훈주 과장 건으로 김정환 교수님하고 연락해 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말이 길어지는 걸 막기 위해 부러 화제를 돌리는 게 빤했다. 그러나 굳이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질 마음은 없었기에, 윤은 순순히 그 물음에 대답했다.
“조금 전에 메일 받았어요. 교수님이 경문대 병원 요청해서 당시 119 구급일지 사본 보관중인 거 확인해 보셨다는데 이송할 때는 사망 상태 아니었대요. 전신 골절 심각하긴 했는데 사망확인서 보면 도착 직후에 조석문이 거의 바로 사망 판정 내린 거라, 교수님이 당시 상황 어땠는지 그쪽 인맥 통해서 더 확실히 알아봐 주신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알았어. 메일 나랑 송 작가님한테 포워딩 좀 해 줘.”
네, 하고 대답한 윤은 메일함을 열었다. 턱을 괸 채 반대편 손가락을 탁자 위에 톡톡 두드리고 있던 정언은 갑자기 울리는 진동 소리에 멈칫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정언이 즉시 전화를 받았다.
“네, 서정언입니다. 네, 아, 네. 네, 맞습니다. 아, 그래요? 네?”
정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메일을 보내던 윤은 눈을 들어 정언을 보았다.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하던 정언이 말을 이었다.
“네, 맞습니다. 이원욱이요. 마포서 관할인 걸로 아는데…… 신원 어떻게 확인하셨죠? 아, 네. 지문으로, 그러면 확실한 거겠네요. CCTV 상에 얼굴이 찍혔으면…… 알겠습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원욱이라는 이름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원욱이라면 정언의 집을 털었던 경일용역 조직원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윤은 정언이 전화를 끊기 무섭게 물었다.
“이원욱 잡혔대요? 마포서예요?”
정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서대문경찰서 여성청소년계 정경수 경위님 있잖아. 수아 어린이집 담당 형사.”
“그런데요?”
“발신지 추적해서 근처 공중전화에서 발신된 거 알아냈는데, CCTV 돌리고 지문 감식했더니 어린이집에 전화 걸었던 남자가 이원욱이라네. 마포서랑 서대문서 붙어 있잖아. 정경수 경위님이 내 사건 담당인 박동찬 형사님하고 잘 아는 사이래. 그래서 마포서에서 지금 이원욱 빈집털이 혐의로 추적 중인 거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
손을 깍지 끼어 입가에 댄 윤은 미간을 좁혔다.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어 수아와 리아를 데려가려 했던 게 정말 이원욱이라면, 그들은 조창식이 찍었던 영상 속 경일의 말처럼 단순한 위협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그럼 진짜 애들 납치하려고 그랬던 거 아니에요? 만약에 어린이집에서 애들 보여 준다고 했으면 그대로 데려갈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처음에는 이분도 지금 단순한 장난전화일 거다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이원욱이 전과자고 마포서에 걸린 것도 있으니까 문제 심각하다고 본 거 같아. 어린이집 주변에 단속 강화했다는데 이원욱이 벌써 어디로 튀어도 튀었겠지.”
“김성학하고 장영관 사건 관련 제보 달라고 내보내기로 했어요?”
“응. 내가 아직 확인 못 해봤는데 어제부터 홈페이지하고 SNS에 올리고 예고 영상 자막으로 나간다고 했어. 이원욱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야 되는데…… 지금은 걔가 살아서 무슨 짓 할지 걱정되는 게 아니라 죽을까 봐 걱정이다. 미치겠네, 정말.”
정언이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손끝으로 핏기 없는 입술 위를 만지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정언이 노트북을 덮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사무실 들어가서 녹취 파일 남은 거 마저 들어 보고 정리해야겠어. 민주영 의원실 방문 스케줄 잡고, 송 작가님 슬슬 구성안 아우트라인 딸 모양이던데 그거 얘기도 좀 하고.”
머리가 아프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킨 정언이 카페를 나섰다. 윤은 곁에서 나란히 걸으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정언의 말대로 지금은 이원욱이 무슨 짓을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죽지 않을지가 더 문제였다. 관련된 사람들이 모조리 이런 식으로 죽어 나가기 전에 막아야만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정언이 답답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정언이 가방을 내려놓자, 때마침 탕비실에서 나오던 성옥이 어어, 하더니 정언 피디님, 하고 불렀다. 자리에 앉으려던 정언이 돌아보자 성옥이 손가락으로 정언의 책상 위를 가리켰다.
“계속 전화 들어와서 번호 남겨 놨는데 연락 좀 해 보세요. 피디님 꼭 만나야겠다고 난리예요.”
“누가? 날?”
정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성옥이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리다 대답했다.
“서온건설 뭐, 뭐라더라? 사원, 무슨 팀에서 나왔다는데요?”
정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자리를 정리하던 윤 역시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며 성옥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일시에 자신을 보는 시선에 성옥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자기가 뭘 잘못했나 싶었는지 성옥이 기어들어 가는 투로 눈치를 보았다.
“로비에서 기다린다고, 피디님하고 꼭 만나고 싶대요. 회의 중이시라 자리에 안 계신다고 이따 다시 하시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5분에 한 번씩 사무실로 전화가 와요. 일을 못 하게 계속 그러니까 미치겠는 거예요. 핸드폰 번호 함부로 알려 드릴 수도 없고.”
정언이 즉시 책상 위를 뒤지더니 성옥이 붙여 놓은 메모지를 찾아내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 전화가 연결됐는지 정언이 한쪽 귀에 수화기를 끼우고는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서정언입니다. 저한테 연락 주셨다고요. 서온건설에서 오신 거 맞습니까? 네. 잠시만요.”
인트라넷에서 미팅룸 사용 현황을 검색해 본 정언이 수화기를 고쳐 쥐며 말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시면 2번 미팅룸 공실이니까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정언이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몸을 숙였다.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잠시 책상 위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정언이 고개를 돌려 윤을 쳐다보았다.
“이 새끼들 뭐지? 사원행복문화팀에서 왔다는데, 나 만나고 싶대.”
이해할 수 없는 건 윤도 마찬가지였다. 차일피일 답변도 미루고 절대 인터뷰 따위 응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방송국 로비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건 무슨 수작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쪽에 연락한 거 전데요. 왜 제가 아니고 선배하고 만나겠다는 거예요?”
“내가 메인이고 이름 올라가 있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지. 일단 내려갔다 올게.”
정언이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들고는 책상의 펜 홀더에 넣어 둔 보이스리코더를 재킷 포켓에 꽂았다. 윤은 사무실을 나가려는 정언의 팔을 잡았다.
“같이 가요.”
“김 피디는 여기 있어.”
“그럼 차라리 제가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