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고광훈, 원종철, 현갑진, 한성탁. 뉴스에서 질리도록 본 그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매치해 본 윤은 문 앞에 선 채 그들을 마주 보았다. 갑진이 먼저 턱짓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시사보도국 3부 서정언, 김윤 맞아?”
두 사람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갑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뺨을 긁적였다. 정언이 네, 하고 대답하자 갑진이 앞에 놓인 차를 소리 내어 홀짝이더니 아주 귀찮다는 투로 내뱉었다.
“젊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속 시끄럽게 굴어, 자꾸. 우리도 곤란해 죽겠어. 경고 여러 차례 했다고 들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회사 말아먹고 싶어서 작정했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정언이 대답하자 갑진이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모르겠다? 용역 업체 찾아가서 쌍방 폭행으로 경찰서 들락거려 연락 오게 만들고, 괜히 국가 경제 근간 기업 흔들어 가면서 시청률 올리려고 들고. 그런 짓 한 적 없다 그거야? 그런 버릇 어디서 들었어? 피디들이 품위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전류 같은 감각이 퍼뜩 등줄기를 빠르게 지나쳤다. 여기 자신과 정언을 부른 이유가 뭔지 그 순간 명확해졌다. 서온건설 때문이다. 정언의 생각이 옳았다.
천승욱의 제안은 그들이 이쪽에 주는 마지막 기회였던 게 분명했다. 순순히 받아들이고 입을 다문다면 여기서 서로 편하지 않겠느냐는.
그러나 정언이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기에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성탁이 정언에게 물었다.
“서온건설 취재하고 있지?”
정언은 대답 대신 그를 마주 보았다. 조금의 동요도 없는 정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성탁이 정언 앞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무심코 거기 시선을 준 윤은 멈칫했다. 야간에 찍힌 CCTV 사진 두 장이었다.
한 장은 재희의 차량 번호판이었고, 다른 한 장은 차에 타고 있는 재희와 자신의 얼굴이었다. 야적장에 취재 갔던 날 찍힌 자료인 듯했다. 그날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탓에 심장이 덜컥했다. 성탁이 팔짱을 끼었다.
“이거 김윤 맞잖아. 강재희랑. 서온건설에서 우리한테 보낸 거라고. 야적장 외부인 출입 불법인 거 알았어, 몰랐어?”
“문제가 된다면 법적 조치 받아들이겠습니다.”
정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는 말투였다. 조금도 기가 죽는 기색이 없는 그 태도가 이사들을 더 자극한 모양이었다.
성탁이 탁자 위를 쾅 소리가 나게 쳤다.
“그건 당연한 거고, 왜 이렇게 속 시끄럽게 하냐고 얘기하잖아! 회사 꼴이 뭐가 돼?”
“취재 목적 외의 불법적인 행위나 회사의 명예 실추시키는 행위는 한 적 없습니다.”
정언의 대답에 종철이 화를 내려는 성탁을 제지했다. 종철은 무표정한 정언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기획안 제출 거부하는 거 이딴 식으로 마음대로 하려고 그러는 거야? 우리가 이미 여러 루트로 좋게 얘기했는데도 왜 말을 안 듣냐고. 최영직 CP가 기획안 한 번 보자고 좋게 말한 것도 싫다고 했다며?”
윤은 그 말에 정언이 잠깐 멈칫한 것을 알아차렸다. 눈 깜빡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으나, 영직에 대한 이야기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재희가 영직을 만나고 온 뒤 아직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자리에서도 기획안 이야기가 나왔고, 재희가 역시나 그 말을 거절한 게 틀림없었다. 정언은 그 찰나의 동요를 숨긴 채 말했다.
“왜 기획안 제출 요구하시는지 이유 모르겠습니다. 제가 입사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상부에서 기획안 요구하신 적 없었습니다. 저희가…….”
“야, 넌 계집애가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정언의 말을 끊은 건 광훈이었다. 광훈은 교체된 이사진 중에서도 가장 평이 나쁜 사람이었다. 교수 출신으로 정계 진출을 노린다는 소문이 파다한 위인이었다. 교수 시절부터 각종 막말로 문제가 된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계집애 소리에 윤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그때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정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정언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광훈을 마주 보았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대번에 기가 질릴 정도로 서늘한 눈이었다.
광훈 역시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정언을 본 광훈이 팔짱을 끼었다.
“눈깔 똑바로 안 떠? 불만 있어? 왜, 대단한 피디보고 계집애라고 해서 기분 상해?”
“이사님, 폭언 삼가 주십시오.”
정언이 가라앉은 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광훈은 그 말에 더 기세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폭언? 뭐가 폭언이야? 계집애보고 계집애라고 하는 게 폭언이야? 하여튼 이래서 계집애들 뽑아 놓으면 안 돼. 별것도 아닌 말에 파르르 떨면서 대들잖아. 그렇게 예민하면 집구석에서 살림이나 하지, 왜 나와서 돌아다녀? 야, 너 서른하나 먹었다며. 그 나이면 선 시장 퇴물이야, 퇴물. 빨리 시집이나 가지 방송국은 왜 붙어 있어? 그것도 같은 데.”
“이사님.”
정언은 조용히 광훈의 말을 막았다. 윤은 무릎 위에 놓인 손끝을 안으로 말아 움켜쥐었다. 듣고 있는 자신이 찬물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정언의 모멸감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열이 올랐다. 윤은 떨림을 참기 위해 이를 물었다. 광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말 나온 김에 얘기 좀 할까? 니들 평균 시청률 얼만지 알아?”
윤이 정언 대신 먼저 대답했다.
“작년 기준 12.8퍼센트입니다.”
“최고 시청률하고 최저 시청률 아이템 뭔데?”
“서울 북서부 여성 연쇄살인사건 편이 15퍼센트, 제주 4.3 사건32) 편이 7.2퍼센트였습니다.”
팀에 들어오자마자 편람과 시청자 카페를 샅샅이 뒤지며 공부한 덕에 그런 수치들은 머릿속에 확실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 바로 답이 돌아올 줄 몰랐는지, 광훈이 한쪽 눈썹을 조금 치켜 올리더니 비꼬는 것이 역력한 투로 내뱉었다.
“야, 아주 똑똑하네. 머리 좋아. 그 좋은 머리로 그거 말하면서 아무 생각이 없어? 사람들이 뭐 원하는지 모르겠어? 자극적인 거, 응? 자극적인 거. 니들이 백날 무슨 대단한 사명감 가지고 해 봐야 사람들 원하는 거 그거야. 젊은 여자 강간하고 죽이고, 이런 얘기 나오면 사람들이 죄다 텔레비전 앞에 붙어 있는다고. 제주 4.3 사건? 그런 거 누가 궁금해하는데?”
“시사 프로그램에서 시청률 7퍼센트 절대 낮지 않습니다.”
정언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윤은 정언 역시 자신처럼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기 위해 참고 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광훈이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럼 우리가 제작비 공으로 줘? 그런 거 한다고 전국 돌아다니고 해외 나가고 그 돈은 다 너희 사비야? 강간, 살인, 사이코패스, 뭐 이런 거 위주로 할 수 있잖아. 화끈한 거, 사람들 좋아하는 거. 시청률도 오르고 남의 심기도 안 거스르고 일석이조 아냐.”
“저희 그런 프로그램 아닙니다.”
“그럼 뭔데? 뭐 얼마나 대단한 프로그램이라 그런 게 아냐?”
코웃음을 친 광훈이 정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알아서 잘 하면 우리가 왜 폐지를 시켜. 지금이라도 생각 바꾸면 살려 주겠다고. 무슨 말인지 몰라?”
그 마지막 말에 정언의 표정이 달라졌다. 생각을 바꾸면 살려 주겠다는 건, 를 유지할 수도 있다는 뜻일까. 윤은 잠시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이사들을 보았다. 광훈이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며 정언을 타일렀다.
“우리라고 뭐 잘 되는 프로 폐지시키고 싶어서 그러겠어? 근데 문제가 뭐냐, 젊은 놈들이 프로그램 잘 되는 게 지들 덕인 줄 알아. 아니거든. 회사가 백업을 해 주니까 지들이 있는 건데 반대로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말 들으라는 거야. 말 들으면 폐지 안 한다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제안하는 건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절반이라도 남기겠느냐, 모두 빼앗기겠느냐. 윤은 자신이 아는 재희나 정언이라면 그들 말대로 하면서 프로그램을 남기느니 그냥 문을 닫는 쪽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의견이 같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는 한 사람의 팀이 아니었다. 종철이 나름대로는 부드럽게 정언을 달래듯 말했다.
“긴말 말고, 지금 미방분 기획안 제출하고 앞으로 우리하고 종편본 시사 하자고. 서정언 피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최영직 CP 체제로 완전 전환하고 매주 아이템 CP 컨펌 받게 될 거야. 지금하고 크게 다르지 않아. 생각하는 것처럼 아주 나쁘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최영직 CP 상식적인 사람이야.”
정언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짧은 순간 정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지나갔는지 윤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정언이 그런 말을 받아들일 리 없다는 건 확실했다.
정언은 최대한 감정을 누르는 말투로 대답했다.
“이사님, 지금 요구하시는 사항은 제작 및 보도 자유의 보장 조항 위반에 해당합니다.”
정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광훈이 정언을 야단쳤다.
“계집애는 말대꾸하지 말라고! 왜 이렇게 낄 데 안 낄 데를 모르고 잘난 척을 해? 하여튼 시보국에 계집애들 뽑지를 말아야 돼. 특히 서정언 너 같은 것들. 옛날에는 여자가 발도 못 들이는 데였어. 군대 안 가서 위아래도 모르는 계집애들이 비집고 들어와 물 다 흐려 놓는 거 봐. 윗사람이 말하는데 눈깔 똑바로 뜨고 대드는 꼴 보라고, 저거!”
정언은 거기 대꾸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윤은 탁자 아래 놓인 정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을 여는 즉시 감정이 터질 것 같아 참는 것이 틀림없었다. 윤은 입술 안쪽을 이로 눌러 물었다.
광훈이 한심하다는 투로 들으라는 듯 끌탕을 했다.
“계집애들이 시보국에 무슨 필요가 있어? 좀 어리고 예쁘장한 애들이나 뽑아서 얼굴 마담이나 시키다 나이 들면 내보내야지. 시사 프로에 그런 애들이라도 보여 줘야 시청자가 붙을 거 아냐. 피디고 작가고 시집가면 하나 필요 없는 것들인데. 계집애가 피디 행세하면서 백날 그러고 다녀 봐야 사람들은 너 화장 예쁘게 하고 야한 옷 입고 잠깐 나오는 거 훨씬 좋아한다고. 너 벗어 봐야 비쩍 말라서 볼 것도 없게 생겼는데 치마라도 짧게 입어. 화장도 좀 하고.”
저열하기 이를 데 없는 수작이었다. 윤은 이를 악물었다. 목덜미로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당사자인 정언이 어떤 심정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이사님.”
정언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을 리 없었다. 일부러 정언을 무너뜨리려 하는 말이라는 건 누가 봐도 뻔했다. 정언이 흔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광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정언을 훑어보았다.
“너 강재희랑 잤냐? 그래서 거기 붙어 있으려고 그래? 그거 아니면 계집애가 같은 데 있을 이유가 뭐야?”
[다음 편에 계속….]32) 제주 4.3 사건 :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와 미 군정의 강압이 계기가 되어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남로당 진압을 빌미로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 수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나, 당시 제주도 마을 95퍼센트가 화제로 소실되었으며 제주도민 8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1월에 이르러서야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었으며,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 보고서가 채택되어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