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입 안에 조그만 얼음 조각을 올려놓은 것처럼, 서늘하고 얇은 입술이 윤의 입술과 혀끝에서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연신 뺨과 목덜미를 감싸고 만지는 손끝 위로 정언의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아주 가느다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지났다.
윤은 더 절박하게 정언을 감싸 안았다. 품 안에서 그대로 사라질 것 같은 모든 감각들이 윤의 머릿속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사이를 떠도는 공기의 입자 하나조차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윤의 어깨를 움켜쥔 정언의 손끝이 떨렸다. 셔츠의 천이 구겨지며 만드는 부정형의 패턴이 그 손끝에서 번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숨을 쉬는 법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정언을 놓아 주자 떨어진 입술 사이로 희미하게 젖은 마찰음이 스쳤다. 잠시 넋을 잃은 듯 서 있던 윤은 막혔던 숨을 한꺼번에 토했다. 거칠어진 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벽을 짚은 윤은 바로 앞에 있는 정언을 보았다. 정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동작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윤은 멍하니 그 눈동자를 마주 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가 너무 좋아서…… 미쳐 버릴 것 같아요.”
과부하가 걸린 퓨즈처럼 머릿속의 모든 생각이 전부 끊어진 채였다. 아무것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정언이 말없이 윤을 응시했다. 가독 불가능한 눈동자. 왜 이렇게 가장 가까운 순간에도,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윤은 눈을 감았다. 속눈썹을 타고 물기가 배어 나왔다. 정언이 손끝으로 눈가를 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윤은 그 손을 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안으로 말리며 윤의 단정한 손톱 위를 감쌌다.
“……옆에 있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숨소리에 섞여 나온 말은 흐릿한 안개 사이로 가라앉았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윤은 다시 한 번 정언에게 키스했다. 정언의 마른 팔이 잠시 머뭇거리다 윤의 목을 안았다. 옅은 떨림이 맞닿은 모든 곳에서부터 스며들었다.
늘 진열장 바깥에서만 볼 수 있던, 아주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정언의 머리칼과 뺨과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덧그리고 어루만지는 손끝이 떨었다. 부드러운 아랫입술을 물듯 머금으며 윤은 정언의 뒷머리를 완전히 감싸 끌어당겼다.
스며드는 숨결 사이로 미처 감추지 못한 열기가 뒤섞였다. 정언이 이대로 녹아 사라질까 봐 무서워, 윤은 그 가벼운 몸을 꼭 안았다. 차고 희미한 눈의 냄새가 스쳤다.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이 품 안에서 환각처럼 찾아들었다.
곁에 있게 해 달라고,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바란다고, 혼자 두기 싫다고, 참고 견디는 건 그만해도 된다고…… 수많은 단어들이 부유했지만 무엇 하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어떤 말도 지금 이후의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체온과 숨결과 모든 감각들이 단어들을 대신했다. 안개에 감싸인 난간 바깥의 도시는 고요했다.
회사 근처의 작은 한정식집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대형 룸이 팀원들로 가득 찼다. 제일 안쪽 구석에 앉은 정언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정언,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점심도 안 먹었다며. 괜찮아?”
정언은 곁에서 자신을 툭 치며 속삭이는 민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사회실에 다녀온 이후로 오후 내내 거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폭풍처럼 휘몰아친 수많은 일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정언의 정신을 빼놓은 건 당연히 윤이었다.
그 자리에서 왜 싫다고 말하지 않았는지 정언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윤과 그렇게 둘만 다니면서도 정언은 한 번도 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 거라고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단둘이 있는 집 안에서 윤이 자기 입으로 선배는 저 더 경계하셔야 돼요, 하고 말했을 때조차도 속으로 귀여운 소리 하네,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까의 일은 경우가 달랐다. 싫다고 말하라고, 자기가 무슨 짓 할지 모른다고 입술을 달싹이던 윤의 얼굴에 완전히 몸이 얼어붙었던 것이다. 윤이 그렇게 압도적으로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싫다는 말 한마디면 윤은 즉시 무슨 행동이든 그만뒀을 게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그 말을 하지 않은 건 왜였을까.
손끝으로 마른 입술 위를 쓸자 환각처럼 그 선명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얇은 피부가 맞닿고 체온과 숨이 스미던 짧은 순간. 미쳐 버리겠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얼굴을 감쌌다.
연애라고 부를 만한 걸 안 해 본 것도 아니었고 당연히 키스가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성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경우는 정말 전무했다. 회사에서, 후배와, 업무 시간에, 그것도 그 난리를 친 직후라니.
광훈의 말에 화가 나지 않았고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물론 에 들어온 이래로 몇 년을 별별 소리 다 들어가며 일해 온 정언이었다. 뒤에서 재희와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문도 당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누가 눈앞에서 강재희랑 잤냐는 소리를 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프로그램을 인질로 잡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게 비열한 수작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알고도 당해야 하는 처지가 분할 뿐이었다.
다만 조금만 더 가면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윤이 먼저 터질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던 게 문제였다. 윤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걸 본 건 경일용역 사무실에서의 일 이후로 처음이었다.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누구라도 윤이 그렇게 폭발했다는 걸 믿지 못할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정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시사보도국 복도의 게시판에 붙은 윤에 대한 징계 공고였다. 시사보도국 3부, 김윤, PD, 2개월 감봉. 딱딱한 글자들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사회가 끝나자마자 징계 결정이 내려진 걸 보니 고광훈이 어지간히 열 받았나 보다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 이사에게 그 정도 수위의 발언을 한 것치고는, 더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새털처럼 가벼운 징계 수위였다.
물론 윤이 그 안에서의 대화를 전부 녹취한 데다 공론화할 수도 있다고 했으니, 이사진 입장에서도 그 이상의 징계를 내리는 게 부담이었을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니, 근데 이사회에서 뭐라고 했길래 올라가자마자 김 피디 징계 공고 붙은 거야?”
밑반찬부터 집어 먹고 있던 찬수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윤은 자리에 없었다. 옥상에서 그러고 난 뒤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정언은 나 먼저 내려갈게, 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은 탓이었다.
금방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쩐 일인지 윤은 오후 내내 부재중이었다. 지혁이 문자로 여섯 시 반에 예담에서 회식이라고 알려 주긴 했다는데, 여섯 시 이십 분이 된 지금까지도 윤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찬수의 물음에 석현이 곁에서 물을 따르며 대답했다.
“공고 보고 비서실에 물어봤더니 그러던데요, 김 피디가 고광훈 들이받았다고. 뭔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고광훈 얼굴 시뻘개져서 원종철이 끌고 나오는 거 봤대요. 고광훈이 김윤 그 새끼 죽여 버릴 거라고 펄펄 뛰었다는데?”
석현의 말에 예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고광훈을? 미쳤다, 미쳤어. 진짜 그 꼴통을 들이받았다고? 서정언이 아니라 김윤이? 아니, 뭘 어떻게 했길래 고광훈이 그렇게 넘어가? 야, 김윤 진짜 그렇게 안 생겨서 중요한 순간에 깡이 있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정언은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참았다. 그 중요한 순간이 하필이면 인트라넷에 이사진 까는 글 올릴 때, 재희에게 자신을 여자로 생각한 적 없냐고 물었을 때, 광훈에게 제정신이냐고 대들었을 때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칠 노릇이었다.
팀원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당장 재희를 간덩이 부은 사람의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윤을 앉힐 게 틀림없었다.
“아니, 아무리 깡이 있어도 김 피디가 뭐 그냥 아무 일도 없는데 그랬겠어? 고광훈이 뭐라고 또 개소리 찍찍 했으니까 들이받았겠지. 서 피디 같이 있었잖아. 뭐라고 했길래 김 피디가 그런 거야?”
찬수가 의아한 표정을 하다가 정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언은 없던 두통이 생기는 기분에 얼굴을 찌푸렸다.
“다들 남 얘기하는 거 되게 좋아해, 하여튼. 관심 끄세요. 뭐 좋은 소리 했을 거 같아서 그게 궁금합니까?”
사실 그다지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소리들이기도 했다. 광훈이 한 말 중 10분의 1이라도 들려준다면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죄다 거품을 물고 넘어갈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찬수는 그 말에 더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고광훈이 좋은 소리 했을까 봐 궁금하겠어? 막말 어록이 팔만대장경인 거 대한민국 사람이 다 아는데. 김윤 그 생글이가 뭔 소리 듣고 야마가 확 돌아 버렸나 궁금해서 그러지.”
하기야 다른 사람도 아닌 김윤이 이사한테 대들어 징계를 받았다니, 눈으로 보지 않고는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을 만한 일이기는 했다.
석현이 생각났다는 듯 어, 하며 방 안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김 피디 어디 가서 안 들어오냐?”
“바로 징계 떨어진 거 보니까 보통 난리 아니었나 본데, 뭐. 어디 담배라도 피우러 갔겠지.”
철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하자 지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형 담배 안 피우는데요.”
“그럼 낮술이라도 하러 간 거 아냐?”
“술도 못 마셔요.”
지혁의 말에 석현이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 김 피디는 무슨 재미로 살아, 그럼? 애인도 없다며. 전화해서 하소연하러 간 것도 아닐 거 아냐.”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건지 뭔지, 윤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듣고 있던 정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 일에 관심 좀 끄라니까 이 사람들이 진짜!”
그러자 대각선에 앉아 있던 호형이 청포묵 무침을 우물거리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하여튼 서정언 매몰차. 서 피디 스무 살 넘어서 엄마 본 시간보다 김 피디랑 있었던 시간이 더 길겠구만 그게 왜 남이야? 부사수 좀 챙겨 줘. 그런 애가 요새 어딨다고 그래? 서 피디 그 성깔 다 참고 지금 몇 달째 붙어 있는 건데. 난 김 피디 회사에서 상 줘야 된다고 본다, 진짜.”
“상 앞에 두고 얻어터질 소리 계속해 봐.”
정언이 눈을 부릅뜨며 내뱉는 말에 호형이 즉시 곁에 앉은 석현을 향해 말을 돌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