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정언의 얼굴에서 일시에 핏기가 사라졌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스위치를 누른 것 같은 감각이 지났다. 이성이 단번에 발화점까지 끓어 올라갔다. 머릿속이 완전히 새하얗게 지워지는 것 같았다. 윤은 광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광훈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끼어드나 하는 표정이었다.
“뭐, 인마?”
“지금 뭐라고 하셨냐고 했습니다.”
윤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곁에서 정언이 예의 갖춰, 하고 윤에게 나지막하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한 번 스위치가 눌린 머릿속은 차가워지지 않았다. 이미 마지노선을 넘었다는 걸 윤 스스로는 잘 알고 있었다.
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광훈에게 말했다.
“선배한테 사과하시죠.”
광훈이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투로 킬킬거렸다. 한참을 웃던 광훈이 팔짱을 끼었다.
“사과? 뭘 사과해?”
“방금 그 발언 적절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윤이 되묻자 광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윤을 뚫어지게 보던 광훈이 내뱉었다.
“요새 젊은것들 가만히 보면 엄청 웃기네. 평피디가 뭔데 이사한테 사과를 하라 마라야? 그리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왜 나서. 둘이 무슨 사이야? 너도 서정언하고 잤냐?”
윤은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거칠게 나가떨어지며 바닥 위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이사회실 안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분노로 온몸이 떨렸다. 윤은 손을 말아 움켜쥐었다. 짧은 손톱 끝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에서 나오면 다 말입니까?”
윤이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광훈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언이 서둘러 곁에서 윤의 옷자락을 당기며 김 피디, 하고 불렀다. 윤은 자신을 도로 앉히려는 정언의 손을 떼어 내며 광훈을 향해 내뱉었다.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이냐고 했습니다. 치매 오실 나이 아닌 것 같은데요.”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야, 이 새끼야, 너 제정신이야?”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직원 성희롱하는 분이 그런 말씀 하실 자격 있습니까? 방금 그 발언 정말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지금 당장 나가서 길거리에서 스피커 켜 놓고 그 말씀 다시 해 보시죠. 하실 수 있습니까? 본인이 이사니까, 선배가 직원이니까 이 자리에서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위계 이용해서 그딴 식으로 저열하게 지껄이면 범죄라는 거 모르세요?”
이사들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평피디가 이사진에게 이 정도 수위의 발언을 한다는 건 높은 확률로 징계감일 게 틀림없었다.
전에 없이 새파랗게 질린 정언이 윤의 팔을 잡으며 김 피디, 하고 나직하게 윤을 불렀다. 그러나 윤은 그 자세 그대로 광훈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자신의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광훈의 발언이 공론화되면 충분히 문제가 될 만한 수준이었다. 이사들이 서둘러 씩씩대는 광훈을 진정시키며 윤의 눈치를 살폈다.
종철이 광훈에게 뭐라고 말하며 나가자는 듯 팔을 끌었다. 그러나 광훈은 종철을 뿌리치며 윤에게 고함을 쳤다.
“김윤, 너 지난번에도 게시판에 선동글 올린 놈이지? 간 부은 새끼가 어디서 겁대가리도 없이 설쳐? 아주 잘리고 싶어?”
“지금 해고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
어이가 없다는 투로 되묻는 광훈에게, 윤은 포켓에 꽂아 둔 보이스리코더를 가리켰다.
“지금 이 대화 녹취하고 있습니다. 자신 있으면 계속 말씀하시죠.”
이사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윤이 녹취를 하고 있다면 상황이 심각해진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광훈이 더 펄펄 뛰며 윤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 건방진 새끼가 누구 마음대로 녹취를 해?”
“저 이 대화 당사자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아닙니다. 제가 지금 이 파일 들고 시보국 내려가서 공론화 요청할까요? 폭언, 성희롱, 해고 협박, 또 뭐하시려고요?”
“야, 김윤!”
광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윤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다가왔다. 종철이 황급히 뒤에서 광훈을 끌어안다시피 해 막으며 광훈을 도로 자리에 앉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윤을 쳐다본 정언이 거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김 피디, 그만해.”
그 얼굴을 보자 누군가가 심장을 마구잡이로 휘젓는 듯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정작 정언이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게 더 미칠 것 같았다.
“당장 선배한테 사과하세요. 사내에서 공론화 불가능하다면 녹취록 인터넷에 전체 공개하겠습니다. 고소하실 거면 그때 하시죠. 겁 안 납니다. 저희가 자부심 있고 충성심 있다면 그건 회사에 있는 거지, 이사님들한테 있는 거 아닙니다. 그런 소리 지껄이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분이 이사 직함 달고 앉아 계신다는 거 전 납득 못 합니다.”
“하, 나 이거 진짜…….”
광훈이 넥타이를 풀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윤을 빤히 쳐다보던 광훈이 입술을 짓씹었다. 윤의 말대로 만약 인터넷에 이 녹취록이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여론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얼굴이 상기된 광훈이 분함을 참지 못하는 투로 빈정거렸다.
“아, 그래. 내가 아주 대역 죄인이네, 대역 죄인이야. 계집애 앞에 두고 말 한마디 잘못해서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나보고 쪽을 주겠다는데 세상 잘 돌아간다.”
“사과 똑바로 하세요!”
윤이 고함을 치자 광훈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야 이 새끼야, 너 그런 버르장머리 어디서 배웠어? 부모가 그렇게 가르쳐?”
“저희 부모님은 최소한 상식적인 분들입니다! 이사님은 가정교육 얼마나 대단하게 받고 저한테 그런 말씀 하십니까? 지금 회사 명예 실추시키는 게 제 발언입니까, 아니면 이사님 발언입니까? 살 만큼 사시고 배울 만큼 배우신 분이 그거 판단이 안 되세요?”
화가 치받을수록 도리어 머릿속은 더 차가워졌다. 윤과 더 이상 말해 봐야 얻을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끝에 앉아 있던 갑진이 뭐라고 하려는 광훈을 제지했다.
“고 이사, 진정해.”
갑진이 종철에게 눈짓을 하자 종철이 광훈을 뭐라고 달래며 급히 이사회실 바깥으로 광훈을 데리고 나갔다. 끌려 나가다시피 하는 동안에도 윤을 쳐다보며 씩씩거리던 광훈이 사라지자 이사회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한동안 침묵하던 갑진이 손을 깍지 끼어 입가에 대며 윤을 마주 보았다.
“지금 김윤 피디 그 태도 징계 불가피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상관없습니다.”
윤은 싸늘하게 내뱉었다. 윤을 빤히 응시하던 갑진이 정언에게 손짓을 했다.
“두 사람 그만 나가 봐.”
가벼운 묵례를 한 정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꼼짝도 않고 있는 윤의 팔을 잡아 이사회실 밖으로 나온 정언은 비상구 계단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한동안 말없이 바닥을 보고 서 있던 정언이 한숨을 쉬었다. 어디서부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한 듯했다.
몇 분쯤 그렇게 서 있던 정언이 고개를 들었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민 채였다. 어떤 단어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정언이 가느다란 손끝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왜 그랬어?”
낮은 목소리였다. 윤은 정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언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그랬냐고 묻잖아.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윤은 대답 대신 정언의 곁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두 층만 올라가면 옥상 정원이었다. 문을 열자 텅 빈 옥상에 바람이 스산했다. 아침부터 도시를 뒤덮고 있던 안개가 아직도 묵직하게 내린 채였다. 커튼 너머의 풍경처럼, 안개 속 회색 도시의 모습이 아득했다.
난간을 쥐고 선 윤은 눈을 떨어뜨렸다. 경계를 흐리는 풍경 속으로 시선이 배회했다. 난간을 움켜쥔 손에서 차가운 감각이 스몄다. 속에서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윤을 따라 올라온 정언이 옥상 문을 닫으며 윤의 팔을 잡았지만 윤은 그 손을 떼어 냈다.
“할 말 없어요.”
잠긴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 숨길 수가 없었다. 정언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만무했다. 정언은 다시 한 번 윤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나 봐, 나 보고 얘기해. 지금 본인이 무슨 짓 저지른 건지 알기나 해?”
정언은 분명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방금 이사회실에서 당한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참았던 정언이었다. 그런 정언이 화를 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윤이 괜히 자기 일에 끼어들어 징계를 받을까 싶어서였다.
눈앞에서 그런 말을 들어 놓고도 정언이 스스로가 아니라 자신을 걱정하는 게 싫었다. 아까부터 발화점에 다다라 있던 감정이 들끓었다.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된 윤은 정언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 기세에 정언이 비틀거리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김 피디.”
정언이 뭐라고 더 말을 잇기도 전, 윤은 씹듯이 뱉었다.
“할 말 없다고 했잖아요. 저 무슨 처분 당하든 상관없어요. 그딴 거 신경 안 써요.”
그 말에 정언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진짜 어쩌려고 그래?”
“제가 뭘 어떻게 할까요? 그럼 그 자리에서 한마디도 안 하고 입 다물고 있었어야 돼요?”
이미 말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뒤였다. 침착하려 해도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윤의 말에 정언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쳤다.
“그걸 왜 못 참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으면 될 걸 왜 그래!”
그런 건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윤은 숨을 들이쉬었다. 평소에는 읽기 어렵다고 생각한 정언의 눈동자에서 윤은 얼핏 지나치는 감정들을 보았다. 분노일까, 슬픔일까, 당혹감일까, 혹은…….
겹겹이 쌓여 올라온 그 감정의 층위를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윤은 정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 선명해졌다. 머릿속의 말들이 그대로 쏟아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