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솔직해지자, 우리. 피디님들은 아니잖아. 김윤이라고 왜 말을 못 해?”
그 바람에 작가들 사이에서 왁 하고 웃음이 터졌다. 픽 웃은 정언은 윤 쪽으로 슬몃 시선을 던졌다. 정작 당사자인 윤은 탁자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빨개진 귀 끝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혜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 못 할 건 없죠. 김 피디님 오고 우린 더 좋긴 했지. 아침에 출근하면 잘생긴 얼굴 딱 보이고. 그러면 하루가 상쾌하단 말이에요. 사회에 찌들대로 찌든 아저씨들하고 다르잖아. 김 피디님 보면 아주 그냥 아침부터 사이다 원샷하는 기분 죽인다니까요. 다른 데 시사 프로 가 봐야 아우, 아저씨들. 생각만 해도 칙칙해.”
혜주가 마지막 말을 하며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봐도 진심이 8할쯤은 되는 것 같았다. 호형이 얘 봐요, 하는 투로 혜주를 가리키며 재희에게 하소연을 했다.
“혜주한테 괜히 물어본 거 아니에요?”
“나 좀 배신감 느낀다. 김 피디 오기 전에는 다들 나밖에 없다고 그랬는데.”
재희가 서운한 척을 하자 혜주가 깔깔거렸다.
“뭐 또 그렇게 다들 예민하고 그래요. 농담이지.”
“야, 지금 그게 농담이었어? 누가 봐도 진담인데?”
호형의 정색에 혜주가 눈을 흘겼다.
“완전 농담이죠. 아무튼 우리끼리도 폐지 얘기 나온 뒤로 모여서 몇 번 얘기하긴 했었어요. 어떻게 할까. 근데 뭐 우리도 팀원인데. 작가, 그러면 남들이 보는 눈부터 달라지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 버리고 가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거예요.”
희림이 혜주의 말을 받아 재희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솔직히 말하자고 모인 건데 솔직히 말 안 하면 어떻게 하려고.”
웃으며 대답하는 재희에게 희림은 섭섭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저 강 피디님이 이런 얘기 하는 거 진짜 너무 서운해요. 우릴 어떻게 생각했으면 이걸 굳이 다 모아 놓고 물어봐야 돼요? 맨날 우리는 팀원이다, 작가들 없으면 팀 안 돌아간다, 작가들이 우리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지 않았어요? 근데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신 거잖아요. 우리는 피디님하고 생각 다를 수도 있다 그거 아니에요.”
희림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재희가 서둘러 희림을 달랬다.
“서운하게 하려는 거 아니었어. 알잖아.”
“피디님 마음 모르는 거 아닌데, 말마따나 우리 프리랜서고 경력직 작가 귀한 거 다 알잖아요. 가려면 진작 갔지. 힘든 거 뻔히 알면서 여태 붙어 있는 사람들 두고 먹고살기 힘드니까 타협해도 된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거 정말 속상하네요. 피디님만 가오 있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도 가오 있는데. 뭐가 됐든 끝까지 같이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피디님이 타협 안 하겠다는데 우리만 먹고살 길 찾으라고?”
민혜가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건 희림이 말이 맞아. 바로 얘기도 못 하고 며칠 혼자서 끙끙 앓다가 겨우 다 모아 놓고 그러니까 타협하면 어떨까, 이러는 거 진짜 강재희 안 같아. 꼴 보기 싫어 죽겠어, 아주. 혼자 고뇌하는 척 다 하고. 강 피디 혼자 멋있으면 기분 좋니? 이왕 멋있을 거면 같이 좀 하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재희가 푹 웃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휴지를 가리켰다.
“거기 휴지 좀 줘 봐, 나 지금 울어야 될 거 같으니까.”
잠시 우는 척을 하는 재희를 본 현진은 하여튼 지랄이 풍작이야, 하며 재희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재희가 아 좀, 하고 꼬집힌 자리를 문지르자 현진이 말을 잘랐다.
“그러면 이 문제는 더 거론할 거 없잖아. 결론은 난 거지. 그리고 진짜 이것 좀 말해 봐. 대체 위에서 계속 기획안 내놔라, 사전 시사 하자 이러고 난리를 치는 이유가 뭐야? 그거 지금 서정언이 하는 거랑 관련 있는 거지? 오늘 사무실 다 뒤집어엎어 놓은 것도 그렇고.”
가만히 있던 성옥이 먼저 되물었다.
“서온건설 취재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재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성옥을 보았다.
“이 작가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성옥이 정언과 재희를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대답했다.
“거기서 정언 피디님 만나러 왔었잖아요. 저번에 강 피디님 여주에서 온 편지 찾으신 것도 이거랑 관련 있는 거고.”
한 사무실에서 거의 하루 종일 같이 지내다 보면 싫든 좋든 남의 팀에서 무슨 아이템을 하는지는 대충 눈치를 채기 마련이었다. 엄청난 보안 건이 아닌 이상은 서로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알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언만은 자신이 진행 중인 아이템이 뭔지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때문에 다들 암묵적으로 뭐가 있긴 있나 보다 짐작만 한 듯했다. 재희가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이다가 정언 쪽을 보았다.
“아, 그러니까 이걸 어디부터 시작해야 되나 모르겠네. 당사자니까 서 피디가 얘기 좀 해 봐.”
짧은 한숨을 뱉은 정언은 희경의 제보로부터 시작된 사건 개요를 대강 정리해 들려주었다. 서온건설의 자재 문제, 뇌물 전달책,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증거 인멸, 오래 전부터 유착되어 온 서온건설과 엄대진의 관계, 비자금, 페이퍼 컴퍼니, 자신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협박까지 차례로 이야기하는 동안 팀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수가 정언을 나무랐다.
“이것들 진짜 큰일 날 애들이네. 야, 엄대진이 사장님이랑 국장님 깐다는 동영상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이걸 여태 극비로 하면 어떡해?”
재희가 대신 대답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지. 우리도 지금 하고 안 꼈으면 이거 진짜 방송할 엄두도 안 났을 거라고. 위에서 계속 미친 듯이 때리는 게 이것 때문인데.”
“취재하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기획안 왜 보고 싶어 한대?”
“우리가 잡아떼면 증거 없잖아. 사무실 뒤져도 나오는 게 없고. 자기들도 무슨 트집을 잡아야 자를 수가 있으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석현이 물었다.
“그럼 이 많은 걸 여태 서 피디 팀에서 셋이 했단 말이야?”
“중간에 전 부장님이 백업하기로 했으니까 일이 좀 줄긴 했죠.”
정언의 대답에 석현이 혀를 내둘렀다.
“독하다, 독해. 일이 거기까지 갔으면 좀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 어떻게 그렇게 입 딱 다물고 셋이 그 뺑이를 치냐. 강재희 껴도 넷 아냐.”
철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지금 안 나온 게 뭐야? 안영균 관련 내용하고 국세청 자료?”
안영균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석현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예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뭐냐, 주 피디 안영균이랑 같은 동네 살지 않아?”
“같은 동네 살면 다 아는 사이야? 삼청동 살면 대통령하고 친해?”
철진이 별소리 다 듣겠다는 얼굴을 하자 석현이 아니 그게 아니고, 하며 손을 휘적거렸다.
“전에 주 피디 와이프가 안영균 와이프랑 뭐 어쩌고 하지 않았어?”
“아, 그거요? 교회에서. 우리 와이프가 교회 봉사 활동 같이한다고.”
예준이 그사이 밥을 한 숟갈 뜨다 말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안영균의 가족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정언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예준을 보았다.
“안영균 와이프가 교회를 다녀요? 거기 무슨 대형 교회가 있나? 인맥 관리하는 거예요?”
“교회가 크긴 한데 인맥 관리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그냥 사람 자체가 엄청 독실하대. 봉사 활동 매일 나간다고 그러더라고. 우리 와이프도 봉사 모임 들어 있어서 집에도 초대받고 했었거든. 그래서 자기네 교회 행사할 때 엄대진도 몇 번 왔었대. 자기 남편이 엄대진 보좌관 오래 했다 그 얘기도 엄대진 왔을 때 처음 알았다던데. 생전 그런 소리 안 해서. 부인은 엄청 조용하고 얌전하고 그런 사람이래. 혹시 모르니까 와이프한테 한 번 물어봐 줘?”
석현이 그 말에 예준을 툭 쳤다.
“뭐라고 물어보게? 안영균 와이프한테 남편 비리 알면 좀 알려 달라고 그러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한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어요. 피디 와이프만 몇 년을 했는데 우리 집사람이 바보예요?”
예준이 펄쩍 뛰며 정색을 했다. 곁에서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던 철진이 호형 쪽을 가리켰다.
“페이퍼컴퍼니는 호형이가 전문가잖아.”
이전부터 페이퍼컴퍼니 관련 사건을 여러 번 다룬 적이 있는 호형이었다. 정언은 호형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스 쪽 페이퍼컴퍼니 좀 아는 거 있어?”
호형이 흠, 하고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턱 끝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스위스 계좌 조회 뚫리고 많이 줄긴 했는데, 알긴 알지. 혹시 국세청 내사 자료 있어?”
“곧 입수할 거야.”
“자료 들어오면 내가 같이 봐 줄게, 그럼. 나 그거 할 때 뽑아 놓은 전문가 리스트도 있으니까. 국세청 정보원도 있고. 어우, 진짜 미련해. 진작 까놓고 얘기를 했어야지 이걸 왜 여태 극비로 해? 강 선배도 그래요. 사찰당하고 협박당하고 일이 거기까지 갔으면 얘기 좀 해 주지 왜 숨겨, 이런 걸. 서 피디 팀에 무슨 일 생겼으면 우리는 이유도 몰랐을 거 아니에요.”
호형이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자 재희가 대답했다.
“ 정치부 1팀 싹 모가지 친 게 내부에서 회의록 유출해서 그랬다는데 어떻게 얘기를 해. 팀원들 의심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뭐 어디서 말이 샐지 모르니까. 이거 관련 있다고 그쪽에서 알면 무조건 협박 대상 될 거 뻔하고.”
찬수가 답답한지 냉수를 한 컵 따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팔짱을 끼었다.
“불신의 시대구만. 그래도 우리끼리는 그러지 말자고. 죽을 땐 죽어도 가오 있게 죽기로 했잖아.”
턱 밑을 긁적이던 찬수가 화제를 돌렸다.
“이거 우리가 다 매달려도 전체 팩트 확인해서 내보낼 수 있는지 없는지도 장담이 안 되는 거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전체 TF 체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지금 서정언 뒤에 다른 아이템 짜 놓은 것도 없잖아. 일단 위에서 뭐라고 하면 시청률 잘 나왔던 회차 몇 개 짜깁기하든 해서 서정언 방송 뒤 막는 걸로 하고, 앞에서 우리끼리 완전히 스탠바이 될 때까지 뺑이치면서 시간 남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선배들한테 나 백업하라고 하는 거 좀 그런데, 작가들도 그렇고. 괜찮아요?”
정언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는 투로 묻자 희림이 눈을 흘겼다.
[다음 편에 계속….]