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7
17화.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먼저 운전석에 탄 정언이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당황한 윤은 얼어붙은 채 서 있다가 조수석 창을 연 정언이 다시 한 번 안 타냐고 묻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외근이 있을 때 선배가 운전하는 차에 탄다는 건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서둘러 조수석에 탄 윤은 무릎 위에 카메라 가방을 올려놓고는 주변을 슬쩍 살폈다. 뒷좌석에 커다란 더플백 하나가 처박힌 것 말고는 일체의 짐이랄 게 없는 차였다. 장식품은 물론이고 그 흔한 방향제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정언의 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선팅된 창으로도 햇살이 따가웠다.
창을 연 정언이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윤은 거의 반사적으로 시가 잭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정언이 시선을 앞에 둔 채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내뱉었다.
“필요 없어.”
“아, 네.”
윤은 머쓱해진 손을 도로 얌전히 무릎에 올려놓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놀랍게도 정언 쪽이었다.
“나랑 있을 때 커피 안 사 와도 되고, 운전 안 해도 되고, 불 안 붙여 줘도 돼. 내가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할 테니까 그때 해. 그러고 있으면 안 피곤해?”
하루 종일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이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뇨, 선배. 그런 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그냥 사회생활 잘하는 건가?”
그 말에는 약간 웃음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윤은 정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옆얼굴이 서늘했다. 농담일까, 진담일까. 쉽게 판단할 수 없는 표정은 선글라스로 절반이 가려진 탓에 더 어려웠다.
“호의는 호의로 받아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그렇게 물은 건 어느 정도는 충동적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빨간 신호가 들어왔다. 차를 세운 정언이 되물었다.
“호의?”
“네.”
정언이 문득 웃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짧았다. 곧 무표정으로 돌아간 정언은 말이 없었다.
다시 신호가 바뀌었다. 정언이 액셀을 밟았다. 열린 창으로 아직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귀가 먹먹해졌다.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컵 홀더 안의 빈 종이컵에 눌러 넣은 정언이 창을 닫았다. 삽시간에 차 안이 조용해졌다.
찬 기운이 남은 공기가 떠돌다 서서히 내려앉았다. 앞을 보고 있던 정언이 물었다.
“게시판에 그런 글 왜 쓴 거야?”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이제는 대체 그 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주목받는 건 취향이 아니었기에, 정언이 그렇게 묻는 건 약간 불편했다. 윤은 손끝에 가시가 박힌 듯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냥요.”
“그냥?”
“그게 뭐라고 못 찍게 하나 싶어서 그냥 화가 좀 난 거죠, 뭐.”
“원래 남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거 맞네.”
그 말투는 비웃는다기보다 약간 놀리는 것처럼도 들렸다. 공연히 귀 끝이 빨개졌다. 정언과 이렇게 길게 대화를 해 본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윤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그 다큐 메인이 제 친구거든요. 친구 일이니까 그랬죠. 솔직히 말하면 그날 술도 좀 마셨고, 그래서…….”
“후회돼?”
말문이 막혔다. 글 한 번 잘못 써서 에서 로 떨어졌다면 후회 안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며칠 사이 마음 정리를 한 건 사실이었다.
“아뇨.”
“거짓말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언이 물었다.
“……조금요.”
취조당하는 기분에 뜨끔해진 윤은 즉시 순순히 고백했다.
“솔직한 건 좋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언이 액셀을 더 밟았다. 출근 시간이 지나 한산해진 도로 위로 차가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그나마 솔직한 게 좋다니, 눈치 보지 말라는 말보다는 나은 건가. 습관적인 낙관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기분을 나아지게 했다.
그게 뭐 대단한 말이라고, 하고 속으로 생각한 윤은 저도 모르게 실없이 웃었다. 정언이 선글라스 너머로 이쪽을 흘끗 본 것 같았다. 윤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길가의 풍경이 눈동자에 채 맺히기도 전에 빠르게 뒤로 지나쳤다.
* * *
지은 지 족히 15년은 됐을 게 틀림없는 낡은 빌라 앞은 주차할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차를 좀 작은 걸로 바꾸든가 해야지, 하고 이미 몇 년째 하고 있는 생각을 또 한 정언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조수석에 탔던 윤이 그 큰 키를 최대한 작게 구기며 조심조심 문을 열고 내렸다.
차 문에 기대선 정언은 핸드폰에서 희경의 주소를 찾았다. 홍제동 초원빌라 B동 201호…… 전화를 걸려던 정언은 문득 빌라 문 앞에서 서성대는 한 여자를 보았다. 화장기 없이 초췌한 얼굴에 긴 카디건 차림으로 서 있던 여자가 이쪽을 보더니 퍼뜩 놀라며 가까이 다가왔다.
“이희경 씨?”
정언이 묻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희경. 제보자였다. 정언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약속했던 시간 전이었다. 언뜻 봐도 입술이 파란 게 아마 진작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던 듯싶었다.
정언은 명함을 꺼내 희경에게 내밀었다.
“ 서정언 피디입니다. 이쪽은 김윤 피디고요.”
곁에 서 있던 윤을 가리키자 희경이 흘끔 두 사람을 보고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언은 문 안쪽을 가리켰다.
“오래 기다리셨나 봐요. 죄송합니다.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집에 혼자 있으면 영 답답해서요.”
희경이 조그맣게 말하고는 먼저 문을 밀었다. 오래되어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유리문이 삐걱대며 열렸다. 정언은 그 뒤를 따랐다. 희경이 교회 스티커와 배달 음식점 스티커 따위가 덕지덕지 붙은 문의 도어록 버튼을 누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거실로 정언과 윤을 안내한 희경이 부엌으로 향했다. 어린이용 매트가 깔린 좁은 거실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장난감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알록달록한 시트지를 붙인 공간박스에 정갈하게 꽂힌 아동 전집이나 먼지 하나 없는 장식장 같은 것을 보면 희경의 성격을 짐작할 만했다. 손이 닿는 곳의 모든 물건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윤이 가져온 가방에서 삼각대와 캠코더를 꺼내 설치하는 동안, 희경이 작은 쟁반에 커피 세 잔을 받쳐 가져왔다. 정언은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는 희경의 손이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감기 드신 거 아니에요? 괜찮으세요?”
정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희경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제가 요즘 잠을 잘 못 자요. 애기들 어린이집 보내고 한숨 자려고 해도 영 잠이 안 오고 그렇더라고요.”
뭐라고 위로의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숨을 들이쉰 희경이 정언을 마주 보았다.
“이거 방송해 주실 건가요?”
정언이 멈칫하자, 희경이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시선을 내린 희경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자들이 몇 번 왔는데 아무도 기사를 안 내주더라고요. 회사 얘기만 들으니까 답답하고, 기사 내준 거 봐도 회사 입장만 있어서요.”
“기사를 안 내줬다고요?”
정언은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나중에 연락해 보면 애기 아빠가 자살한 건데 자기들이 뭐 기사 낼 게 있냐고 그러는 거예요. 제보하려고 연락해 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사 못 낸다, 이건 기사거리도 안 된다 그러면서 저보고 한심하다고 그러는 분도 많고요.”
희경이 애써 웃었다.
“그런 인간들이 어떻게 기자라고…….”
듣고 있던 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언이 뒤를 돌아보자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는지 윤이 곧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희경에게는 나름 그 말이 위로가 된 모양이었다. 희미하게 웃은 희경이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글 너무 자주 올렸죠? 민폐인 거 아는데 어디다 말할 수가 없더라고요. 나는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은데, 남들한테는 너무 흔한 일이구나 싶어서…… 글 올리면서도 너무 죄송했어요.”
“아닙니다.”
정언이 서둘러 고개를 젓자 희경이 잠긴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애들은 아직 아빠 그렇게 된 것도 몰라요. 아빠가 멀리 출장 가서 오래 못 본다고 얘기했거든요. 애들 삼촌이 남편하고 목소리가 비슷해서 주말에 가끔 애들하고 통화해 주는데 애들한테도 미안하고, 도련님한테도 미안하고…….”
낮은 한숨이 말끝에 섞였다. 잠시 침묵하던 정언은 말을 돌렸다.
“일단 저희가 인터뷰 촬영해도 괜찮을까요?”
“네.”
“그러면 저희한테 설명 좀 부탁드릴게요. 저희 작가님하고 미리 통화하셨다고 듣긴 했는데, 저희가 촬영을 해야 돼서요.”
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 캠코더의 녹화 버튼을 누르고는 화면을 맞췄다. 녹화 시작을 알리는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정언이 말했다.
“그냥 편하게 얘기하세요. 중간에 힘들면 잠깐 쉬셔도 되고요. 먼저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주시겠어요?
희경이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언은 가져온 수첩을 펼쳤다. 희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 3일 아침인가 그랬을 거예요. 애들 아빠가 전날 밤에 안 들어왔어요. 그런 일이 자주 있진 않은데 현장 나가면 며칠씩 외박하는 일도 많았으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했거든요.”
“전날 연락은 하셨었고요?”
“네, 저녁에 애들이랑 통화했어요. 무슨 일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안 했죠. 그런데 아침에 남편하고 같이 일하는 조 계장님이라고 계신데, 그분한테 전화가 와서 박 과장한테 일이 생겼으니까 빨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문자로 병원 주소가 왔는데 느낌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갔더니 조 계장님이…… 제수씨, 박 과장이 죽었어, 그러는 거예요. 황당하잖아요. 저녁에 애들하고 전화한 사람이 아침에 죽었다고 그러니까.”
“평소에 무슨 지병 같은 건 없으셨고요?”
정언의 물음에 희경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없었어요. 집안이 워낙 잔병이 없어요. 건강검진도 꼬박꼬박 받았고요.”
“마지막에 건강검진 받으신 건 언제죠?”
“작년 말에 받았으니까 두 달 안 됐어요. 워낙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어딨냐고, 내가 그이 좀 봐야겠다고 그러니까 계장님이 절대 안 된대요. 왜 안 되냐, 내 남편인데 왜 못 보게 하냐 그러면서 실랑이를 하는데 경찰이 왔어요. 제가 지금 그분 이름이 생각은 안 나는데…… 아무튼 그분이 저보고 박규형 씨 가족이냐 하면서, 어젯밤에 남편이 현장에서 자살을 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