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윤의 말에 정언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랑 만나고 싶다잖아. 내가 갔다 올 거니까 여기 있으라고. 회사 안에서 무슨 일 생기겠어?”
“회사 안이고 뭐고 그놈들하고 선배만 만나는 거 자체가 위험한 거 아니냐고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얘기했으나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성옥이 이쪽을 흘끔거리며 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이 뭐라고 하려다 말고 이마를 짚으며 바깥을 가리켰다.
“나가서 얘기해.”
정언은 윤을 거의 끌고 나오다시피 해서 사무실을 나섰다. 비상구 계단 안으로 윤을 밀어 넣고 문을 닫은 정언은 딱딱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거기서 나 보고 싶다고 한 거 아냐.”
“그러는 의도가 뭐냐고요. 저 거기 연락할 때 소속하고 이름 다 정확히 밝혔어요. 그런데 왜 굳이 저 아니고 선배 딱 찍어서 만나야겠다고 하냐고요. 그거 저만 이상해요?”
정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기는 했다. 한숨을 쉰 윤은 눈가를 문질렀다.
“제가 내려갈 테니까 여기 계세요.”
“또 고집이지?”
“선배는 아닌 것처럼 말씀하지 마시고요.”
평소와 달리 윤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가 않았는지 정언이 팔짱을 끼며 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정언이 툭 내뱉었다.
“그쪽에서 만약에 이걸로 김 피디 인식하게 되면 어쩔 건데.”
흘러내린 머리칼을 습관적으로 쓸어 올리는 손길이 초조했다.
걱정하는 거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 감정에, 윤은 조금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정언이 이렇게까지 확실히 속내를 보이는 일이 드문 까닭이었다. 문득 심장 뛰는 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닫힌 문 쪽을 슬쩍 넘겨다본 윤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저하고 통화도 했고 제 이름도 알아요. 얼굴 보든 안 보든 마찬가지예요. 걔들이 얼굴 몰라서 저 내버려 두는 거 아닐 거라고요. 저한테 무슨 짓 하든 상관없고, 전 선배가 이 사람들 혼자 만나러 가시는 거 싫어요.”
“김 피디.”
“전 여기서 밤새도 상관없는데 그럼 계속 이러고 있죠, 뭐.”
논리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차라리 막무가내로 나가는 게 정언에게 더 효과적이라는 걸 윤은 이미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윤을 마주 보던 정언이 결국 포기한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진짜 말 안 들어, 하여튼.”
“제가 누구 부사수인데 남 말을 들어요.”
“한마디도 안 지지?”
내뱉은 정언이 기가 찬다는 투로 웃었다. 내 죄다, 내 죄야, 하고 중얼거린 정언이 고개를 흔들며 비상구를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윤은 마르는 입술을 슬쩍 말아 깨물었다. 아무리 괜찮은 척했어도 막상 직접 서온건설 사람들을 눈앞에서 만난다고 생각하자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언은 복도를 걸어가 2번 미팅룸의 문을 열었다. 노크도 없이 열린 문에 놀란 듯, 안에 앉아 있던 남자 두 사람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은 삼십 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호남형이라고 할 법한 인상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뱀 같은 구석이 있었다. 혹시 이 남자가 천승욱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다른 사람은 그보다는 젊어 보였고, 일반 회사원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좋게 말하자면 경호원, 솔직히 말하자면 동네 깡패 같은 느낌이라 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희경이 천승욱을 만났다며 들려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회사원 같지 않은 남자 여럿을 달고 나왔다고 했던가. 그 역시 경일용역 조직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들의 맞은편에 앉은 정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서정언입니다. 이쪽은 저희 팀 김윤 피디고요. 서온건설에서 나오셨다고요?”
“사원행복문화팀 팀장 천승욱입니다.”
호남형의 남자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슬며시 정언을 훑어보는 시선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천승욱이 아닐까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가 여기까지 직접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내심 약간 놀란 건 사실이었다. 정언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았으나 그 서늘한 얼굴은 언제나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승욱이 넌지시 떠보듯 말했다.
“서정언 피디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취재 요청 계속 불응하셨는데 회사로 직접 찾아와 연락 주셔서 굉장히 놀랐습니다.”
정언은 아예 인사치레 따위는 할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승욱의 입매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윤은 그가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다.
“얼굴 뵙고 말씀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약속을 잡고 왔어야 하는데 제가 곧 출장이 있어서요. 실례인 줄 알면서 무작정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실까요?”
정언의 딱딱한 말투에 승욱이 숨을 들이쉬었다.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평정심을 잃는 걸 보면 인내심이 강한 타입은 아닌 듯했다. 승욱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웃는 얼굴을 했다.
“박규형 과장 부인 되는 분이 에 저희 얘기 제보한 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디님,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현장에서 사람 다치고 죽는 거, 당연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 흔하잖아요. 사람 하나 죽은 거 가지고 일을 굉장히 크게 만드시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곤란한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 알아 주셨으면 하거든요.”
사람 한둘 죽는 게 너희랑 무슨 상관이냐 하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깔린 말이었다. 말투는 부드럽고 유들유들한 축이었으나, 정언은 그런 것에 절대 속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승욱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정언이 팔짱을 끼었다.
“사측에서 어떤 부분이 곤란하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송신도시 분양이 아직 안 끝났는데, 부동산 커뮤니티 쪽에 에서 진송신도시 서온 스타일하우스 분양 건에 문제가 있어 취재 중이라는 찌라시가 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파급력 굉장한 프로그램 아닙니까. 이것 때문에 저희가 타격이 아주 큰 상황이고요. 지금 기분양자들한테도 분양 취소가 가능하냐는 연락이 계속 오고 있어서 저희가 TF 구성까지 고려하는 상황입니다. 업무가 돌아가지를 않아요.”
“저희 때문에 분양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말씀이신 건가요?”
“뭐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도 있겠죠.”
승욱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화법에 익숙해 보였다. 윤이 그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사측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신 겁니까?”
승욱이 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흰자가 많이 드러나는 눈이었다. 뱀 같은 인상이 느껴지는 건 삼백안인 탓도 있는 듯했다. 작은 편인 눈동자가 속을 알 수 없이 짧게 번뜩이며 윤을 훑어보았다. 승욱은 곧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사원 개개인의 인간관계까지 회사가 케어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희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게 불가능한 거 아시잖아요. 저희가 사내에 직원 상담센터까지 설치해서 상시 운영 중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의무적으로 전 직원이 상담 받도록 하고 있고요. 전문가 도움이 필요한 경우라고 판단되면 상부에 보고하고 케어 돕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더 해야 될지 좀 알려 주시겠어요?”
“실제로 그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판단 가능한 자료 제공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윤의 물음에 승욱의 눈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윤은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천승욱 팀장님이 사내 성폭력으로 고발당한 것만 네 건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내 성폭력 고발하는 고충처리센터가 현재 사원행복문화팀 관할이고요. 저희 입장에서도 가해자가 고충처리센터 관할하는 회사를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투만 존대일 뿐 다짜고짜 스트레이트 날리는 소리인 걸 당사자인 승욱이 모를 리 없었다. 표정이 굳어진 승욱이 잠시 뚫어지게 윤을 바라보았다.
탁자 밑으로 정언이 윤의 허벅지 위를 툭 쳤다. 지나치게 자극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승욱이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손수건을 꺼내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이마 위를 몇 번 눌렀다.
“그런 말씀을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증거도 없고 이미 끝난 얘기를 이런 식으로 하시니까 당황스럽네요. 어쨌든 오늘 제가 여기 온 건 제안을 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승욱이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그에게 사내 성폭력 가해자라는 이야기가 아킬레스건이라는 건 빤한 부분이었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해 봐야 자기 입장에 유리할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요즘 건설업 경기 안 좋은 거 잘 아시죠? 주택난도 심각하고요. 저희가 이런 문제 때문에 무리해서 세대 수 늘리고 분양가도 다른 회사에 비해 평당 가격 낮춰서 잡은 겁니다. 이건 비교해 보시면 금방 아실 겁니다. 저희가 프리미엄 라인인데도 다른 회사 보급형 라인보다 저렴한 편이에요.”
그 프리미엄 라인이 실제 프리미엄이라면 몰라도, 하고 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승욱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언론에서 저희 공격하면 역풍 맞을 가능성 높습니다. 그건 입장에서도 상당히 부담이 되실 거고요. 방송 내용 따라서 저희가 법적 대응 할 수도 있다는 것도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정언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묻자 승욱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 그러려고 온 거 아닙니다. 하면 한국 사람 다 아는 방송 아닙니까. 저도 아주 즐겨 보고 있는데요. 좋은 프로그램에 저희가 딴지 걸고 그럴 마음 없습니다. 본론부터 얘기하죠. 최근에 제작비 지원받는 거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정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사진이 바뀌면서 시사보도국 프로그램 전체에 대한 제작비를 줄이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형편이 좋지 않은 건 분명했다.
시사보도국 간판인 조차 인원 충원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라, 강제 전보당한 자신도 감지덕지하며 받아들였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승욱이 그런 내부 사정을 빤히 알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희가 협찬하는 걸로 해서 회당 이 정도 제시하면 어떻겠습니까? 로고 노출, 이런 조건 없이 드리는 겁니다. 호의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승욱이 곁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남자가 자기 포켓에 꽂고 있던 만년필을 뽑아 건넸다. 승욱은 앞에 놓인 종이에 숫자를 적어 정언 앞으로 밀어 놓았다.
30,000,000…… 윤은 동그라미의 개수를 눈으로 세어 보았다. 회당 삼천이라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정언이 멈칫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정언과 눈을 맞춘 승욱이 씩 웃는 얼굴을 했다.
“이건 물론 프로그램 전체에 제공하는 거고요, 피디님들께는 따로 준비한 게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