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감사국 어디신데요? 소속 얘기하세요. 사원증 보여 주시고요.”
윤에게 감사국이라고 말한 남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직원인데 그걸 왜 보여 줘요?”
“직원이면 사원증 못 보여 주실 이유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감사1부 소속이세요, 2부 소속이세요? 무슨 명목으로 오셨고 뭘 찾으시는 건지 말씀을 하셔야 될 거 아닙니까. 보니까 우리 팀원들 없는 사이에 무단으로 문 따고 들어와서 사무실 뒤진 거 같은데, 지금 소속도 증명 못 하면서 무작정 이러시면 저희도 법적으로 조치할 수밖에 없어요.”
남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듯했다. 정언의 말이 틀린 건 없었다. 감사국 소속이라면 사원증을 확인시켜 주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사원증을 꺼내는 대신 약간 기세가 꺾인 투로 대답했다.
“우리도 위에서 지시받고 온 거예요.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니까 왜 이래요.”
“그러니까 누가 어디서 무슨 지시를 했냐고요. 신분증 확인시켜 주시고, 언제 열린 이사회고 의결사항 언제 전달했는지 그걸 고지하셔야 할 거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도둑처럼 사무실 뒤지는 거 저 이 회사 있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정언이 특유의 냉랭한 말투로 대꾸하자 남자들은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침묵했다. 그때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열었다. 재희였다.
뒤를 따라온 충민이 아예 사무실 문을 밖으로 열어 놓고는 문 앞을 막아서다시피 했다. 지혁이 충민의 등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급히 올라온 듯, 잠깐 숨을 고른 재희가 미간을 좁히며 남자들에게 물었다.
“감사국이시라던데 어디서 언제 감사 지시했습니까?”
“이사회 지시라고요, 이사회!”
답답하다는 듯, 한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이미 알고 있고요. 어디서 언제 의결했는데 고지를 안 하냐 그거 묻는 거 아닙니까. 제가 여기 팀장인데 저한테도 고지 없었던 내용을 대체 누구한테 알려 준 겁니까? 그리고 빈 사무실 무단 침입해서 뒤지는 거 노조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사항인데, 이걸 감사국 직원분이 모를 수가 있습니까?”
칼 같은 말투에 남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재희는 정말 화가 난 표정이었다.
“사무실 이렇게 뒤지는 거면 찾으시는 물건 있어서 그런가 본데, 말씀하시면 굳이 귀찮게 뒤질 필요 없이 드릴 텐데요. 사원증 제시는 안 하시는 겁니까, 못 하시는 겁니까?”
“아니, 감사가 뭐 직원들 모셔다 놓고 하는 건 줄 알아요?”
“빈 사무실 도둑처럼 터는 건 감사고요? 사칭인지 아닌지 저희가 알 방법이 있습니까? 감사국 직원 아닌데 지금 이러시는 거면 법적으로 문제 크게 될 수 있다는 거 모르세요? 이사회 의결 사항 통보 받은 적도 없고, 사원증 제시 못 하시면 저희는 사설 업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회가 사설 업체 고용해서 직원 사무실 이런 식으로 수색하는 거 불법이에요. 법대로 해야겠습니까?”
그때 문가에 버티고 서 있던 충민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야, 강재희. 말 길게 섞지 마. 내가 지금 감사국 홍상인 부장 이리 오라고 할게. 이 사람들 얼굴 아는지 확인해 보면 되지. 노조 법무팀 부를 테니까 너 일단 경찰에 연락부터 해라.”
충민이 핸드폰을 꺼내자 사무실 구석에 있던 남자가 황급히 자기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도착한 것은 경비팀이었다. 경비원들이 서둘러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을 데리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충민이 이게 지금 뭐하는 거냐고 붙들었으나 아무런 설명도 들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도착한 감사국 감사1부의 홍상인 부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충민에게 물었다.
“나 왜 불렀어요?”
“홍 부장님, 혹시 이사회에서 저희 감사 지시 받으신 거 있습니까?”
재희가 대신 묻자 상인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이사회에서요? 아뇨, 모르겠는데.”
“감사2부에서도요?”
“요새 이사회에서 지시사항이 일절 없었는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상인이 눈치를 보며 되물었다. 폭격이라도 떨어진 듯한 사무실 꼴에 아무래도 뭐가 있긴 있나 보다 짐작한 모양이었다. 충민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사회 지시 받았다고 감사국이라면서 얘네 사무실을 지금 다 엎어 놓고 갔는데, 감사국에서는 통지받은 게 없다는 거죠?”
“나는 뭐 아는 게 없는데요.”
충민이 알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상인에게 같이 가자는 손짓을 했다. 그사이 도착한 다른 팀원들이 충민의 등 뒤에서 사무실 안을 기웃거리다, 충민이 상인과 함께 사라지기 무섭게 비집고 들어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게 다 뭐야? 이 새끼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거래?”
철진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엉망진창이 된 자기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재희는 사무실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기획안하고 자료 같은 거 사무실에 하나도 안 남겨 둔 거 맞지? 없어진 거 있는지 확인 좀 해 봐.”
팀원들이 제각기 자기 자리로 흩어져 서둘러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윤 역시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며 책상 서랍 안을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지난번 재희의 말 이후로 중요한 서류들은 전부 싹 치웠기에 마땅히 없어진 물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건너편에서 혜주가 목을 뽑아 짜증을 냈다.
“얘네 미쳤나 봐요. 제 서랍도 다 뜯어 놨어요.”
“어우, 아주 작살을 냈는데요.”
옆자리의 호형이 혜주의 서랍을 가리켰다. 기본 잠금장치 말고도 추가로 자물쇠를 하나 더 달아 잠가 놓았던 서랍을 거의 반쯤 부숴 놓은 채였다. 예준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는 소리를 냈다.
“야, 이거 뭐 칼만 안 들었지 완전 강도구만. 잘 하면 금고도 털겠다.”
“외장하드나 USB 하나라도 없어진 거 있나 다 체크해 봐, 빨리. 컴퓨터 만진 흔적 있는지도 찾아보고.”
재희가 자기 자리의 컴퓨터를 확인하며 말했다. 현진이 엉망이 된 물건들을 쓸어 쓰레기통에 쑤셔 넣으며 투덜거렸다.
“이게 무슨 난리야, 도대체? 경찰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냐?”
“내가 할게요. 우 피디, 내가 노조 사무실에 얘기해 놓을 테니까 지금 빨리 보안실 내려가서 CCTV 영상 달라고 해. 보안팀 와서 데려간 거 보니까 영상 지우고 증거 없다고 할 거 같아.”
재희의 말에 지혁이 네, 하고 대답하며 서둘러 뛰어나갔다. 자리를 정리하던 정언이 윤에게 물었다.
“없어진 거 없어?”
“네. 컴퓨터에도 손은 안 댄 것 같아요.”
“뭐 이딴 새끼들이 다 있지? 뜬금없이 왜…….”
중얼거리던 정언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정언이 손끝으로 구겨진 미간을 누르고 있다가 재희를 불렀다.
재희가 왜, 하며 가까이 다가오자 정언이 거의 속삭이다시피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갑자기 감사니 뭐니 하며 사무실을 뒤집어 놓는 게 혹시 천승욱의 제안을 거절한 일과 관련이 있는지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재희가 한동안 침묵하다 짧은 한숨을 뱉었다.
“일단 알겠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볼게. 오후에 팀 전체 회의할 거니까 그때 얘기해. 나도 할 말 있고. 송 작가 아직 안 왔지? 송 작가 자리도 둘이 체크 좀 해 줘. 연락해서 무슨 중요한 자료 있었는지 물어보고.”
“알았어요.”
정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이 그나마 정리된 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였다. 그새 소문이 났는지, 다른 팀 사람들이 다들 들러 한마디씩 보태는 통에 더 정신이 없었다. 먼저 감사팀이 다녀갔다던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던 듯했다.
재희가 부른 경찰이 성옥과 지혁에게 그 사람들이 몇 시쯤 찾아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등을 묻고 돌아간 뒤에야 겨우 사무실은 평소대로 돌아갔다. 다들 지쳤는지 커피 한 잔씩을 뽑아 자리에 앉았으나, 일할 의욕이 전혀 나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윤 역시 아침에 샀다가 잊어버린 커피를 맥없이 마시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얼음이 다 녹은 지 오래라 커피인지 커피가 발을 담근 물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맛을 느낄 만한 여력도 없었다.
맞은편의 예준과 석현이 늦은 점심을 뭘 먹으면 정신이 좀 차려질까 하며 부질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참이었다. 밖에서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사원증은 목에 걸고 있었으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서정언 피디님, 김윤 피디님 계십니까?”
지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던 재희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사회실에서 호출입니다. 두 분 사무실에 계시면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사회에서 직접이요?”
재희가 그에게 되물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무실 안에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지났다.
이사회에서 다짜고짜 평피디를 소환하는 일은 드물었다. 더구나 팀장인 재희도 아니고, 정언과 윤을 오라고 하는 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였다. 정언도 이런 일은 처음인 듯 재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희가 눈썹을 좁히며 그를 마주 보았다.
“제가 책임자인데요. 이유가 뭡니까?”
“저는 두 분 모시고 오라는 얘기 외에는 못 들었습니다.”
남자는 마치 대답이 입력된 로봇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속셈인지 가늠해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재희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동석하겠습니다.”
“서정언 피디님, 김윤 피디님 외에는 동석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는 완고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윤은 인사위원회에 회부됐을 때를 퍼뜩 상기했다. 게시판에 글을 쓴 건 자신인데도, 위원회에서 책임자라는 이유로 최진수 부장까지 동석하게 했던 것이 떠올랐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책임자 동석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상했다.
펜 끝을 책상 위에 두드리던 정언이 잠시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서 피디.”
재희가 정언을 불렀으나 정언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윤은 서둘러 정언을 따라 일어나며 펜형 보이스리코더를 켜 재킷의 포켓에 꽂았다. 남자의 뒤를 따라 이사회실로 올라가는 동안 정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이사회실 문을 연 남자가 두 사람을 들여보내고는 문을 닫았다. 긴 탁자에 네 명의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윤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물론 일방적인 안면이기는 했다. 연초에 교체된 이사진 중 네 사람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