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제가 왜요? 제가 왜 참아야 되는데요? 대체 누가 눈앞에서 그딴 개소리 듣고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참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전 아니에요! 저 욕하는 거면 그냥 넘겼어요. 그런데 선배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제가 왜 듣고만 있어야 돼요?”
“김 피디!”
정언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말끝마다 계집애, 계집애 하면서 선배 무시하고 개 같은 소리 하는데 제가 왜 참아야 되는데요! 그 새끼들이 뭘 알아요? 선배가 어떻게 일하는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내가 아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이 그딴 소리 하는 거 어떻게 참으라고요!”
그 자리에서 이성을 잃었던 건 결국 그 때문이었다. 는 정언의 세상이었고 삶 자체였다. 윤은 그걸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다. 정언의 모든 걸 아무렇지도 않게 부정하는 인간들 앞에서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언이 거기서 느꼈을 모멸감을 홀로 감내하게 하기는 싫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침묵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정언이 그런 순간에 스스로를 혼자라고 느낀다는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윤은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입 안이 온통 마르는 것 같았다. 짧은 침묵이 지났다. 정언이 한숨처럼 말했다.
“프로그램 폐지 걸려 있어. 그냥 잠깐이야. 듣고 넘길 수도 있었던 거잖아.”
손에 쥐자마자 부스러지는 모래처럼 물기 없는 목소리였다. 그건 정언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도 들렸다. 그냥 잠깐. 그 짧은 말로 정언이 참고 지나왔을 수많은 순간들은 보지 않아도 쉽게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
윤이 고개를 저으며 정언을 똑바로 응시했다.
“선배가 이딴 소리 들어가면서 견뎌야 되는 거면 저 폐지돼도 상관없어요. 남들 슬프고 억울한 얘기 다 들어 주는데, 그럼 선배 얘기는 누가 들어 줘요? 남들이 이런 일 당했으면 자기 일처럼 화냈을 거면서, 왜 자기 일에는 그냥 참으려고 하는 건데요?”
정언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보다는 못 했다, 에 더 가까운 정적이었다. 윤은 고개를 숙이며 바닥으로 긴 숨을 뱉었다. 속에 들어찬 열기 탓에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괴로웠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누가 조금만 더 건드리면 정말 그대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윤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요. 선배 앞이라 더 욕 못 한 게 열 받는 거지 제가 거기서 그런 거 후회 안 한다고요. 저 지금 화났으니까 더 설득하려고 하지 마세요. 선배가 한마디만 더 하시면 저 정말 폭발할 것 같아요. 진짜 눈 뒤집힐 것 같은데 참고 있는 거니까 제발 그냥 두세요.”
윤은 정언에게서 등을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나는 건지, 울고 싶은 건지도 판단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들끓는 열 때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 감정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건지 몰라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이런 건 정말 처음이었다.
잠깐 사이를 둔 정언이 등 뒤에서 윤의 팔을 잡았다.
“김 피디, 잠깐만. 진정하고 내 말 들어.”
그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머릿속에 새빨갛게 경고등이 켜진 듯한 감각이 지났다. 정언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탓이었다. 징계 받을 걸 알면서 왜 그랬냐고, 참았어야 한다고, 그냥 넘어갔어야 한다고.
그게 자신을 위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언이 지금 이런 순간에 왜 스스로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언이 다시 한 번 윤을 돌려세웠다.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윤은 자신의 팔을 잡은 정언의 손목을 움켜쥐어 벽으로 밀어붙였다.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른 몸은 무방비 상태에서 너무 쉽게 떠밀렸다.
정언의 등이 벽에 세게 부딪쳤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몸이었다. 아픔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놀랐는지, 정언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윤을 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손으로 정언의 왼쪽 손목을 잡은 윤은 다음 순간 다른 손을 벽에 짚어 사이로 정언을 가뒀다. 시멘트벽의 냉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머릿속을 온통 태워 버리는 것 같은 열기와 그 냉기가 기묘하게 뒤섞였다. 정언을 가둔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마디만 더 하시면 저 진짜 폭발할 거라고 했잖아요.”
윤은 간신히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벌어진 정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지났다.
손목을 잡은 손안으로 희미한 떨림 같은 감각이 지났다. 자신일까, 정언일까. 윤은 그 감각이 어느 쪽에서 전이되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온통 녹아 버린 캐러멜처럼 뒤엉켰다. 윤은 정신없이 떠오르는 단어들을 내뱉었다.
“저한테는 무슨 말 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선배한테 그런 말 하는 건 못 참아요. 누가 그 새끼 죽여도 된다고 했으면 정말 죽여 버렸을 거예요. 저 눈 돌아가면 보이는 거 없으니까. 지금도…….”
윤은 말을 멈췄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건 그때였다. 모든 단어들이 입에서 나오는 즉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손안에서 전해지는 그 서늘한 체온, 가장 가까이서 닿는 가느다란 숨결, 그리고…….
“김 피디.”
정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귓가에서 모든 소리가 다 지워졌다. 아주 깊은 물속에 그대로 빠져 버린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언이 잡힌 손목을 빼려는 것처럼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것을 느낀 윤은 무의식중에 그 손목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민감해진 감각 탓에 부드럽고 차가운 한 겹의 피부 아래 가느다란 골격까지 그대로 그릴 수 있을 듯했다.
순간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부러져 버릴 것 같은 그 약함이 실감나 겁이 났다. 처음 정언을 지키기 위해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빈틈없는 정언이 실은 지나치게 가볍고, 지나치게 말랐다고 느꼈던 그 순간.
서정언이라는 이름을 감당하기에는 버겁지 않을까 언제나 궁금했었다.
윤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간신히 눌렀다. 이렇게 가까워진 순간을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머릿속이 녹아 버릴 것 같은 욕망 따위는 단 하나도 없다고 맹세하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에게만 허락된 무방비함을 이용할 기회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윤이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아주 작은 실수가, 그저 지나치는 행동이 지금처럼 정언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서.
“선배는 저 더 경계하셔야 된다고 했던 거 농담 아니에요.”
윤은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단어들이 입 안에서 거칠게 긁혔다. 양가적인 감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불가분의 관계였다. 미치도록 원하면서도 그만큼 두려웠다.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순간을 놓칠 수가 없었다.
윤은 눈을 들었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정언의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윤은 벽을 짚어 정언을 가두던 손을 뗐다. 그리고 그 손으로 정언의 창백한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아주 조심스럽게 뒤로 넘겼다. 손끝이 떨었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손가락 끝으로 정언의 뺨이 거의 스치듯 닿았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거기에서부터 녹아들었다. 귀 끝을 지난 윤의 손은 정언의 짧은 머리칼을 덧그리다 목덜미 부근에서 멈췄다.
거의 환각에 가까울 정도의 옅은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 희박한 감각조차 이성을 잃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간혹 상상 속에서 어림하던 어떤 감각도 현실을 누르지는 못했다.
“……싫다고 하세요.”
그 말은 거의 바닥난 이성의 마지막 흔적에 가까웠다. 윤은 떨리는 손끝을 다시 벽에 짚었다. 아까처럼 정언을 완전히 가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빠져나가게 두지도 않는 위치였다. 정언에게 선택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 지금 제정신 아니에요. 싫다고 하시면 손끝 하나도 안 건드릴 테니까, 선배가 원하지 않는 거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그러니까…… 싫다고 하세요. 저도 제가 무슨 짓 할지 몰라요. 제발 그냥 싫다고 하세요.”
마지막 말은 숨소리나 다름없이 잠겨 나왔다. 눈앞이 아득했다. 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냥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언에게 싫다고 말하라고 한 건 진심이었다. 스스로 무슨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뭘 하고 싶은 건지,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윤이 지금 생각하는 건 오직 하나였다. 정언이 싫다고 단 한마디만 한다면 모든 걸 멈출 수 있었다.
긴 정적이 지났다. 하지만 어쩌면 고작 몇 초에 불과했을 수도 있었다. 윤은 문득 이마에 닿는 손길을 느꼈다.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거기 남은 아주 희미한 흉터를 덧그리는 차고 부드러운 손끝.
그 감각이 윤의 단정한 눈썹 위를 지났다. 얇은 눈꺼풀과 긴 속눈썹을 스친 손끝이 윤의 뺨을 감쌌다. 정언의 손끝에 스민 습기가 뺨 위로 옮아 왔다. 그 때문에 윤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겨우 자각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숨결이 비스듬히 미끄러졌다. 시선보다 더 가까이서 호흡이 닿았다. 공기가 움직였다. 윤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 감각을 따라 몸을 숙였다. 한 뼘, 혹은 겨우 반 뼘. 실제로 그 거리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짧은 숨결의 끝에서 정언의 입술이 느껴졌다. 물기 없는 얇은 피부가 맞닿아 스치는 감각은 마치 처음인 듯 낯설었다. 물기가 어려 약간 흐려진 시야로 정언이 가만히 자신을 마주 보는 시선이 들어왔다.
왜 싫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불현듯 본질적인 물음이 지났다. 그러나 윤은 그 답을 생각하는 대신 벽에 닿아 있던 손으로 정언의 얼굴을 감쌌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등과 손가락 사이로 휘감기듯 떨어졌다. 손끝으로 오른쪽 눈가를 스치며 긴 속눈썹을 만지자 정언이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감았다.
윤은 다른 손으로 쥐고 있던 정언의 손목을 끌어 자기 목덜미에 얹으며 그 팔로 정언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품 안으로 저항 없이 들어온 몸을 겨우 한 팔로도 완전히 감싸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직후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